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농촌의 일본어 생활호칭 잔존 현상 - 전남 함평 엄다리 번동 ‘아라이상’ 사례의 미시사적 고찰
해방 이후 농촌의 일본어 생활호칭 잔존 현상 - 전남 함평 엄다리 번동 ‘아라이상’ 사례의 미시사적 고찰
서론: 문제의식과 연구 의의
1945년 광복으로 일제 식민 지배가 종식되었지만, 식민지 시기에 강요되었던 언어 관습은 과연 즉각 사라졌을까?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인들에게 강요된 일본식 성명 사용(창씨개명)은 광복 후 대부분 빠르게 청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일본식 창씨개명 이름이 생활 호칭으로 지속되었다는 구술 증언은, 이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본 연구는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번동 마을에서 해방 후 1960년대까지 “박”씨 성의 한 농민을 가리켜 일본식 성명과 경칭인 “아라이상(アライさん)”으로 불렀다는 구술 증언에 주목한다. 이 구술 사례를 토대로, 해방 후 일반 민중의 일상생활 속 식민지 잔재와 해방 후 변화에 대한 역사학계의 무관심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해방 직후의 사회문화 변동을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역사” 관점에서 복원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현행 창씨개명 관련 연구들은 주로 정책의 추진 배경과 영향, 이름 변경 과정에서의 저항과 협력 사례를 다루어 왔으나, 그 초점은 유지(有志)층이나 지식인 중심의 거시 서술에 치우쳐 있다. 예컨대 춘원 이광수와 같은 당대 지식인은 창씨개명에 적극 부응하여 “조선인의 목표는 내선일체에 있으므로 중국식 성명을 버리고 일본인과 혼동되는 씨명을 가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충북 보은 신개울 마을 주민 115명이 모두 창씨개명을 거부한 집단저항 사례나, 독립운동가들이 창씨를 끝까지 거부한 일화 등은 비교적 많이 조명되었다. 그러나 일반 농촌 주민들이 해방 후 일상에서 식민지기 개명 이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특히 본 논문의 사례처럼 특정인의 일본식 이름이 오랫동안 생활세계에서 통용된 경우는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 이는 해방 이후 민중생활사에 대한 기록 부족과 학계의 관심 부재로 인한 연구 공백이다. 본고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창씨개명 제도의 법적 구조와 기존 연구 경향을 살펴본 뒤, 엄다리 번동 마을 사례를 심층 분석하고 그 지속 배경과 의미를 고찰한다. 이를 통해 해방 후 기층 사회의 연속성과 단절을 재평가하고, 향후 생활사적 접근의 필요성을 제언하고자 한다.
일제의 창씨개명 제도와 법적 구조
창씨개명(創氏改名) 은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조선민사령 개정(제령 제19호)에 따라, 1940년 2월 11일부터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氏)를 창설하도록 강요한 제도이다. 이전까지 조선의 “성(姓)”은 같은 본관을 공유하는 거족(巨族)의 표지였으나, 일제는 이를 해체하고 일본식 가족제도의 호주 중심 “씨”를 도입하고자 했다. 식민당국은 창씨를 통해 조선인의 혈연·본관 중심 전통을 허물고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 충성 구조로 재편하려 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인을 전쟁 동원에 동원하기 위한 사회 통합책이었다.
