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민주정의 펠라스기 기원 - 망각된 선주민 질서와 문명 기억의 역설 -
아테네 민주정의 펠라스기 기원: 망각된 선주민 질서와 문명 기억의 역설
초록
본 논문은 아테네 민주정의 기원을 전통적인 헬레네스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그 역사적 기저에 존재했던 선주민 ‘펠라스기인’의 잊혀진 유산과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재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고는 아테네 민주정이 순수한 헬레네스적 창조물이 아니라, 선주민 사회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의례적 합의 전통과 공명하는 동시에 이를 억압하고 재구성하는 치열한 ‘기억의 정치’를 통해 탄생한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산물임을 주장한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본 연구는 고고학, 유전학, 고전 문헌, 그리고 얀·알레이다 아스만의 문화기억 이론을 통합하는 학제간 연구 방법을 채택한다.
연구 결과, 에게해 선주민 사회의 의례 중심적·합의적 질서는 북방에서 유입된 얌나야계의 부권적·위계적 족장제와 충돌하고 융합하며 혼종적인 미케네 문명을 형성했음이 드러났다. 특히 미케네 붕괴 이후에도 독자적 연속성을 유지한 아테네는, 수호여신 아테나의 신격을 모권적 풍요의 여신에서 부권적 처녀신으로 변모시키고, 추첨제·도편추방제 등 민주정의 핵심 제도를 선주민의 제의적 논리와 구조적 유사성을 보이는 방식으로 세속화했다.
이 과정은 기억의 정치와 긴밀히 연결된다. 아테네는 ‘토착성(autochthony)’ 신화를 통해 펠라스기적 기원을 긍지의 원천으로 삼으면서도, 그 안에 내재된 모권적·여성적 요소는 ‘야만’으로 규정하여 체계적으로 배제했다. 이러한 기억의 봉합은 비극 무대와 철학 담론을 통해 완성되었으며, 스파르타 등 외부와의 ‘경쟁적 기억’ 속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결론적으로, 아테네 민주정은 잊힌 유산 위에 세워진 역설적 구조물로서, 그 정체성은 기억과 망각의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는 서구 문명의 기원을 단일하고 순수한 기원에서 찾으려는 시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며, 모든 정치 공동체의 자기 서사가 필연적으로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포함함을 시사한다.
주제어: 아테네 민주정, 펠라스기인, 문화기억, 기억의 정치, 헬레네스 중심주의, 토착성(autochthony), 얌나야 문화, 그리스 비극, 젠더, 퍼포먼스 연구
제1장. 서론: 헬레네스 중심주의를 넘어서
1.1. 연구의 배경과 문제 제기
고대 아테네 민주정은 서구 문명의 초석이자 순수한 헬레네스 정신의 독자적 산물로 칭송받아 왔다. 통설에 따르면, 기원전 507년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데모크라티아(dēmokratía), 즉 인민의 지배를 창안하여 세계 최초의 민주정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관점은 아테네 민주정을 솔론에서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일련의 개혁을 통해 완성된 그리스 고유의 정치 혁신으로 규정하며, 고대 그리스가 인류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평가한다 (Hansen, M. H., 1999, The Athenian Democracy in the Age of Demosthenes). 그러나 이와 같은 헬레네스 중심의 서사(Hellenocentric narrative)는 아테네 민주정의 기원을 오로지 그리스인 내부의 발전으로 한정함으로써, 그 역사적 토양이 되었을 수 있는 선주민(先住民) 펠라스기인(Pelasgians)의 정치 문화와 사회 질서를 의도적으로 간과하거나 망각해왔다.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인들 스스로 아테네의 기원이 순수한 헬레네스 혈통만은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기록을 남겼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아테네인이 본래 “펠라스기족이라는 종족이었으며, 결코 자신들의 고토를 떠난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Herodotus, Histories, 1.56). 이는 아테네인의 원주민적 뿌리가 훗날 헬레네스 문화에 동화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펠라스기 기원설’은 아테네의 공식적인 역사 서술 속에서 점차 잊히거나, 심지어 ‘야만적 과거’로 폄하되었다 (Hall, J. M., 2002, Hellenicity: Between Ethnicity and Culture). 본 연구는 바로 이 기억과 망각의 정치가 작동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본고는 아테네 민주정의 뿌리를 선주민 펠라스기인의 정치 질서와 문화기억 속에서 재조명함으로써, 헬레네스 중심의 통설에 도전하고, 아테네 민주정이라는 복합적 현상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1.2. 개념의 정의와 연구의 범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본고에서 사용될 핵심 용어의 정의와 범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 펠라스기인(Pelasgians): ‘펠라스기인’은 고대 문헌에서도 통일된 실체보다는, 헬레네스 이전 에게해 지역에 거주했던 다양한 비(非)그리스어 사용 선주민 집단을 포괄하는 모호한 명칭으로 사용된다. 본고는 ‘펠라스기인’을 단일 민족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대신, 고고학적·언어학적으로 인도-유럽어족 이전 시대로 추정되는 문화권, 특히 아티카와 에게해 지역의 선주민 문화를 지칭하는 발견적(heuristic)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 개념의 사용은 이들을 동질적인 ‘문화 블록’으로 고정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헬레네스적 시선에 의해 타자화된 선주민 집단들의 다양한 문화적 경향을 탐색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 펠라스기 전통: 따라서 ‘펠라스기 전통’이란, 이들 선주민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통된 문화적 경향, 즉 여신 중심의 제의, 모계적(matrilineal) 친족 체계의 가능성, 그리고 농경 공동체의 의례적 합의 질서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모권(matriarchy)이라는 권력 체계보다는 모계(matrilineal)라는 친족·상속 규칙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용어를 엄격히 구분하고자 한다. 또한 이는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의 ‘구(舊)유럽’ 가설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그의 문제의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되 여신상의 빈도가 곧 사회 구조를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후대의 반론(e.g., Anthony, D. W., 2007)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다.
- 문화기억(Cultural Memory): 얀·알레이다 아스만(Assmann, J. & Assmann, A.)의 이론을 원용하되, 본고에서는 특히 집단 정체성 형성을 위해 과거가 어떻게 선택, 배제, 형식화, 전환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세대 간 구술로 전승되는 단기적 소통기억(communicative memory)과, 신화·의례·문헌 등 제도화된 매체를 통해 전승되는 장기적 문화기억(cultural memory)의 구분을 인지하고, 펠라스기 전통이 어떻게 소통기억의 영역에서 문화기억의 영역으로 전환되거나 혹은 그 과정에서 탈락했는지를 분석의 틀로 삼는다 (Assmann, J., 2011, Cultural Memory and Early Civilization).
1.3. 연구 방법과 구성
본 연구는 상기한 개념적 틀 위에서 문헌해석과 과학적 데이터를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학제간 방법으로 진행된다.
