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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농학박사이자 일본 토질학의 창시자이며 탐험가였던 츠네토 노리타카(恒藤規隆)의 조선 탐험기. 당시 대한제국(조선)은 사실상 무법 지대로서 일본인조차 개탄해 마지 않았다. 해외 열강과의 약탈적 조약조차도 일단 그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사실상의 이권을 차지한 후에야 맺어졌다. 나라 팔아먹는 부패와 음모가 횡행하는 중에, 정부 기관은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그 와중에 오히려 지방 세도가의 권력은 막강하여 일본조차 두려워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한국 직산 금광에 대하여

지학잡지(地学雑誌) 13권 6호
츠네토 노리타카(恒藤規隆)
1901년 6월 15일

오늘 저는 조선의 직산 금광에 대해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감기에 걸려 목이 많이 상한 상태라 오늘은 대략적인 이야기만 드리고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조선에 대해서는 그저께쯤인가, 이 학회에서 한 차례 연설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조선의 지질에 대해 전반적으로 말씀드렸고, 광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광산을 조사하는 목적이 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만약 광산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 목적 수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목적이 이미 달성되었기에, 광산에 대해 이야기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히 그중에서도 직산 금광에 대해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제가 조선에 간 목적은, 조선의 어느 광산을 개발할 경우 사업성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즉, 실제로 채굴 사업을 해도 좋은지 나쁜지를 조사하러 간 것입니다.

조선의 광산은 마치 일본의 광산 행정과 비슷합니다. 조선의 어느 광산이 유망한지를 조사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어느 광산이 유망한지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로 안개 속을 더듬는 것과 같은 막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규슈의 탄광 중 어디가 유망한가를 묻는 것만 해도 매우 애매모호합니다. 그런데 조선의 넓은 지역 중에서 어디의 광산이 유망한지를 직접 가서 본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결국 그런 방식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므로,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평판이 좋은 몇몇 유명한 광산만 골라 보기로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으로 치면 이쿠노 은광이라든가, 사도 금광처럼 예로부터 유명한 광산을 골라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 네 곳이 가장 유망하다고 여겨졌습니다:

1.	황해도의 재령 철광
2.	평안도 원산 부근의 은산 금광
3.	함경도의 갑산 구리광
4.	경상도의 용담 금광

이 네 곳이 조선 내에서는 유망하다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이 광산들을 조사해서 사업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고자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조사 기간은 겨우 3개월에 불과했습니다. 이 네 광산을 3개월 안에 모두 보려면,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광산들은 조선의 남단과 북단에 흩어져 있어서 이동 시간도 상당히 걸립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험하고 외진 지역에 있어 실제로는 각 광산마다 하루 이틀밖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안에 광산의 사업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본래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방식으로 조사하고 일단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 네 광산을 보고 돌아와, 그 도중에 관찰한 지질에 대해 강연을 한 바 있으며, 그 개요는 「지학잡지」에도 실었습니다. 그 네 곳을 방문했을 당시, 마침 은산 금광에는 영국 기술자가 와서 현장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이 광산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미 영국이 손을 댄 곳이라면 일본이 뒤늦게 요구한다고 해도 어차피 소용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고 있었지요.

또, 마침 가는 길이 적절하여, 원산 근처의 영흥 금광도 조사해달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광산이 좋다고 판단되면 일본에서 개발해주면 좋겠다”는 말이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일본 공사인 하야시(林)씨로부터 다음과 같은 부탁을 받았습니다. “요즘 일본인이 직산이라는 곳에서 금을 캐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채굴하고 있는지,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 광산인지 한번 가서 확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시간도 있었고 흥미로울 것 같아 저희는 직산으로 향했습니다.