형식상 창씨개명은 “지원에 의한 창씨”로 선전되었으나, 실상은 반강제적 정책이었다. 1939년 말 총독부는 약 20% 정도의 창씨 신청을 예상했으나, 6개월 만에 약 80% 의 가구가 창씨를 완료했다. 이 극적인 상승은 행정적 압박과 회유, 그리고 창씨 반대자에 대한 법적 처벌(치안유지법 적용) 등 온갖 강압 동원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창씨개명은 법령상 의무였던 반면, 개명(改名)—일본식 개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은 임의사항이어서 실제 개명 비율은 약 10%에 그쳤다. 다시 말해 다수 조선인은 성씨만 일본식으로 바꾸되, 가능한 한 원래 이름의 흔적을 남기는 절충을 택했다. 실제로 창씨개명 당시 많은 이들이 박정희의 사례처럼 원래 성명에서 일부 한자를 취해 일본식으로 가장하는 등 “은폐된 저항” 전략을 구사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처럼 창씨개명 정책은 법적 강제력과 폭력적 동원이 결합되어 시행되었으며, 1945년 8·15 해방 직전까지 전체 조선인의 4/5 가량이 일본식 성명을 갖게 되는 역사상 유례없는 동원 상황을 초래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과 정부는 곧바로 조선인들의 본래 이름 회복을 추진했다. 해방 직후 거리에서는 일본식 이름이 적힌 문패를 떼어내고 본명으로 교체하는 장면이 연출되었고, 학교에서 학생 명부의 일본식 이름을 수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법적으로는 미군정이 1946년 10월 「조선 성명 복구령」(군정법령 122호) 을 공포하여, 일제 통치하 창씨된 성명은 본인 신고 없이도 일괄적으로 본래 이름으로 복구되도록 정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호적에 등재된 일본식 씨명은 무효화되고, 기존 창씨명 위에 붉은 선을 그어두는 방식으로 원래 성명이 공식 회복되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일본식 이름을 계속 사용하기를 원하는 자에 한해서는 60일 내 신고 시 개명 유지를 허용했는데, 이때도 일본식 “성(씨)”의 유지만큼은 불허되었다. 또한 1940년 이후 출생자 중 한국식 본명이 없는 경우 6개월 내 신고를 통해 개명을 하도록 했지만, 절차를 몰라 일본식 풍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사례도 적지 않게 남았다. 결국 1947년 말까지 남한지역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한국 성명을 되찾았으나, 일부 행정기록과 호적부에는 여전히 일본식 이름의 흔적이 남았다. 예컨대 해방 직전 창씨명으로 부동산을 소유했던 조선인의 토지 등기에는 일본식 이름이 남아 있었고, 훗날 이를 근거로 그 토지를 일본인 소유로 오인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사례도 있었다. 1971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해방 전후 사정에 비추어 등기에 일본식 씨명이 기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명의자를 일본인으로 추정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광복 후 상당기간 법적·사회적 영역에서 일본식 성명의 잔재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존 창씨개명 연구의 편향과 공백: 유지·지식인 중심 서술의 문제
창씨개명에 관한 선행 연구와 역사 서술은 주로 정책 결정 과정과 민족운동사적 맥락, 그리고 창씨개명에 대응한 저명 인물들의 행적에 집중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은 크게 두 갈래로 나타난다. 첫째, 친일 엘리트나 지역 유지들의 사례 중심 서술이다. 식민 권력에 협력한 관료·지식인의 창씨개명은 개인의 친일행적을 조명하는 차원에서 빈번히 다루어져 왔다. 앞서 언급한 이광수는 그 전형적인 예로, 그는 1940년 2월 일간지에 「창씨와 나」라는 글을 기고하여 창씨개명을 정당화하고 조선인들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의 일본식 이름 “향산광랑”(香山光郞, 가야마 미쓰오)은 스스로 “천황의 적자가 되겠다는 맹세”라 칭송될 정도였고, 가족까지 “집안에서는 국어(일본어)만 쓴다”고 선전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친일 지식인층의 창씨개명 담론은 일제의 동화정책에 부응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둘째, 민족지도자 또는 지역 공동체의 창씨개명 거부에 관한 서술이다. 예를 들어, 충북 보은 산대리 신개울마을 주민 115명이 1940년 창씨를 집단 거부한 일화, 또는 일부 독립운동가·종교인의 완강한 창씨 거부 및 그로 인한 탄압 사례 등이 그러하다. 이들 이야기는 창씨개명 정책의 부당성과 민중의 항거를 부각하는 맥락에서 자주 재조명되며, 관련 기념비나 기록 사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유지·지식인 중심의 연구 경향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일반 민중 다수의 경험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창씨개명은 80% 이상 국민이 경험한 보편적 사건이지만, 그 역사서술은 극단적인 협력자나 저항자에 편중되어 있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강요된 정책에 울며 겨자먹기로 따랐고, 해방 후에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본명을 되찾아 삶을 영위했다는 식으로 단순화되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타난 미묘한 정체성의 혼란, 실용적 적응, 혹은 무감각화된 일상적 관행 등은 깊이 있게 조명되지 않았다. 둘째, 해방 이후의 생활사적 지속·단절에 대한 관심 부족이다. 창씨개명 자체에 대한 연구는 일제말 시기로 한정되는 경향이 강하고, 1945년 이후 사람들의 이름 사용이 어떻게 변화하고 정착했는지는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는 광복 직후의 사회사가 정치사·제도사 위주로 서술되고, 민중의 생활세계 변화는 부차적으로 다뤄져온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그 결과, 해방 이후 식민지 잔재가 일상 속에 남아있었던 구체적 양상—이를테면 어떤 지역에서 일본식 호칭이 지속되었다든지, 행정기록 외에 구어(口語)상으로 일본식 이름이 통용되었다든지—등은 연구 사각지대에 놓였다.