- 고고학·유전학 자료의 비판적 검토: 특정 고고학적 층위와 유전학적 데이터(e.g., Lazaridis, I. et al., 2017; Skourtanioti, E. et al., 2023)를 인용하되, 그 한계를 명확히 인지한다. 특히 고대 DNA(aDNA) 분석의 경우, 표본 수의 제한, 발굴 맥락의 불확실성, 통계적 해석의 여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유전자 비율이 곧 문화·사회 제도를 결정한다는 환원론적 해석을 경계한다(cf. Shennan, S., 2018). 또한, 펠라스기인을 특정 고고학적 양식(예: 뱀, 곰 도상)과 직접 연결하기보다, 다변량 통계 분석을 통해 토기, 장법, 식생활 등 다양한 지표를 종합하여 “펠라스기”로 불렸을 수 있는 복수의 지역적 전통 그룹을 재구성하는 접근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 고전 문헌의 맥락적 독해: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비극 작가들의 텍스트를 당대의 정치적·제의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여, 이들의 서술이 객관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특정 목적을 지닌 ‘기억의 실천’이었음을 밝힌다.
- 기존 연구 모델과의 비판적 대화: 본 연구는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을 설명하는 기존의 사회·경제·군사적 모델들—예를 들어 중장보병(호플리테스) 개혁의 정치적 효과(Cartledge, P., 2002), 해상무역 발달과 무산시민(테테스) 계급의 부상(Starr, C. G., 1986), 솔론 이후의 계급투쟁(Finley, M. I., 1983) 등—을 부정하거나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고의 문화기억적 접근은, 그러한 구조적 변화들이 어떤 문화적 토양 위에서 당대인들에게 의미를 부여받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는지를 밝힘으로써 기존 연구를 보완하고 심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퍼포먼스 연구(Performance Studies) 관점 도입: 특히 비극을 통한 기억의 봉합을 분석할 때, 텍스트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연의 청중, 장소, 축제 맥락 등 ‘기억의 장치’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수행적(performative) 조건을 함께 고려하여 논증의 실증성을 강화한다 (cf. Goldhill, S., 1990).
이상의 접근을 종합하여, 본고는 총 4부로 구성된다. 제1부(1-3장)에서는 연구의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펠라스기 전통과 얌나야 문화의 성격을 재구성하며 두 세계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분석한다. 제2부(4-6장)에서는 미케네 붕괴 이후 과도기를 거쳐 아테네의 혼종적 정체성과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제3부(7-9장)에서는 ‘기억의 정치’라는 통합적 관점에서 아테네의 이중적 태도, 비극을 통한 기억의 봉합, 철학자들의 기원 재구성을 심층 분석한다. 마지막 제4부(10-11장)에서는 외부 세계와의 경쟁 기억을 살펴보고, 연구 전체의 결론과 학술적 함의를 제시한다.
제1부: 기원과 충돌: 잊혀진 세계와 새로운 질서의 서막
제2장. 의례와 합의: 펠라스기 정치·문화 질서의 재구성
아테네 민주정의 선주민적 기원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레네스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펠라스기인의 사회·정치적 질서가 어떠한 특징을 가졌는지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비록 직접적인 문헌 기록의 부재로 완전한 복원은 어렵지만, 고고학적 증거와 후대에 남겨진 신화 및 전승의 편린들을 통해 그 원형적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펠라스기계 지역 집단들(Pelasgian-like local groups)”이 세속적 권력보다 의례(ritual)를 통한 공동체적 합의(consensus)를 핵심 원리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의 종교적·사회적 역할이 중요하게 기능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2.1. 펠라스기 전승과 여성의 의례적·정치적 역할
고대 그리스 전승 속 펠라스기 사회는 명시적인 모권제(matriarchy)로 단정할 순 없으나, 여성의 종교적·사회적 역할이 공동체 운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하는 단서들을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전역에서 거행된 테스모포리아(Thesmophoria) 축제는 기혼 여성들만이 참여하여 도시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국가적 제의였다. 남성 시민이 배제된 채 여성들이 주관하는 이 의례는, 평소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공동체의 안녕과 직결된 의례적 결정을 내리는 준(準)정치적 공간으로 기능했을 수 있다 (Zeitlin, F. I., 1982, “Cultic Models of the Female: Rites of Dionysus and Demeter”, Arethusa 15.1/2).
또한, 호메로스가 “펠라스기인의 신”으로 언급한 제우스의 도도나(Dodona) 신탁은 본래 여성 예언자들이 신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가장 오래된 신탁소였다 (Homer, Iliad, 16.233-235). 헤로도토스는 이 여사제들의 기원을 이집트와 연결 짓기도 했는데 (Herodotus, Histories, 2.54-57), 이는 펠라스기 종교 전통에서 여성의 영적 권위가 공동체의 중대사 결정에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Parke, H. W., 1967, The Oracles of Zeus: Dodona, Olympia, Ammon). 이처럼 농경 기반 사회의 풍요 제의와 신탁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의 주도적 역할은, 펠라스기 사회가 의례를 통한 합의 형성 과정에 여성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전통이 후대 폴리스의 집단적 의사결정 문화의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2.2. 의례 중심 통치와 공동체적 합의
펠라스기인의 사회에서는 정치와 제의가 분리되지 않은 통합적 통치 구조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동체의 질서는 세속적 권력보다 제의 주관층_에 의해 유지되었고, 통치 행위 자체가 의례의 형태로 나타났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중 120여 일이 각종 종교 축제에 할애될 정도로 축제가 사회·정치 질서의 핵심 부분이었다 (Parker, R., 2005, *Polytheism and Society at Athens*). 이러한 상황에서는 통치자도 중요 결정을 내릴 때 신탁을 묻는 등, _종교 의례가 사실상의 정책 결정 과정_으로 기능하였다. 예를 들어 아테네 전승에 따르면, 역병이 돌자 _델피 신탁의 명령에 따라 브라우론의 아르테미스 제의가 국가 의례로 정착하였다. 수다(Suda) 사전은 “아테네의 처녀는 브라우론에서 곰놀이(ἀρκτεία)를 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다”고 기록하여, 국가가 법적 강제력으로 종교 의식을 규정했음을 보여준다 (Suda, s.v. Ἄρκτος ἢ Βραυρωνίοις; cf. Sourvinou-Inwood, C., 1988, Studies in Girls’ Transitions). 이러한 제의 중심 사회 구조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제의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에 참여하는 효과를 낳았으며, 이 전통은 고전기 아테네 민주 정치 속에서도 의례적 합의의 중요성으로 계승되었을 수 있다.
2.3. 고고학과 문헌으로 보는 문화적 흔적
엘레우시스 비의: 선주민 의례 전통의 지속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 비의(Eleusinian Mysteries)는 그 기원이 그리스 도래 이전의 토착 신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 발굴 결과, 의례 공간인 텔레스테리온 아래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세기경)의 제의 흔적이 있는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Mylonas, G. E., 1961, Eleusis and the Eleusinian Mysteries). 이는 선주민 펠라스기인의 성지(聖地) 전통이 암흑시대를 넘어 재활성화된 사례로, 이 과거 제의의 기억이 있었기에 기원전 8세기경 데메테르 숭배가 부활할 수 있었다 (Cosmopoulos, M. B., 2014, “Cult and Politics at Eleusi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Aegean Bronze Age). 주목할 점은 엘레우시스 비의가 남녀, 자유민과 노예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개방되었다는 점이다 (Clinton, K., 1992, Myth and Cult: The Iconography of the Eleusinian Mysteries). 이러한 포용적 성격은 펠라스기인의 모신(母神) 숭배 전통이 고전시대까지 이어진 사례이며, 참여자들이 공동의 신성한 경험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일종의 의례적 민주주의를 실현했음을 보여준다.