가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사의 부탁으로 간 것이었고, 저희 본래의 조사 목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앞서 언급한 네 곳의 광산을 모두 조사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돌아온 뒤에는 여러 방면에서 얻은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우선 가장 유망하다고 판단된 곳은 재령 근처의 은률 철광이었습니다. 이는 꽤 흥미로운 곳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이전에 들렀던 직산 금광도 상당히 흥미로운 대상이었습니다. 은산 금광은 산세는 크지만, 본격적으로 개발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필요합니다. 특히 교통편 확보에 많은 비용이 들 것이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갑산 구리광은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에 있고, 용담 금광은 규모가 작아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은률 철광과 직산 금광이 가장 유망해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망해 보인다’는 정도의 잠정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이후 저희는 광석 분석을 비롯해 여러 후속 조사를 진행했고, 우리의 예측이 일정 부분 맞아떨어지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걸 한 번 실제로 개발해볼까?”라는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서 했던 조사가 매우 피상적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조금 더 철저한 조사를 한 뒤에 개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은 아마 여러분도 신문 등에서 보셨을 텐데요, 이 조사는 시부사와·아사노 광산조합이 주체가 되어 진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조합에 제안을 했습니다.

“철광과 금광 두 곳을 다시 한 번 조사한 뒤, 그중 유망한 곳을 개발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조사를 위해 다시 조선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2차 조사의 목적은 주로 금광을 조사하고, 그다음으로 철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조사를 떠나기 직전, 재작년 12월경,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하야시 씨를 통해 사사키 기요마로(佐々木清麿)라는 인물이 조선 정부에 5개소의 광산을 신청했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우리 측 의향을 받아서 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사사키 개인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고, 시부사와(澁澤)·아사노(淺野) 광산조합 차원에서는 아직 정식 신청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철저히 조사한 뒤에 개발 여부를 판단하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무렵부터 러시아가 조선의 광산을 모두 자국이 차지하려 한다거나, 미국이 그 광산을 요구한다는 등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여러 국제 정세가 복잡해졌습니다. 결국 일본 측에서도 서둘러 광산을 신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신청한 곳이 바로 안성, 직산 금광, 그리고 은률·재령 철광, 이 5곳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제가 제1차 조사에서 조사한 지역들 중, 은률 철광과 직산 금광이 가장 유망하다고 판단한 결과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사를 통해 이들 광산을 신청한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그곳이 유망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연히 그렇게 신청된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퍼지면서, 저희가 직산 금광과 철광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성(서울) 주변 일본인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따라 일본인들 사이에 격렬한 광산 선점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운동이란, 한편으로는 직산 금광을 차지하려는 운동, 다른 한편으로는 철광을 차지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이 실제로 자신들이 개발하려는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일본인이 채굴하려는 것을 먼저 선점하여 나중에 비싸게 되팔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때부터 각지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2차 조사차 조선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현지에서 “저 사람은 금광과 철광을 차지하러 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그에 따라 저의 모든 행동이 주목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광산이 괜찮다”는 식의 말을 하면, 그것이 곧바로 소문이 되어 퍼져나가고, 일본 측의 광산 개발 계획 전체에 커다란 방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컨대 직산을 일본 측에서 요구한다는 의향을 보이면, 이미 조선 정부 고위층과 내통한 사람들이 앞서 움직여서 일본 측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시도도 나타났습니다.

철광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철광에 대해서도 지방 관료나 궁내부 관리들과 결탁하여 방해공작을 벌이는 자들이 존재했고, 저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광산이 괜찮아 보인다”고 한마디만 하면, 바로 그것이 상대방에게 크나큰 정보가 되어, 결과적으로 방해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제2차 조사 내내 매우 곤란을 겪었습니다. 어떻게든 겉으로는 감추면서도, 조심스럽게 직산 금광만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조사도 정밀한 조사는 아니었고, 시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에 깊이 있는 결과를 내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대체적인 가능성은 파악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곳은 정식으로 신청해보자”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앞서 사사키 기요마로가 신청해두었던 5개소의 광산이, 이 시점에서 비로소 시부사와·아사노 광산조합의 정식 요구사항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사키 개인의 이름으로 신청이 되어 있었고, 시부사와 측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직산 금광을 요구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그제야 비로소 광산조합의 입장과 그간의 신청 사실이 합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청은 곧 일본 공사를 통한 정식 요구로 이어졌습니다.