요컨대, 기존 연구는 지도층 인물의 사례와 민족담론적 평가에 집중한 나머지, 창씨개명이 남긴 일상의 흔적과 평범한 사람들의 해방 후 삶의 연속성을 놓쳤다. 이러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기록과 문헌에 잘 드러나지 않는 구술 증언과 미시사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접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로서, 함평 엄다리 지역에서 일본식 창씨명이 수십 년간 생활 호칭으로 불린 경험을 살펴본다.
사례 분석: 함평 엄다리 번동의 창씨명 지속 호칭
엄다리 번동은 전남 함평군 엄다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일제강점기부터 비교적 번화한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해온 농촌 마을이다. 번동 마을의 구술 증언에 따르면, 이 농촌 공동체에서는 해방 후 수십 년간 일제시대 창씨개명으로 얻은 일본식 이름이 한 인물의 호칭으로 자리잡은 독특한 사례가 전해진다. 마을 주민들은 1940년대에 창씨개명을 했던 한 자영농을 해방 이후에도 그의 일본식 성씨로 불렀는데, 그가 곧 “아라이상” 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아라이’(アライ)는 그 사람이 창씨개명 당시 선택했던 일본식 씨명(氏名) 이고, ‘상’(~さん)은 일본어 호칭어미가 변형된 경칭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호칭 사용은 광복 직후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196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왜 하필 이 사람에게 일본식 이름 별칭이 붙었고, 또 오랜 기간 유지되었을까? 구술자들의 증언과 지역 사회의 맥락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호칭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들 수 있다. 아라이상으로 불린 인물은 일제강점기 후반 마을에서 비교적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자영농(自營農)이자 지역 공동체에서 신망이 있던 연장자였다. 그는 식민지 말기 창씨개명에 비교적 순응적이었고, 일본어 생활에도 익숙했던 세대였다. 해방 후에도 그는 마을 운영이나 토지 관리, 작업용구의 대여 등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는데, 젊은 층이나 소작농에 비해 식민지 경험을 공유한 연배의 주민들이 그를 계속 일본식 이름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해방 직후 혼란기 속에서도 마을 내 위계 질서와 호칭 관습이 관성적으로 지속된 한 단면이라 볼 수 있다. 일본식 경칭 ‘상(さん)’ 이 한동안 일상 언어에 남아 있었고, 이를 새로 성립된 “~씨” 등의 한글 호칭어로 바꾸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번동 마을의 경우 “아라이상”이 그러한 사례의 극단으로, 특정 인물의 별호로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같은 마을의 빈농이나 소작농에게서는 관찰되지 않은 현상이다. 가령 가난한 농민들 중 창씨개명을 했던 이들이 있어도, 해방 후 동네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불린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직 경제적으로 유력했던 박 씨만이 예외적으로 일본식 호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식민지 언어습관의 잔존이 사회경제적 지위와 연관되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위계가 높은 인물일수록 식민지 시기 형성된 호칭 관행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부유층이라 해서 모두 이런 호칭을 유지한 것은 아니다. “아라이상”이라는 특정 사례가 발생한 데에는 몇 가지 언어습관 지속의 조건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첫째, 지역적 환경이다. 엄다리 번동은 면사무소와 시장 등이 위치해 일본인 관리와 순사가 주재했고, 면사무소 일대는 식민 권력이 가장 깊숙이 침투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아라이상”의 집은 면사무소의 담장 바로 옆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라이상” 같은 지역 유지는 일본인들과 교류하며 일본어 호칭을 자연스레 습득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식민통치 기관과의 접촉면이 넓었던 장소일수록 일본어 사용이 생활화되기 쉬웠고, 그 흔적이 해방 후에도 남기 쉬웠던 것이다.