브라우론의 아르테미스 제의: 통과의례와 사회 통합
아티카 동부의 브라우론(Brauron)에서 거행된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와 소녀들의 통과의례는 선주민 문화의 또 다른 흔적이다. 브라우론 유적은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지였으며, 미케네 시대를 거쳐 기원전 8세기경 성역으로 재건되었다 (Papadimitriou, J., 1963, “The Sanctuary of Artemis at Brauron”, Scientific American 208/6). 제의의 핵심은 5~10세 소녀들이 아테네 전체를 대표하여 곰으로 분장하고 춤을 추는 아르크테이아(곰놀이)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에서도 이 의례가 아테네 소녀들의 필수 성장 과정으로 언급될 만큼 (Aristophanes, Lysistrata, 641-647), 이는 단순한 지방 축제가 아니라 폴리스 전체의 종교적 의무로 간주되었다. 처녀들이 결혼 전에 반드시 이 의식을 치르게 한 것은 제의가 곧 사회적 규범이 된 사례이며, 펠라스기인 전통의 의례-사회 통합 기능이 고대 아테네에까지 이어진 예로 평가된다.
이오니아 지역의 비교 고찰: 아나톨리아 여신 숭배와 펠라스기인 전통
펠라스기인의 영향은 에게 해와 이오니아 지역의 종교 전통에서도 발견된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숭배는 그리스인 이주 전부터 존재하던 아나톨리아의 모신(母神) 신앙이 그리스의 아르테미스와 동일시된 사례이다 (Rogers, G. M., 1991, The Sacred Identity of Ephesos: Foundation Myths of a Roman City). 다수의 돌기를 가진 독특한 형상의 이 여신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에게해 북부 사모트라케 섬의 카베이로이 신앙을 펠라스기인이 전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Herodotus, Histories, 2.51). 이러한 비교 고찰은 펠라스기인의 여신 숭배와 비의 전통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그리스인들이 이를 흡수하여 자신들의 폴리스 종교에 통합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의 민(民) 문화 형성에 선주민의 포용적 종교 관습이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2.4. 소결: 민주정의 문화적 토양으로서의 펠라스기 유산
종합하면, 선주민 펠라스기인의 정치·문화 질서는 명시적인 법률보다는 의례를 통한 공동체 결속과 합의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현대적 의미의 평등 사회는 아니었을지라도, 이들의 사회는 여신을 매개로 한 축제와 의식을 통해 다양한 구성원이 공동의 신성한 경험을 나누고, 이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포용적 합의 구조를 발전시켰을 수 있다. 통치 행위는 곧 종교 행위와 다르지 않았고, 공동체 구성원은 제의에 참여함으로써 집합적 의사결정 과정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이러한 제의 중심의 전통은 훗날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꽃피는 문화적 토양(cultural soil)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이 폴리스 구성원 전체의 합의와 참여에 있다면, 펠라스기인의 의례 전통은 모든 구성원이 공동의 행위에 참여하며 연대감을 다져온 원형적 경험을 제공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완전한 무(無)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선주민 펠라스기인들의 문화로부터 특정 요소가 선택적으로 계승되고 세속화된 정치 전통으로 이해할 때 그 기원을 더욱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제3장. 두 세계의 상호작용: 펠라스기 의례사회와 얌나야 족장제
제2장에서 재구성한 펠라스기 사회가 에게해 지역의 오랜 토착 질서를 대변한다면, 기원전 3천년기 후반부터 시작된 새로운 인구의 유입은 이 지역의 역사에 근본적인 단층을 만들어냈다. 본 장에서는 고고학과 유전학의 최신 성과를 바탕으로 이들 이주민, 즉 얌나야(Yamnaya) 문화 집단의 성격을 규명하고, 이들이 선주민인 펠라스기인의 의례 중심 사회와 어떻게 충돌하고 융합하여 후대 그리스 문명의 원형인 미케네(Mycenaean) 문명을 탄생시켰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3.1. 북방 초원으로부터의 이동: 얌나야계 집단의 유입과 그 성격
기원전 3천년기 후반, 흑해-카스피해 북방 초원지대의 얌나야 문화 집단은 목축과 기마술, 그리고 청동기 기술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했다 (Anthony, D. W., 2007, The Horse, the Wheel, and Language). 이들은 부권적(patrilineal) 혈통과 위계적 질서를 특징으로 하는 전사적 족장제(warrior chiefdom)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의 이동은 단순한 문화 전파가 아니라, 지역의 유전적 지형을 바꿀 정도의 대규모 인구 이동을 동반했다.
분자유전학의 발전은 이들의 이동 경로를 명확히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 미케네인의 DNA 분석 결과, 선행하는 크레타의 미노스인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얌나야계 북방 유전자가 혼합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초기 연구(Lazaridis, I. et al., 2017)에서는 그 비율을 4~16%로 추정했으나, 최근 표본 수가 증대된 연구들(Skourtanioti, E. et al., 2023; Lazaridis, I. et al., 2024 예정)에서는 이 혼합률이 다소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제기되며, 이는 점진적이고 복합적인 혼혈 과정을 시사한다.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 2200년경 그리스 본토의 여러 취락에서 파괴와 변동의 층이 확인되며 (Caskey, J. L., 1960), 이후 중기 헬라딕 시기(기원전 2000-1550년경)에는 새로운 매장 풍습과 북방 계통의 무기류, 봉토분(kurgan)과 유사한 무덤 양식이 등장한다. 이는 단일한 정복 전쟁보다는 점진적인 침투와 문화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지배 집단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Rutter, J. B., 1973).
3.2. 의례 대(對) 무력: 두 문화의 통치 구조와 세계관의 이질성
그리스 본토에서 마주한 두 문화는 거의 모든 면에서 이질적이었다. 앞서 재구성한 펠라스기 사회가 여신 숭배, 농경 제의, 공동체적 합의를 중심으로 한 의례 중심 사회의 경향을 보였다면, 새롭게 유입된 얌나야계 사회는 남성신(하늘, 폭풍의 신), 군사적 위계, 그리고 부권적 혈통을 중심으로 한 전사 귀족 사회의 특징을 가졌다.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가 ‘구유럽(Old Europe)’으로 명명한 선주민 문화와 인도-유럽계 문화의 이러한 대비는, 두 문화의 만남이 필연적으로 세계관의 충돌로 이어졌음을 시사한다 (Gimbutas, M., 1991, The Civilization of the Goddess).
그러나 이러한 대비는 분석의 편의를 위한 발견적 모델일 뿐, 두 문화를 고정되고 동질적인 실체로 보는 이분법적 구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얌나야 문화의 무덤에서 청동 단검 등 무기류가 발견되는 것은 전사 문화를 시사하지만(Reich, D., 2018, Who We Are and How We Got Here), 이것이 에게해 선주민 사회가 완전히 평화로웠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 역사적 과정은 단순한 충돌을 넘어 상호 침투와 변용이 일어나는 복잡한 스펙트럼이었을 것이다.