공사를 통해 금광을 신청한 이후, 일본 내에서 보면 ‘광업 조례’라는 것이 있어서 광산을 요구하려면 다양한 세부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명확한 규정이 없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처리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도대체 어떻게 요구해야 하는지,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전에 영국은 이미 조선 정부와 일종의 잠정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 내 한 곳의 광산을 자국에 허가하기로 약속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제가 제1차 조사를 갔을 무렵에도 영국 기술자가 광산을 조사하고 있었고, 결국 그 결과로 은산 금광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 측이 조선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영국 공사는 격노했고, 당시 당사자들도 말로는 해결이 안 된다고 판단하여, 무력행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영국은 일본인 노동자 100명 이상을 고용해 무장을 시킨 뒤, 칼이나 기타 무기로 광산을 둘러싸고 조선 군대의 대응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에 크게 분노했고, “영국인은 정말 무례하다. 허가하지도 않은 광산에 불법으로 들어가 채굴 작업을 벌이다니!” 하며 군대를 파견해 몰아내려 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무력으로 압박한 끝에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기에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에, 이미 조약으로 허가된 사항조차도, 이러한 복잡한 실력행사 없이는 실행되지 않는 것이 조선의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일본 측은 그런 조약조차 없이 새롭게 금광을 요구하려 한 것이므로, 이 허가를 받아내기 위한 외교적 운동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금광을 신청하는 데 따르는 수속 절차는 전적으로 하야시 공사가 책임을 지고 진행하였기에, 우리는 그 분이 어떤 방식으로 수속을 밟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조선 측에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독일에도 허가해 주었고, 미국에도 허가해 주었고, 영국에도 허가해 주었다면, 일본에게도 금광 하나쯤 허가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요청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일본 내부의 암투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일본인들끼리 금광 선점을 위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시부사와가 직산 금광에 손을 댔다고 알려지자, 여러 측에서 선수를 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산 금광을 내게 넘겨주면 큰돈을 주겠다”며 금품을 제시하거나, 실제로 일부 금액을 지불한 흔적도 있었고, 이익을 미끼로 교섭을 시도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측은 가능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사태를 파악하려 했지만, 조선의 일이기에 쉽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볼 때, 그런 암거래나 중개 시도는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야시 공사 측에서는, 일본도 열강과 동등하게 금광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일관된 논리로 요청을 계속했습니다. 이에 조선 외무대신도 특별한 반론은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계속해서 허가를 미루고 있었고, 마침내 조선 국왕에게 직접 하야시 공사가 알현하여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선에 있었던 시점이 3월이었고, 5월 무렵이 되어서야, 조선 정부는 마침내 이렇게 기울어졌습니다:

“어찌 되었든 일본에게도 하나쯤은 허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6월경, 조선 국왕은 하야시 공사에게 직접 금광 허가를 내리겠다는 어명을 하달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우리 측도 곧바로 허가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 허가가 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장애가 발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결국 조선 정부 내부에서의 권한 다툼이었습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만약 외무대신이 일본인에게 이 금광을 허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외무대신이 조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었고, 실제로 외무대신은 그 지위를 잃을 위기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무대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산 금광은 궁내부 소관이니, 이는 궁내대신이 처리해야 할 사안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며, 궁내대신에게 그 처리를 떠넘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궁내대신도 말하길,

“허가나 조약 체결은 원래 외무대신의 권한이다.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수속일 뿐이다.”

즉, 서로 서로의 소관이 아니라며 미루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허가 문제는 크게 지연되기 시작했습니다. 6월이 7월이 되고, 7월이 8월이 되도록, 금광 허가는 도무지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모두 경성(서울)에서의 권력과 책임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직산 금광에서는 이미 1년 전부터 일본인들이 와서 금광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조선 광부들이 일본인을 매우 두려워했고, 나아가 일본인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인과 조선 광부들 사이에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큰일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2월에 현지에 도착했을 당시, 큰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인 두 명이 부상을 입었고, 약 2천 명의 조선 광부들이 봉기하여 일본인을 쫓아내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일이 크게 번져, 일본 측에서 조선 정부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마침 광산 현장에 있었습니다.