둘째, 지역 공동체의 폐쇄성 및 외부와의 교류 제한도 이 현상의 배경으로 지적된다. 엄다리 번동은 지역 중심지이나로서 기능하는 곳이었으나, 대도시에서 처럼 민족주의 담론이나 “일본 잔재 청산” 캠페인이 마을 구석구석까지 즉각 스며든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50년대 이래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친일 잔재 청산이 공식 의제로 부각되기보다는 오히려 냉전 논리에 묻혀버렸고, 일상언어 차원의 잔재 청산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따라서 지방 촌락 공동체 내부에서는 해방된 국가의 “공식 기억”과는 다른 자체의 기억과 관행이 유지될 여지가 있었다. 아라이상이라는 호칭의 연명(延命)은 바로 이러한 맥락—지역사회 내부의 문화적 관성, 구성원 간 합의된 편의적 의사소통—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문화적 관성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써온 호칭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특히 한 집단 안에서 오랜 기간 통용된 별명이나 호칭은 사회적 기억으로 굳어진다. 엄다리 번동에서 “아라이상”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지칭하는 관용어구처럼 되어버린 면이 있었을 것이다. 구술자들은 “아라이상이라 하면 다들 누군지 바로 알았다”고 증언한다. 심지어 어린 세대가 “왜 할아버지를 아라이상이라 불러요?”라고 묻자 어른들이 “예전에 쓴 이름이야”라고 설명해주었다는 세대 간 인식 차이를 드러내기도 하는, 일화도 있다. 특히 1940년대에 성인이었던 세대가 1960년대까지 건재한 동안에는 이 관습이 지속되다가, “아라이상” 본인이 1960년대에 사망하고, 그들 세대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비로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아라이상” 호칭은 집단 기억과 언어 관성이 결합하여 유지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개인 심리와 정체성 측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인 아라이상 본인이 일본식 이름 호칭에 특별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던 정황이다. 그 세대 다수는 창씨개명을 굴욕으로 여겨 해방과 동시에 버렸지만, 일부는 오랜 습관이나 현실적 이유로 일본식 이름에 일정한 애착이나 정체성의 일부를 남긴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일본식 통명(通名)을 해방 후에도 계속 사용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차별을 피하거나 생활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비록 맥락은 다르지만, 번동의 경우 아라이상 본인도 자신의 일본식 별칭을 일종의 사회적 별호로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개인적 수용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를 계속 아라이상이라 부르는 데 심리적 장벽을 낮추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래 전 고인이 된 박씨 성의 노인은 2025년 현재까지도 “아라이상”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아라이상”으로 불렸던 박 씨의 후손들은 현재 모두 한국식 성씨인 ‘박’씨로 불리고 있으며, 지금도 번동 마을에 살고 있으나, 더 이상 일본식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즉 해당 호칭 관습은 1960년대 이후 자연스레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는 세대교체와 사회 분위기의 변화가 자리한다. 1970~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은 세대가 노령화되었고, 젊은 세대는 일본식 호칭에 대한 경험이나 애착이 없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 전반에 일본어 잔재 청산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공개적으로 일본식 별명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에는 방송이나 출판 등에서 일본어 투의 표현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활발했고, 학교 교육에서도 올바른 한국어 쓰기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설령 “아라이상”이라는 호칭이 남아 있었다 해도, 밖으로 표출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을 내에서도 차츰 젊은 층은 그 호칭을 낯설게 여기고 쓰지 않게 되었고, 자연히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
종합하면, 엄다리 번동 마을에서의 창씨명 지속 호칭 사례는 식민지기 부여된 정체성이 해방 후에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특정 맥락에서 재생산된 예로 파악된다. 이는 단순한 호칭의 해프닝이 아니라, 해방 공간(解放空間)이라 불리는 과도기 시기 민중 생활세계의 복합적 양상을 드러낸다. 법과 제도는 일거에 “조선 성명 복구”를 이루었지만, 현실의 일상문화와 기억은 그보다 훨씬 완만한 속도로 변화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이 사례를 뒷받침한 계층적·사회문화적 조건을 좀 더 일반화하여 논의한다.