3.3. 충돌, 융합, 그리고 혼종성의 탄생: 미케네 문명
두 문화의 만남은 일방적인 대체가 아닌, 지배, 흡수, 그리고 상호 변용이라는 복합적인 혼종화(hybridization)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군사적으로 우월했던 얌나야계 족장들은 기존 펠라스기 공동체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들 역시 선주민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유전학적으로도 외부에서 온 남성 계통(Y-DNA)의 유전자가 유입되는 동안, 토착 여성 계통(mtDNA)은 높은 연속성을 보이는 패턴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주민 남성들이 토착 여성과 통혼하며 새로운 지배 계층을 형성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융합의 결과물인 미케네 문명은 단순한 두 문화의 합이 아니라, 이질적 요소들이 긴장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불안정한 경합의 장(contested field)이었다. 미케네의 왕(워낙스, wanax)은 인도-유럽계 전사 족장의 후예였지만, 그의 통치는 기존 펠라스기인의 종교적 전통을 흡수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미케네의 선문자 B 점토판에는 올림포스 남성신들과 더불어 “여주인”을 뜻하는 포트니아(Potnia)라는 강력한 여신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Chadwick, J., 1976, The Mycenaean World). 특히 “아테나 포트니아(Atana Potnia)”라는 명칭은 후대 아테네의 수호신이 선주민 여신 신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 재편 과정은 그리스 신화 속에 상징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 즉 올림포스 신들과 티탄 신족의 전쟁 이야기는 옛 질서(펠라스기적 신격)가 새로운 질서(인도-유럽계 신격) 아래 편입되는 과정을 신화적으로 압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펠라스기 사회 위에 얌나야계 족장제가 군림하며 새로운 혼합 문명을 탄생시키는 역사적 과정을 반영하는 서사일 수 있다.
3.4. 소결: 새로운 질서의 서막, 혼종적 유산
결론적으로, 펠라스기인과 얌나야계 집단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문화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과정은 단순한 파괴나 단절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문화 요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혼종(hybrid) 문명을 창발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미케네 문명은 얌나야계의 위계적·군사적 전통과 펠라스기인의 의례 중심적·공동체적 전통이라는 이중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 두 유산 사이의 긴장과 상호작용은 미케네 붕괴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리스 사회, 특히 아테네의 정치적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2부: 혼종성의 탄생: 아테네 정체성과 제도의 형성
제4장. 과도기의 아테네: 미케네 붕괴와 정체성 재편
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 궁정 문명은 급작스러운 붕괴를 맞이했다. 지중해 동부 전역을 휩쓴 이 격변 속에서 대부분의 미케네 중심지들은 파괴되거나 버려졌지만, 아테네와 그 주변 아티카 지역은 예외적인 연속성을 보이며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걷게 된다. 이 과도기는 아테네가 자신의 정체성을 재편하고, 펠라스기적 유산과 헬레네스적 요소를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4.1. 파괴를 비껴간 도시: 아테네의 고고학적 연속성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미케네, 필로스, 테베 등 주요 미케네 궁전들이 화재로 파괴될 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심각한 파괴를 면하고 지속적으로 거주되었다 (Mountjoy, P. A., 1995, Mycenaean Athens). 아테네 유적에서는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 시대 초기로 이어지는 토기 양식의 단절 없는 변화가 관찰되며, 특히 이 시기에 아테네 도공들이 창안한 프로토-기하학 양식과 초기 기하학 양식은 이후 그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갈 만큼, 소위 ‘암흑시대’ 동안 아테네는 문화 혁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Snodgrass, A. M., 1971, The Dark Age of Greece).
이러한 문화적 번영은 인구 기반의 지속성 덕분이었다.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티카의 토양이 척박하여 외부 세력이 탐내지 않았기에, 먼 과거부터 주민 교체 없이 동일한 민족이 계속 거주해왔다고 설명한다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2). 그는 미케네 붕괴 후 다른 지역에서 쫓겨난 피난민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한 인구 팽창이 이오니아 식민 활동으로 이어졌다고 기록했다. 최근의 유전학 연구 역시 미케네 붕괴 이후 그리스 본토 인구 구성에 급격한 변화가 없었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고대의 전승을 뒷받침한다 (Clemente, F. et al., 2021, “The genomic history of the Aegean palatial civilizations”, Cell 184.11). 즉,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연속성이 유지됨으로써 아테네의 선주민적 혈통과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4.2. 반인반사(半人半蛇)의 왕: 케크롭스와 혼종적 정체성의 신화
이러한 인구·문화의 연속성은 신화와 집단기억의 층위에서도 드러난다. 아테네의 시조 왕으로 숭배된 케크롭스(Cecrops)와 에리크토니오스(Erichthonius) 신화는 이 시기 아테네의 혼종적(hybrid)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케크롭스는 “땅에서 태어난(autochthon)” 존재이면서,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뱀의 모습을 한 두 가지 본성(διφυής)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Apollodorus, Bibliotheca, 3.14.1). 이러한 형상은 그가 토착 선주민(땅의 상징인 뱀)과 새로운 외래 세력(인간)을 중재하고 통합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이중 형상이 그가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의 이중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Eusebius, Chronicon).
에리크토니오스 역시 대지모신 가이아와 관련되어 태어나 뱀과 얽힌 모습으로 등장하며, 아테나 여신의 양육을 받아 왕위에 오른다. 이 신화들은 청동기 시대 말에서 암흑시대로 이어지는 동안 아테네 공동체가 이중의 정체성—토착 펠라스기인의 대지 신앙과 신생 헬레네스의 인간 중심 질서—을 융합시켰음을 시사한다. 즉, “반은 뱀, 반은 인간”인 왕의 이미지를 통해 정복과 토착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기억을 신화의 형태로 봉합한 것이다.
4.3. 성소(聖所)의 지속성: 기억의 장소와 의례의 재편
이러한 과도기적 구조는 물질문화와 종교 공간의 지속성으로도 검증된다. 미케네 세계의 붕괴 후 대부분의 궁전과 성채는 폐허가 되었지만, 아티카의 중요한 제의 장소들은 암흑시대를 거쳐 기원전 8세기경 새로운 의미로 부활했다. 대표적으로 엘레우시스에서는 미케네 시대에 이미 종교 의례가 거행되었던 메가론(Megaron B) 건물이 완전히 폐기되지 않고 남아, 훗날 데메테르 신앙이 도입될 때 바로 그 자리가 신전의 입지로 선택되었다 (Cosmopoulos, M. B., 2014, “Cult and Politics at Eleusis”). 이는 현지 주민들이 과거 성소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테네 동부의 브라우론 역시 미케네 시대의 취락이 있던 곳으로, 한동안 쇠퇴했다가 기원전 9세기경부터 다시 종교 활동의 흔적이 나타나며 8세기에는 명확한 성소로 재건된다 (Papadimitriou, J., 1963, “The Sanctuary of Artemis at Brauron”). 이처럼 엘레우시스와 브라우론의 사례는 아테네 지역에서 제의 전통이 단절 없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제의의 주체나 양식은 변모했을지라도, 신성한 공간에 대한 집단기억은 살아남아 이후 새로운 신앙과 정치 이념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4.4. 소결: 혼종적 정체성과 새로운 질서의 모색
결론적으로, 후기 청동기에서 기하학기에 이르는 과도기 동안 아테네는 물질적·인적 기반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미케네 세계의 몰락 속에서도 고유한 발전 경로를 걸었다. 아티카는 _정복되지 않은 땅_으로서 선주민 혈통을 이어갔고, 이는 신화와 의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역사서술 속에서 펠라스기적 기원의 기억으로 자리했다. 동시에 새로운 헬레네스 문화 요소를 수용함으로써 정치 구조와 정체성도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는 펠라스기적 모계 전통의 기억과 암흑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부권적 군주제 질서를 하나의 폴리스 문화 속에 녹여내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두 이질적 유산의 긴장과 융합은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의 기층 문화를 형성했으며, 그 가장 극적인 표출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의 신격이 어떻게 재창조되는지를 통해 나타난다. 다음 장에서는 아테나 여신상의 변용을 통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재편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할 것이다.