조선 광산에서 일본인이 일을 한다는 것은 무법(무법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 내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큰 죄는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일본인이 조선 광부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 돈을 돌려받지 못하자 광산에 들어가 금을 캐게 되었다는 식의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복잡하게 흘러갔고, 당시 일본 측이 직산 금광을 조선 정부에 정식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직산 광산은 여러 갈등이 집중된 곳이었습니다.

사태가 단순한 외교적 협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영국의 사례에서 드러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광산 측에서는 일본 측 인력을 늘리고, 장비와 목재를 반입하며 “우리는 본격 채굴을 하겠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채굴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외형상 채굴 준비를 하는 것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결국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의 충돌로 일본인이 부상하고 집이 불타는 등의 손해가 있었지만, 조선 정부가 이에 대해 배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측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해 배상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곳에서 절대 철수하지 않겠다.”

그리고 단호히 지방 관료의 철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현지 일본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일본인)는 조선이 군사를 동원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만약 군대를 보낸다고 해도 그걸 오히려 반가워할 것이다.”

결국 조선 정부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성(서울)에서는 각국의 사례를 인용하며 조선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마침내 일본인에게 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직산 금광이 허가되려던 시점에 북청 사건(역주: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일본군이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조선에 일본 함대가 온다, 일본군 본영이 인천에 설치된다, 평양에 일본군이 상륙한다는 등의 소문이 확산되면서 조선은 과거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급속히 진입했던 상황이 재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그 와중에 일본 함정 두 척이 북청 사건 귀환 중 인천에 입항하고, 도고(東郷.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관이 조선 왕과 알현한 직후, 마침내 직산 금광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그 허가의 정식 조인(조약 체결)은 나중에 이루어졌지만, 조선 내에서는 일본의 무력적 위세가 금광 허가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판이 퍼졌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말하길:

“일본이 무력을 동원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광산은 일본 손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세간의 평판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월(날짜 미상)에 정식 조약이 체결(역주: 직산군 금광 합동 조약 체결일은 8/16일이었다)되었습니다. 그 조약은 영국이 은산광산을 허가받을 때와 동일한 문안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직산 금광이 일본 측 손에 들어온 경위의 대략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물론 일본 외무성과 공사관, 영사관의 막후 노력 덕분이며, 저희는 그 일부만 관여했을 뿐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저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참여한 부분만으로 보면 대략 위와 같은 흐름이었습니다.

직산 금광의 채굴 구역 면적은, 이것도 영국이 은산 금광을 받을 때를 본떠서, 동서 방향으로 일본 리(里) 기준 6리, 즉 조선 리 기준으로는 약 60리, 남북 방향으로 4리, 조선 리 기준 약 40리(역주: 일본의 1리는 조선의 10리다. 이하 일본 리 단위로 서술)로 정해졌습니다. 경계는 훗날 조선 정부와의 협의 아래 확정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직산 금광의 위치와 전반적인 모습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稷山 금광의 대략적인 그림입니다(그림을 지시한다). 직산 금광의 위치는 경성(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20리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여기에 하천이 하나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직산군은 충청도의 최북단에 해당합니다.

‘직산’이라는 명칭은 이 금광과 관련하여 일본인들이 처음 알게 된 것입니다. 다만 이 일대는 이미 청일전쟁 당시에도 잘 알려진 지역이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안성과 직산 사이를 흐르는 강을 건너는 지점, 즉 ‘안성나루’인데, 이곳은 청일전쟁에서 마쓰자키 대위가 전사한 장소로 유명합니다. 안성나루에서 1리 떨어진 곳에는 성환 역이 있고, 이 역시 직산군 안에 속합니다.