계층적 호칭 지속의 조건 및 사회적 맥락
엄다리 번동의 사례를 통해 드러난 창씨명 호칭의 해방 후 지속 현상은, 그 발생 배경에 몇 가지 일반적인 조건과 맥락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식민지 경험을 공유한 기성세대 집단과 위계질서: 해방 후에도 동일한 지역사회에 남은 기성세대들은 식민지기의 공통된 경험과 생활방식을 부분적으로 지속했다. 이들은 서로를 일본식 이름이나 일본어 호칭으로 부르는 데 익숙했고, 이를 갑작스레 모두 바꾸지 못했다. 특히 마을의 연장자나 경제적 상위층 인사는 그 권위로 인해 주변인이 그의 이전 호칭을 계속 사용하게 만드는 “사회적 관성” 이 존재했다. 번동 마을에서 아라이상이 지속적으로 아라이상으로 불린 것은, 그가 지닌 사회적 역할(토지 소유자, 연장자)이 식민지기와 연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계층적 상하관계와 권력관계의 지속이 호칭의 지속으로 연결된 것이다. 만약 그가 해방 후 마을을 떠나거나 지위가 약화되었다면 별명이 유지되기 어려웠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기에 과거 호칭이 굳어졌다.
2) 공식 담론과 현실 생활사의 괴리: 해방 이후 국가와 사회 지도층은 일본식 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확립을 강조했으나, 이는 주로 상징적이고 도시 중심의 담론에 머물렀다. 농촌 마을의 일상까지 이를 실천·감시하는 체계는 미약했다. 1940년대 말~50년대의 좌우 대립과 전쟁, 60년대 이후 개발독재 체제 하에서 일상문화의 세세한 식민잔재를 문제삼는 분위기는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따라서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 과거에 불러오던 이름을 계속 부른다고 해서 제재를 받거나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광복은 되었지만 생활은 계속된다”는 현실 논리가 강하게 작용했다. 번동의 사례처럼 마을 내부에서 통용되는 관행은 공적인 규율의 시야에서 벗어난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 방치되곤 했다. 이는 구술사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으로, 국가 기록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 사람들의 생활 속 변동은 담론과 현실의 시차(時差) 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3) 기억과 정체성의 복합성: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있어서 식민지기 이름은 단순한 억압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 시절의 기억과 삶의 일부이기도 했다. 해방 후 모든 사람이 식민지의 흔적을 동일하게 인식하고 배척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양가적 감정이나 실용적 고려로 인해 일부 흔적을 유지했다. 번동의 아라이상 사례에서는,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일본식 별칭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 이름이 의도된 친일 행위의 표식이라기보다, “한때 쓰던 호칭” 정도로 탈정치화되어 인식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마치 별명처럼 굳어진 창씨명 호칭에는, 그 사회집단의 기억 투영과 정체성 혼재가 담겨 있다. 주민들은 그 호칭을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더 이상 ‘일본에의 예속’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호칭의 의미 변환이 일어난 것이다. 아라이상이라는 말이 1940년대에는 그에게 씌워진 일본식 이름 자체였지만, 1960~70년대의 주민들에게는 “우리 마을 ○○ 어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화한 칭호로 쓰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 변화가 있었기에 지속 또한 가능했다.
4) 구술 기억으로서의 존속: 마지막으로, 이러한 현상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공식 기록의 부재이다. 일본식 이름을 계속 불렀다고 하여 문서에 남을 일도, 통계에 잡힐 일도 아니었다. 결국 이 사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구술 증언으로만 남았는데, 이는 동시에 그러한 관행이 당대에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갔음을 방증한다. 만약 갈등이나 논쟁거리가 되었다면 신문 기사나 민원, 행정지도 등의 형태로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번동 마을의 경우처럼 조용히 지속되다가 사라진 생활사적 단편들은 구술 기억 속에서 은밀히 전승될 뿐이었다. 이것은 학술연구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사각지대이며, 동시에 생활세계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의 조건들은 한 지역의 특수한 사례를 넘어서, 해방 직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일어났을 법한 생활사적 연속성의 모습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창씨개명의 상흔과 영향이 사람들의 뇌리와 관습에 잔존한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기록되지 않고 “잊힌 역사” 로 남아 있었기에, 우리 역사학의 시야에는 오래도록 포착되지 못했다.