제5장. 여신 아테나의 신격 변화와 정치적 이데올로기화
고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의 신격(神格)은 선주민적 모계 문화의 생명·풍요의 여신에서 고전기 무장한 처녀신으로 극적인 변용을 겪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종교 신화의 변천이 아니라, 정복과 문화적 재편에 따른 정치적 이데올로기화의 산물이었다. 즉, 펠라스기인의 여신으로부터 지혜롭고도 전쟁적인 도시 수호신으로 거듭난 아테나의 모습은 아테네가 모계적 전통을 어떻게 흡수하면서도 부정하고 왜곡했는지를 보여준다.
5.1. 궁전의 여주인에서 무장한 처녀로: 아테나 신격의 재편
고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테나 여신은 원래 에게해 지역의 궁전 수호 여신에서 기원했다 (Nilsson, M. P., 1950, The Minoan-Mycenaean Religion and Its Survival in Greek Religion). 크레타-미케네 시대에 그녀는 가정과 도시의 평화를 지키는 여신이었으며, 가사와 공예, 풍요를 관장하고 상징으로 뱀과 올리브나무 같은 생명력의 표상을 거느렸다 (James, E. O., 1959, The Cult of the Mother-Goddess). 미케네의 선문자 B 문서에 등장하는 “아타나 포트니아(Atana Potnia)”라는 명칭은 그녀의 선(先)그리스계 기원을 뒷받침한다 (Burkert, W., 1985, Greek Religion).
하지만 미케네 시대와 암흑기를 거치며, 아테나는 점차 전투적 성격과 영구적 처녀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본래 평화로운 다산(多産)과 기술의 여신에서 호전적인 전쟁 여신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그녀는 이미 갑옷을 입고 창을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성(性)적 측면 또한 완전히 변화하여, 영원히 결혼하지 않는 처녀(παρθένος, parthenos)로 규정되었다. 이는 여신에게 잠재된 모성적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Pomeroy, S. B., 1975, Goddesses, Whores, Wives, and Slaves).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변화는 기원전 7-5세기에 걸쳐 여성의 재산권과 혼인 규범이 점차 남성 후견인에게 종속되는 현실의 법적·경제적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5.2. 아버지의 머리에서 태어난 딸: 모계 부정의 신화
아테나 신격 변화의 배후에 깔린 신화의 정치화는 그녀의 출생 신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시오도스의 전승에 따르면, 제우스가 지혜의 여신 메티스(Metis)를 삼킨 후, 자신의 머리에서 완전 무장한 아테나를 직접 출산한다 (Hesiod, Theogony, 886-900). 이 파격적인 탄생담은 모계(母系)의 완전한 부정을 상징한다. 전통적인 모태(母胎)로부터의 탄생을 지워버림으로써, 아테나는 오직 부계(父系)로부터만 비롯된 존재가 된다. 지혜의 원천인 어머니 메티스를 아버지가 흡수하고 그 결과로 딸이 태어났다는 서사는, 지혜조차 아버지의 소유로 만드는 상징적 장치였다.
이처럼 아테나의 신화는 부계 질서의 승리를 천명하며, 새로운 폴리스 공동체의 이념을 신성불가침한 형태로 설파한다. 아테네인들이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동쪽 박공에 제우스로부터 탄생하는 아테나의 모습을 조각한 것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시각적으로 선포한 사례이다. 처녀로 태어나 아버지의 의지만을 대변하는 여신의 형상은, 아테네 민주정이 어머니 없는 아버지(부권적 정통성) 위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5.3. 에리니에스의 굴복: 아이스킬로스 비극에 나타난 질서의 재편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의 마지막 편인 『에우메니데스』는 이러한 신격 변화의 이념적 완성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이 작품에서 아테나는 어머니를 살해한 오레스테스의 재판을 주재하며, 옛 질서(모계 혈연 복수)를 대표하는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Erinyes)와 대결한다. 재판에서 아폴론 신은 “어머니는 자식의 진정한 부모가 아니며, 아버지만이 진정한 부모”라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어머니 없이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테나를 내세운다 (Aeschylus, Eumenides, 658-666).
결국 아테나는 자신의 결정표를 던져 오레스테스를 무죄로 풀어주며, “나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편”이라고 선언한다. 이로써 그녀는 부계 혈통의 우월성을 아테네 국가의 정의로 확립한다. 더 나아가 아테나는 패배한 에리니에스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들을 아테네 시의 수호신인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로 포섭한다. 이는 겉보기에는 옛 신과 새 신의 화해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펠라스기적 모계 질서가 부권적 폴리스 질서 아래로 굴복하고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 (Zeitlin, F. I., 1978, “The Dynamics of Misogyny: Myth and Mythmaking in the Oresteia”, Arethusa 11.1/2). 아테나는 이러한 조정을 통해 아테네의 뿌리 깊은 과거(땅의 힘)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질서 속에 종속시킴으로써, 사회 통합의 신화를 완성한다.