‘성환’이나 ‘안성나루’는 청일전쟁 당시 자주 언급되었지만, ‘직산’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직산 군청은 도로에서 떨어진 안쪽에 위치해 있어 전투와는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근방에는 아산도 있습니다. 아산은 성환에서 약 5리 떨어져 있으며, 일본군이 아산을 향해 진격하던 당시 전장이 되었던 지역입니다. 직산 군청이 있던 곳은 전투와 직접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아산 옆 해역은 바로 ‘풍도(豊島)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입니다. 풍도는 아마도 이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상 경로로 직산에 도달하려면, 인천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풍도 북쪽 해역을 거쳐 하천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이 하구 부근에는 송포(송보, ソンボ)(역주: 한국어로 성포)라는 선착장이 있습니다. 이 송포에서 직산 군청까지는 약 3리, 현재 금광이 있는 곳까지는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안성은 경기도에 속하지만, 서울 이남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는 곳으로, 화물의 집산지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에 정해진 채굴 구역은 성환에서 안성까지 동서로 6리, 남북으로 약 4리 정도입니다.

직산군의 동쪽은 진천, 남쪽은 목천군에 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천안이라는 지명도 있고, 이 일대는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입니다. 또한 일본인이 시도하고 있는 경부철도(京釜鐵道)가 이 지역을 지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경인선이 서울과 연결되어 있고, 서울에서 약 2리 떨어진 지점에 철도역이 설치될 예정입니다. 이 철도는 안성나루 옆을 지나, 성환 역을 지나 아산 방면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이 일대는 충청도 중에서도 쌀이 많이 나는 지역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곳은 아산 부근에 있는 예산(禮山)입니다. 이곳에는 쌀과 각종 곡물을 거래하는 큰 시장이 있으며, 많은 일본 상인이 이곳에서 곡물을 매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경부철도가 개통되면, 이 직산이라는 곳은 해운과 육운 양면에서 매우 유망한 지역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교통이 좋은 곳에 금광이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 지역의 지질 구조를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직산 금광 주변 전체는 기본적으로 편마암(片麻岩, gneiss) 지대입니다. 그 속에 곳곳에 화강암(御影石)이 분포해 있습니다.

보통 편마암 속에 화강암이 끼어 있는 경우, 화강암이 높은 산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의 삼각산(북한산)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양쪽이 편마암이고 가운데가 화강암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매우 뾰족한 산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직산 부근은 이와는 반대 구조입니다. 화강암 쪽이 낮고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편마암이 오히려 높은 산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화강암은 대부분 풍화되어 부서진 사질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계곡을 따라 분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성천(安城川) 양쪽은 모두 화강암 지대이며, 직산 부근의 사련산(四連山. 성거산과 그 인근 산을 가리키는듯) 역시 전부 편마암으로 구성된 산지입니다.

또한, 산을 넘어 진천 쪽으로 가면, 그곳 역시 계곡 쪽은 화강암, 높은 곳은 편마암 지형으로 되어 있어, 이는 앞서 말한 서울 부근과는 정반대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산의 광맥(鑛脈)은 어디에 존재하느냐 하면, 대부분 편마암과 화강암의 접촉 지대에 분포합니다. 일부는 화강암 속에도, 일부는 편마암 쪽에도 있지만, 편마암만 있는 곳이나 화강암만 있는 곳에는 광맥이 없습니다. 항상 두 암석이 만나는 경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직산에서는 사련산에서 안성 방면으로 뻗은 편마암 지대의 산들이 화강암과 접하고 있는 기슭에 수많은 석영맥(石英脈)이 발견됩니다. 이 석영맥 중에는 금을 함유한 것들이 있으며, 특히 보덕원(保德院)(역주: 현재 천안시 입장면 도림리)이라는 곳에서는 훌륭한 금광석이 채굴되었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우수한 품질의 광석이었습니다.

사련산의 기슭 여기저기에도 석영맥이 분포하며, 이 중에는 다소간 금을 함유한 것도 있습니다. 성환의 송원(松原)이나 청일전쟁의 옛 전장 부근에서도 여러 석영맥이 발견되었고, 그중 일부는 금이 포함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습니다.