왜 이 경험은 학문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는가: 구술사의 부재와 기록의 단절
번동 마을의 창씨명 지속 호칭 경험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역사 사례지만, 동시에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제기한다. 왜 이러한 일화는 지금껏 학계의 조명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이는 곧 해방 후 민중 생활사 연구의 한계와 직결된 문제로 볼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사료 기반의 한계와 구술사 접근 부족이다. 해방 후 민중의 일상에 관한 역사 연구는 전통적으로 문헌 자료의 결핍에 부딪혀 왔다. 공식 문서나 신문은 국가정책, 정치적 사건, 주요 인물에 집중될 뿐, 시골 마을 주민들이 누구를 무엇이라 불렀는지까지 담아내지 않는다. 일기나 편지 등 사적 기록이 존재할 수 있으나, 대개 개인 차원에 머물고 공개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술사(口述史) 방법은 유용한 대안이지만, 한국 역사학계에서 구술사의 본격적 활용은 1990년대 이후에야 활성화되었다. 그것도 주로 한국전쟁 경험이나 산업화 과정 등 “큰 역사” 속 개인의 기억을 채록하는 데 치중되었고, 해방 직후 농촌 생활의 미세한 부분을 채집·연구한 사례는 드물다. 번동 마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의 구술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 연구자들이 “말해지지 않은 역사” 에 귀를 기울이는 감수성이 부족했고, 설령 구술 채록이 일부 이뤄졌다 해도 그것을 해석해 보다 큰 역사적 의의와 연결짓는 노력이 미진했다.
둘째, 해방 이후 서사에서 생활사의 주변화이다. 광복 직후 시기는 오랫동안 건국사 혹은 분단사의 관점에서 조망되어 왔다. 정치사적으로는 미군정, 좌우 대립, 정부 수립, 6·25 전쟁 등의 격동이 연속된 탓에, 학계 서술의 초점도 권력 변화와 이념 투쟁에 맞춰졌다. 이러한 거시사 중심 접근에서 벗어나 민중의 일상생활 변화에 초점을 맞춘 연구 경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해방 공간기의 사회사 연구가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주로 도시 노동자·청년 문화·언론 등을 다뤘고, 농촌 주민들의 생활 변화나 문화적 태도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그 결과 해방 직후 민중이 식민지 잔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용했는지에 대한 학술적 질문 자체가 희소했다. 예를 들어, “일본식 이름을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했나”라는 질문은 당연히 논의되어야 할 듯하지만, 기존 담론에서는 “당연히 다들 본명으로 돌아갔겠지”라는 추측 수준에서 넘어갔다. 공적 담론에서는 해방과 함께 모든 식민 잔재가 청산되는 것으로 서술되고, 역사교과서나 통사 서술에서도 “조선인들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기꺼이 폐기하고 이름을 되찾았다”는 식의 도식적 서술이 많았다. 이러한 서술 경향 속에서는, 번동 마을 같은 이질적 사례가 설 자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예외적 일탈이나 변칙 사례로 치부되어, 학문적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민감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광복 이후에도 일본식 이름을 썼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해당 지역이나 인물을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사례로 낙인찍을 소지가 있다. 지역사회나 후손들이 그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밝히길 꺼렸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공식 기록의 부재와도 연결되는데, 당사자들이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거나, 설령 회고록 등을 써도 이런 부분은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수 있다. 결국 기억의 단절이 발생하여, 한 세대가 지나면 이러한 일들은 “말 못할 과거” 혹은 잊힌 일화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연구자에게는 더욱 장애물이 된다. 기억의 공백으로 인해 접근이 어려워지고, 동시에 문제의식 자체가 흐려지는 것이다.
정리하면, 번동 마을 사례가 학문적으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1) 생활사의 미시적 주제에 대한 관심 부족, (2) 구술사 등의 대안적 사료 발굴 노력이 미흡, (3) 해방 후 역사 서술의 거시담론 편중, (4) 민감성으로 인한 기억의 자기검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한국 현대사 연구의 맹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맹점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최근 들어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일례로, 일부 역사가는 “역사 앞에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억압된 기억을 복원하려는 구술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생활사 박물관이나 지역사 프로젝트를 통해 해방 전후 일반 대중의 경험을 수집·전시하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비록 미약하지만, 번동 마을과 같은 사례를 역사 서술로 끌어올릴 수 있는 토양이 될 것이다.