5.4. 소결: 이데올로기로서의 여신과 제도의 형성
요컨대 아테나 여신의 신격 변화사는 고대 아테네 사회가 어떻게 선주민의 기억을 정복자의 이념 속에 봉합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서사다. 아테나는 한편으로 지혜와 전쟁의 올림포스 신으로 떠올랐지만, 동시에 방패 옆의 뱀과 올리브나무, 그리고 땅에서 나온 영웅 이야기로 대표되는 펠라스기적 유산을 은밀히 간직했다. 이러한 이중성 덕분에 아테네 민주정은 자기 기원의 모호함을 신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즉, 모계를 부정하는 처녀 여신이 도시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는 역설을 통해, 아테네인은 자신들을 _이 땅에서 태어난 자들_로 자부하면서도 그 문화적 기원을 부권 중심으로 재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테나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재편은 단순히 신화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아테네 민주정의 구체적인 제도 설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민회, 추첨제, 도편추방제와 같은 아테네의 핵심 제도들이 어떻게 펠라스기적 전통의 흔적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전통의 핵심인 모계적 요소를 배제하고 왜곡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제6장.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와 펠라스기적 흔적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들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정치적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들이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것이라기보다는, 아티카 지역의 오랜 선주민적 전통을 변형하고 재구성했을 가능성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본 장에서는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 제도들이 펠라스기적 합의 전통 및 제의(祭儀)와 보이는 구조적 유사성을 분석한다. 동시에, 이러한 해석이 직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제의적 어휘(ritual vocabulary)가 정치적 기능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6.1. 민회와 평의회: 집단적 합의 전통의 제도화 가능성
아테네 민주정의 심장부인 민회(Ecclesia)와 500인 평의회(Boulē)는 모든 시민의 참여와 집단적 합의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Hansen, M. H., 1999). 이러한 구조는 일견 혁신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아테네가 위치한 아티카 지역의 오랜 공동체 전통 위에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아티카는 미케네 붕괴 이후에도 인구적·문화적 연속성을 유지한 드문 지역으로, 이는 선주민(펠라스기인)의 공동체적 합의 전통이 지속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혈연 기반의 부족 체제를 해체하고 거주지 기반의 데모스(demos) 체계를 도입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씨족 연합을 넘어 새로운 시민 공동체를 창출했다 (Ober, J., 2008, Democracy and Knowledge). 그 결과 아테네의 민회와 평의회는 혈통이 아닌 토착 지역 공동체의 대표성 위에 서게 되었고, 이는 펠라스기 선주민들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토지 공동체적 유대를 정치 구조로 흡수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 기구들은 한 개인이 아닌 집단에 주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펠라스기적 합의 전통이 세속화되고 제도화된 형태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6.2. 추첨제와 도편추방제: 제의적 논리의 정치적 전이 가능성
추첨제(sortition)와 도편추방제(ostracism)는 아테네 민주정이 선주민의 제의적 관습을 세속 정치로 변용했을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공직자를 제비뽑기로 선출하는 추첨제는 부와 가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민주적 장치였다 (Manin, B., 1997). 주목할 점은 제비뽑기가 고대 사회 전반에서 신의 의지를 확인하는 신성한 수단(cleromancy)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추첨제 도입에는 아르케(archê, 고위직) 획득 비용을 낮추고 정보 불투명성을 해소하려는 합리적, 경제적 동기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행위였던 제비뽑기의 어휘와 형식이 정치적 공정성을 담보하는 원리로 재전유되었다는 해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편, 도편추방제는 공동체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을 투표로 추방하여 국가를 내부의 위험으로부터 정화하려는 제도였다. 이 제도의 논리는 고대 종교의 희생양(scapegoat) 제의, 즉 파르마코스(Pharmakos) 의식과 주목할 만한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Burkert, W., 1979). 물론 두 제도는 희생양의 사회적 지위(최하층 vs 최상층)와 강제력의 주체(제의 참가자 vs 국가)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의 순수성 회복을 위해 특정 개인을 배제한다”는 제의적 사고의 문법이 정치 제도의 영역으로 전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는 직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마셜 살린스(Marshall Sahlins)가 지적한 것처럼, 기존의 문화적 구조가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른 기능으로 재활용되는 “구조의 변형(transformation of the structure)” 사례로 볼 수 있다.
6.3. 여성의 배제: 펠라스기 유산의 단절과 왜곡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들은 펠라스기적 전통과 공명하는 듯 보이면서도, 그 문화의 핵심이었을 수 있는 모계적 요소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왜곡했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여성의 정치 참여 완전 배제이다.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에서 여성은 시민의 아내이자 어머니일 수는 있었으나, 공적 발언권과 투표권을 갖는 정치적 주체(polites)로는 결코 인정되지 않았다 (Pomeroy, S. B., 1975).
흥미롭게도 이러한 배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가 전해진다. 아테나 여신과 포세이돈 신이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놓고 경쟁했을 때, 여성들의 투표로 아테나가 승리하자 분노한 포세이돈이 재앙을 내렸고, 이를 달래기 위해 남자들이 여성들의 투표권을 영구히 박탈했다는 것이다 (Augustine, City of God, 18.9). 이 신화는 “원래 있었던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남성이 탈취했다”는 서사 구조를 통해, 펠라스기 모권 전통에 뿌리를 둔 여성의 영향력이 폴리스 체제에서 의도적으로 억압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페리클레스가 “여성에게 최고의 명예란 남자들에게 아예 화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듯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45), 여성의 공적 무존재는 아테네 민주정의 미덕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제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다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파나테나이아 축제에 바쳐지는 페플로스 직조나 장례용 레키토스 도기 제작 등 제의적·경제적 영역에서 여성 장인들의 노동은 필수적이었다 (Blundell, S., 1995, Women in Ancient Greece). 이는 아테네 사회가 여성의 역할을 두고 ‘정치적 침묵’과 ‘경제적·제의적 가시성’이라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음을 보여주며, 젠더 분석이 단순한 배제의 서사를 넘어 복합적인 권력 관계를 탐구해야 함을 시사한다.
6.4. 소결: 기억과 망각 위에 세워진 제도
결론적으로,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들은 펠라스기적 전통과의 변형된 공명인 동시에, 그 전통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단절시킨 모순의 산물이었다. 집단적 합의와 제의적 정화라는 선주민적 유산은 민회, 추첨제 등의 제도로 재탄생했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과 모계적 가치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토착민(autochthones)이라는 펠라스기적 자부심을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그 토착의 유산, 특히 여성과 모계적 친족 체계의 존중을 의식적으로 부정함으로써 남성 시민들만의 민주정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기억의 선택과 망각은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서술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단서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또 무엇을 잊으려 했을까? 다음 장부터는 ‘기억의 정치’라는 통합적 관점에서, 아테네인들이 펠라스기 기원을 향해 보였던 이중적 태도와 그 문화적 표현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제3부: 기억의 정치: 아테네 민주정의 자기 서사 구축
아테네 민주정의 성립과 공고화는 단순히 제도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를 재해석하고, 특정 기억을 선택하며, 불편한 유산을 망각시키는 치열한 기억의 정치(politics of memory) 과정이었다. 본 3부에서는 아테네가 자신들의 선주민적, 펠라스기적 기원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문화기억 이론의 틀을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아테네인들이 보였던 이중적 태도(7장)에서부터, 비극이라는 공적 무대를 통해 기억을 봉합하려 했던 시도(8장), 그리고 최종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의 이름으로 기원을 재구성하며 이 기억 체계를 완성하는 과정(9장)을 추적할 것이다.
제7장.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 아테네의 펠라스기 기원을 향한 이중적 태도
고전기 아테네의 자기 정체성은 깊은 모순 위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자신들이 이 땅에서 태어난 토착민(autochthones)임을 내세우며 펠라스기적 기원을 긍지의 원천으로 삼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원에 내재된 ‘야만성’과 ‘비(非)헬레네스적’ 요소를 경멸하고 배제하려 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얀 아스만(Jan Assmann)이 말한 문화기억의 선택(selection)과 배제(exclusion)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이다.
7.1. 자부심의 원천: 토착성(Autochthony) 신화의 정치적 활용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세대를 거듭 끊임없이 이 땅에 거주했다”고 자부했다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36).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도 아테네는 “펠롭스, 카드모스 같은 외국 혈통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헬레네스”로 묘사된다 (Plato, Menexenus, 245d). 이 ‘토착성’ 신화는 모든 시민이 한 어머니(대지)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는 강력한 은유를 통해 민주적 평등과 공동체적 결속을 정당화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Loraux, N., 1986, The Invention of Athens: The Funeral Oration in the Classical City). 특히 도리아계 스파르타와 같은 경쟁 폴리스에 맞서 자신들의 정통성과 아티카 땅에 대한 영원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 효과적인 정치적 자산이었다.