또한, 송포(ソンボ)(현재 안산시 성포동) 근처에서도 출발 직전 한 개의 광맥을 새로 발견하여 꽤 채굴했습니다.

편마암 지대는 천안 방면까지 이어져 있으며, 천안 역시 금을 많이 산출하는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많은 광산이 있고, 지질적으로 보아도 이 지역 역시 편마암과 화강암의 접촉대입니다.

특히 진천군과 목천군 일대에도 광맥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금이 나오는 지역입니다. 다만 확실하게 금맥이 확인된 곳은 아직 적지만, 하천에서는 사금이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사련산은 전체가 편마암 지대이며, 그 기슭에는 화강암이 접하고 있고, 그 접촉 지대에 석영맥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가 금광맥입니다.

직산에서 안성에 걸쳐 있는 지역은 예로부터 유명한 금광 지대였으며,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서울 이남에서는 직산이 금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일대는 ‘금산(金山)’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본 측의 요구 대상이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선 궁내부 관리의 말에 따르면, 이 직산 금광에서 동쪽으로 40리 이상 금맥이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대 편마암 산들이 여기저기서 화강암과 접하고, 그 접촉대에 광맥이 산재해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곳곳에 금이 분포하고 있다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현지에 머무는 동안 총 7~8곳에서 광맥을 확인했고, 그중에는 금이 풍부하게 함유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호한 광석은 1000분의 1~2000분의 1 정도의 금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1만분의 1, 10만분의 1, 심지어 100만분의 1 정도의 미량 금을 포함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광석의 유형은 대부분 석영맥이며, 일부는 풍화된 점토 같은 형태의 광맥도 있었고,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금 함유량이 높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안성군 쪽으로 들어가서도 광맥을 여러 군데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안성군 군수는 윤웅렬(尹雄烈)(역주: 윤치호의 아버지. 윤보선의 큰할아버지. 한일합방의 공로로 남작 작위 수여)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조선 육군대신의 동생으로, 이 지역(안성)에 그의 선조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논리를 폈습니다:

“안성에서 금을 캐는 것은 곧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와 같다.”

이런 이유로, 일본인이 안성에서 금광을 탐사하거나 개발하려 하면, 그를 안내한 조선인은 목을 베거나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 지역의 금광맥은 충분히 조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곳은 광맥 위치를 확인했고, 그중에는 상당히 양질의 광석이 나오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직산 금광은 지질학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장소입니다. 실제로 발견된 광맥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으며, 지형이 평탄하고 운반도 편리합니다. 특히 경부철도가 개통되면 해상과 육상 모두에서 뛰어난 교통 인프라를 갖추게 되어, 일본인의 기업 활동지로서 대단히 유망한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경부철도의 부산~대구 구간, 서울~아산 구간이 가장 먼저 건설될 예정이며, 아산~대구 구간은 후순위로 미뤄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 중간 구간이야말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노선이 될 것입니다.

안성은 경기 이남의 중심 시장으로서, 강원도 쪽으로 많은 물자가 오가는 중계지이며, 풍도 해역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가는 물자도 이곳을 거칩니다. 따라서 이 노선은 상당한 물동량을 기대할 수 있는 구간입니다.

송포(ソンボ)는 이미 지금도 쌀과 각종 물자가 모이는 시장으로서 번성하고 있으며, 경부선이 개통되면 반드시 중요한 하역지가 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직산 금광이 청일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아산이나 성환, 풍도 등에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일대를 유적지로 돌아보는 데에도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대략적인 설명만 드린 것으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Journal of Geography (Chigaku Zasshi)
1901 Volume 13 Issue 6 323-332
Published: June 15, 1901
Released on J-STAGE: October 13, 2010
DOI https://doi.org/10.5026/jgeography.13.323

261pp 한국직산금광에 대하여 https://www.jstage.jst.go.jp/article/jgeography1889/13/5/13_5_261/_pdf/-char/en

323pp 직산금광에 대하여 https://www.jstage.jst.go.jp/article/jgeography1889/13/6/13_6_323/_pdf/-char/en


참고

EOD

20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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