결론: 기층 대중 생활사의 복원 필요성과 향후 과제
해방 후 함평 엄다리 번동 마을에서 일본식 창씨개명 이름 “아라이상”이 생활 호칭으로 지속된 사례는, 해방 공간기의 역사상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가 차원에서는 일제가 남긴 법과 제도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갔지만, 풀뿌리 일상에서는 식민지의 그늘이 한동안 남아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미시적 사례 분석을 통해,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 서술이 놓친 영역—기층 대중의 생활사—을 환기하고자 했다.
서론에서 제기한 연구 질문에 답하자면, 창씨개명 이후에도 잔존한 생활세계의 식민 잔재는 분명 실재했다. 엄다리 번동의 구술 증언은 그 한 단면일 뿐이며, 아마도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유사 현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것이 기록되지 않고 기억 속에만 머물렀기에, 학계의 시선이 닿지 못했다. 이는 곧 식민지배의 영향이 단절적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연속성과 단절성이 교차하며 서서히 퇴장했음을 의미한다. 역사학은 이러한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낼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우리는 해방을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파악하고, 그 이후의 디테일한 생활 변동을 깊이 탐구하지 않았다. 본 논문은 그 점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역사 서술의 밑바닥까지 시선을 확장해야 함을 주장한다.
본 연구의 학문적 기여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존의 엘리트·공식 담론 중심의 역사상을 보완하는 미시사 연구의 사례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아라이상 호칭 사례를 발굴·분석함으로써, 해방 후 민중생활사의 한 측면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이를 통해 해방 공간기의 사회문화상이 일률적이지 않았고, 지역과 계층에 따라 상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구술 자료의 사료적 가치를 입증하고 생활사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 점이다. 공식 기록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 구술 증언에 담겨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향후 역사 연구에서 보다 체계적인 구술 채록과 분석 작업이 필요함을 환기했다.
향후 과제로는, 우선 유사 사례의 추가 발굴과 비교 연구를 들 수 있다. 다른 지역이나 집단에서도 창씨개명 이름이나 일제식 호칭이 지속된 예가 있는지 조사한다면 보다 일반화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타 지역 농촌, 도시 하층민, 혹은 광복 후 귀국한 재한 일본인과의 접촉 공간 등에서의 호칭 문제 등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양상이 도출될 수 있다. 또한 해방 후 생활문화 전반에 대한 연구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름뿐 아니라 언어습관, 의례, 복식, 주거 등 생활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식민지의 잔영과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면, 해방이라는 사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국사 차원을 넘어 세계사적 탈식민화 경험과의 비교로도 이어질 수 있다. 여러 식민지였던 사회들이 해방 후 일상에서 제국의 흔적을 지워나간 양상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닐 것이며, 한국의 경우는 그 특수한 사례로 학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역사학의 역할에 대한 성찰로 글을 맺고자 한다. 역사 연구는 단지 영웅이나 정치 엘리트의 행위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기억과 삶의 궤적을 기록함으로써 완전한 역사를 구성할 수 있다. 엄다리 번동 마을의 이야기는 비록 작은 시골 마을의 한때 있었던 일이지만, 그 속에는 해방의 빛과 그림자가 모두 어리고, 민족사의 거대한 전환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체화되었는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생활사의 복원은 우리의 역사서술을 보다 풍부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역사 앞에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권리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역사학계가 기층 대중의 생활사에 더욱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해방의 총체적 풍경이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
구술 자료 출처
본 연구에서 활용한 구술 증언은 2025년 8월, 함평군 엄다면 번동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박XX(여, 91세), 안OO(남, 69세)와의 심층 면담을 통해 확보한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성명복구령 원문: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8.15해방후 한국사람이 소유권을 취득한 부동산의 전소유자의 명의가 일본식 씨명이라 하여 이를 곧 일본인으로 추정할 것이 없고, 오히려 반대의 추정을 하는 것이 옳다’는 판시. 대법원 71다226: 국가법령정보센터 판례
- 보은 신개울 집단거부: 경향신문·SBS·MBC 보도
이 논문은 ChatGPT, Gemini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OD
2025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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