7.2. 배제의 대상: 펠라스기 전통의 ‘야만화’와 여성성의 억압
그러나 토착성을 자랑하면서도, 아테네의 공식 기억은 그 뿌리가 되는 펠라스기 전통의 구체적인 내용, 특히 모계적·여성적 요소를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왜곡했다. 고대 문헌에서 펠라스기인은 종종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타자로 그려졌으며, 아테네는 자신들이 이 ‘야만성’을 극복하고 헬레네스 문명을 이룩했다고 주장했다 (Hall, J. M., 2002, Hellenicity: Between Ethnicity and Culture).
이러한 망각의 정치는 특히 여성의 역할을 지우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5세기 이전의 도기화에는 장례나 제의에서 여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모습이 빈번히 등장하지만, 고전기 아테네의 공적 서사에서는 이러한 여성의 기여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Oakley, J. H., 2004, Picturing Death in Classical Athens: The Evidence of the White Lekythoi). 펠라스기 전통의 망각은 곧 여성과 모계 신성의 은폐와 직결되었으며, 아테네의 기억 체계는 이러한 측면을 구조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폴리스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7.3. 소결: 기억의 정치와 문화적 실천
결론적으로, 아테네는 펠라스기 기원이라는 과거를 두고 긍정(자부심)과 부정(경멸)이라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이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기억 전략이었다. 그들은 토착성의 신화를 통해 시민적 연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비(非)부권적, 비(非)남성적 요소들을 ‘야만’으로 규정하여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질서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복잡한 기억의 협상은 정치 담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아테네 시민 생활의 중심이었던 비극이라는 공적 무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공연되고 해결되었다.
제8장. 무대 위의 봉합: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기억의 투쟁과 재편
고대 그리스 비극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화적 과거와 현재적 문제를 연결하여 집단 정체성을 성찰하고 재확인하는 기억의 실험실이었다. 그러나 텍스트 분석에만 머물러서는 그 기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퍼포먼스 연구(Performance studies)의 관점을 도입하여, 비극이 상연된 구체적인 시공간적 맥락 속에서 기억이 어떻게 봉합되었는지 분석해야 한다 (Goldhill, S., 1990, “The Great Dionysia and Civic Ideology”, in Nothing to Do with Dionysos?).
8.1. 기억의 수행적 장치: 디오니시아 축제
비극이 상연된 디오니시아 축제는 그 자체가 강력한 기억의 장치였다. 매년 봄, 아테네의 모든 시민(과 외국인)이 디오니소스 극장에 모여 며칠간 비극 경연을 관람했다. 이 과정은 국가가 후원하고, 시민들이 심사하며, 전쟁 고아들의 행진과 같은 애국적 의례가 함께 거행되는 총체적인 시민 교육의 장이었다. 바로 이 공간에서 억압된 과거의 기억들이 안전하게 소환되고, 폴리스의 이데올로기 아래 재해석될 수 있었다.
8.2. 억압된 것의 귀환과 제도화: 『오레스테이아』의 사례
이러한 기억의 투쟁과 봉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다.
- 1부 『아가멤논』, 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모계 혈족의 복수라는 원시적 정의가 폴리스를 피로 물들이는 과정은, 억압된 펠라스기적 과거의 기억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 3부 『에우메니데스』: 이 비극의 클라이맥스에서, 모친 살해의 복수를 주장하는 원시적 땅의 여신들(에리니에스)은 아테나 여신이 주재하는 아레오파고스 법정의 판결에 직면한다. 아테나는 부권의 원리를 옹호하여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분노하는 에리니에스들을 파괴하는 대신 그들을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아테네의 수호신 체계에 편입시킨다 (Aeschylus, Eumenides, 892-995).
이 결말은 단순한 텍스트상의 화해가 아니다. 기원전 458년, 실제 아레오파고스 법정의 권한이 축소되는 정치적 격변기에 상연된 이 작품은, 수천 명의 시민 청중 앞에서 낡은 혈족 재판의 원리가 새로운 시민 법정의 원리 아래 포섭되는 과정을 수행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를 통해 펠라스기적 과거의 원시적 힘이 새로운 시민적 법질서 아래로 포섭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이 상징적으로 봉합되었다.
8.3. 소결: 비극, 기억을 재편하는 문화적 장치
결론적으로, 아테네 비극은 펠라스기적 과거의 혼란스러운 기억들을 무대 위로 소환하여, 그것을 당대의 민주적·부권적 질서에 맞게 재해석하고 통합하는 핵심적인 문화적 장치였다. 비극을 통해 아테네인들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과거의 선별적 계승과 재편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했다. 이렇게 무대 위에서 제의적으로 처리되고 정화된 과거의 기억은, 이제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었던 철학자들에 의해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서사로 공식화(formalization)될 준비를 마치게 된다.
제9장. 이성의 이름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원 신화 재구성
아테네의 정치가와 극작가들이 문화적 실천을 통해 수행했던 기억의 정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두 거대한 철학자에 이르러 이성적·체계적 담론으로 완성된다. 이들은 아테네 민주정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자신들의 철학적 체계에 부합하도록 과거를 재단하고 이상적인 기원 신화를 창조했다. 이 과정에서 펠라스기적 모계 전통과 여성의 역할은 철저히 망각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남성 중심의 합리적 질서만이 유일한 문명의 기원으로 공식화되었다.
9.1.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고귀한 거짓말’
플라톤은 여러 저작을 통해 아테네의 기원을 신화, 혈통, 이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다. 『국가』에서 그는 이상 국가의 시민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고귀한 거짓말(Noble Lie)’을 제안한다. 모든 시민은 “대지라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는 신화가 그것이다 (Plato, Republic, 414d-e). 이는 펠라스기적 토착 신앙의 구조를 차용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생식 역할을 지우고 국가를 ‘어머니’로 은유함으로써 시민들의 충성을 유도하는 정치적 장치이다. 『법률』에서는 대홍수 이후의 인류가 “장자에 의한 가부장적 통치”에서 시작하여 국가를 형성했다고 서술하며, 문명의 기원을 남성적 권위에서 찾는다 (Plato, Laws, 680e-681a). 이처럼 플라톤은 펠라스기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이성적 설계와 남성 영웅의 계보를 중심으로 아테네의 기원을 이상화했다.
9.2.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가부장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도시(polis)가 가족-촌락-도시의 순서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연적’ 공동체의 출발점인 가족은 본질적으로 가부장제(patriarchy)이다. 그는 “남자는 본성상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 한쪽은 지배하고 다른 쪽은 지배된다”고 단언하며,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종속을 자연의 원리로 규정했다 (Aristotle, Politics, 1254b). 이러한 전제하에서, 펠라스기 사회의 모계적 합의 구조나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비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기억될 가치조차 잃게 된다. 그의 역사서인 『아테네인의 정치』 역시 솔론, 피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등 남성 입법가와 참주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서술되며, 제도와 인물 중심의 합리적 역사 서사 속에서 펠라스기적 전통은 설 자리를 잃는다.
9.3. 소결: 기억의 공식화와 철학적 정당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문화기억을 최종적으로 공식화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문화기억 이론의 틀에서 볼 때, ① 군사적 영웅담과 남성 계보를 선택(selection)하고, ② 모계적·여신 숭배 전통을 배제(damnatio memoriae)했으며, ③ 자신들의 철학적 저술을 통해 이 재구성된 역사를 형식화(formalization)했다. 그 결과, 아테네 민주정의 기원은 펠라스기적 뿌리가 거세된 채, 합리적이고 남성적인 헬레네스 정신의 발현이라는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서사로 완성되었다.
이들 철학자가 구축한 기억 체계는 너무나 강력했기에, 이후 서구 문명은 오랫동안 아테네 민주주의를 이러한 시각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공식 기억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아테네 외부의 시선, 즉 경쟁 폴리스와 제국의 기억을 통해 아테네의 자기 서사가 얼마나 치열한 경쟁적 기억(competitive memory)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제4부: 경쟁과 전이: 외부의 시선과 최종적 유산
제10장. 타자의 시선: 경쟁적 기억의 장(場) 속 아테네
아테네의 자기 정체성과 기원 신화는 결코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주변 폴리스 및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고 재구성된, 역동적인 정치적 산물이었다. 알레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이 지적했듯, 집단 기억은 종종 서로 다른 공동체 간에 충돌하는 경쟁적 기억(competitive memory)의 형태로 나타나며, 때로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차원으로 통합되는 전이적 기억(transitional memory)의 과정을 겪는다 (Assmann, A., 2011, Cultural Memory and Western Civilization). 본 장에서는 스파르타, 델포이, 그리고 페르시아라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아테네의 펠라스기 기원 신화와 민주주의 이념이 어떻게 외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했는지를 분석한다.
10.1. 스파르타의 대항-기억: 도리아인의 후예 대 펠라스기인의 땅
아테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기원 신화에 대한 직접적인 대항-기억(counter-memory)을 제시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을 헤라클레스의 후손이자 순수한 혈통의 도리아인으로 정체화하며, 아테네의 복잡하고 이질적인 기원을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헤로도토스는 한때 그리스 대부분이 펠라스기인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아테네인들 역시 당시에는 헬레네스가 아닌 ‘크라나이인’이라 불린 펠라스기인이었다고 기록한다 (Herodotus, Histories, 1.56-57).
이러한 서사는 아테네의 ‘토착성’ 주장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뿌리가 ‘야만적(barbarian)’이고 ‘비(非)헬레네스적’인 과거에 닿아 있음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Hall, J. M., 2007, “The Pelasgians and the Politics of Ethnic Identity in Ancient Greece”, in The Invention of Ancient Greece). 즉, 스파르타의 시선 속에서 아테네의 펠라스기 기원은 긍지의 원천이 아니라, 헬레네스 세계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혈통적으로 불순하다는 낙인이 되었다. 이처럼 두 폴리스는 각기 다른 기원 신화(도리아인의 정복 vs. 펠라스기인의 자생)를 내세우며 헬레네스 세계의 패권을 두고 치열한 기억 경쟁을 벌였다.
10.2. 델포이의 중재와 물질화된 기억 경쟁
모든 그리스인이 공유하는 성역이었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폴리스 간의 기억을 중재하고 공인하는 중요한 공간이자, 기억 경쟁이 물질적으로 구현되는 장소였다. 아테네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기원 신화와 정치적 행위를 델포이라는 범그리스적(Panhellenic) 권위를 통해 정당화해야 했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인들이 델포이에서 받은 ‘목제 성벽(wooden wall)’ 신탁을 해상 방어, 즉 함대 건설로 해석하여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이끈 일화가 대표적이다 (Herodotus, Histories, 7.141-143).
이러한 경쟁은 각 폴리스가 봉헌한 금고(Treasury) 건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기원전 6세기 말 시프노스인들이 세운 화려한 이오니아식 금고와, 마라톤 전투 승리 후 아테네인들이 세운 소박하지만 위엄 있는 도리아식 금고는 건축 양식과 조각 주제를 통해 각자의 부와 군사적 위업을 과시하는 물질화된 기억의 각축장이었다 (Neer, R. T., 2002, The Art and Archaeology of the Greek World).
10.3. 페르시아라는 거울: ‘전이적 기억’과 기억의 경관(Memory-Scape)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거대한 외부의 위협은 그리스 내부의 경쟁적 기억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통합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겪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기원 경쟁은 잠시 뒤로 밀려나고 ‘헬레네스 대 바르바로이(야만인)’라는 더 큰 대립 구도가 전면에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의 기억은 중대한 전이(transition)를 겪는다.
전쟁 이전까지 아테네의 토착성 신화가 주로 내부 결속과 스파르타와의 경쟁을 위한 것이었다면,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며 그것은 “헬레네스 문명의 첫 번째 방어선이자 구원자”라는 새로운 서사로 승화되었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를 “그리스의 구원자”로 묘사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Herodotus, Histories, 7.139). 이 새로운 기억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크로폴리스 재건 사업을 통해 아테네의 기억 경관(memory-scape)으로 영구히 각인되었다. 파괴된 옛 신전의 잔해를 의도적으로 보존하고 그 위에 파르테논 신전을 세운 것은, 페르시아의 야만에 맞선 승리와 민주주의의 영광을 매일의 삶 속에서 체험하게 하는 거대한 기억 장치였다.
10.4. 소결: 외부의 시선과 기억의 재편
결론적으로, 아테네의 펠라스기 기원 신화와 민주주의 이념은 고립된 내부의 산물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치열한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재편된 결과물이었다. 스파르타의 경쟁적 기억은 아테네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원을 더욱 정교하게 방어하고 정당화하도록 만들었고, 델포이라는 공유된 기억의 장은 그 정당성을 범그리스적 차원으로 확장하는 통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페르시아라는 외부의 위협은 아테네의 지역적 기억을 헬레네스 전체의 수호자라는 전이적 기억으로 격상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제11장. 결론: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 그 역설적 유산
본 연구는 아테네 민주정의 기원을 헬레네스 중심의 단선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그 이면에 억압되고 망각된 선주민 펠라스기인의 유산과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 결과, 아테네 민주정은 어느 한순간의 합리적 발명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적 충돌과 융합, 그리고 그 결과물을 정당화하기 위한 치열한 기억의 정치를 통해 형성된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산물임이 드러났다. 아테네 민주정은 본질적으로 망각된 유산 위에 세워진 역설적 건축물과 같다.
11.1. 연구의 종합: 기억의 선택, 변형, 그리고 봉합
본고의 논증을 종합하면, 아테네 민주정의 기원은 다음과 같은 기억의 정치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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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대와 상호작용: 에게해 선주민 사회, 즉 ‘펠라스기 전통’으로 잠정적으로 명명된 문화는 의례 중심의 공동체적 합의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토착 질서는 인도-유럽계(얌나야)의 부권적·위계적 사회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미케네 문명이라는 최초의 혼종적(hybrid) 문명을 탄생시켰다.
- 기억의 재구성: 고전기 아테네는 이 혼종적 기원을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했다.
- 선택(Selection)과 배제(Exclusion): 아테네는 펠라스기적 뿌리에서 ‘토착성 신화’만을 선택하여 시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그 안에 잠재된 모계적 요소와 여성의 역할은 ‘야만’으로 규정하여 체계적으로 배제했다.
- 변형(Transformation)과 봉합(Suturing): 선주민의 제의적 합의 전통은 추첨제나 도편추방제와 같은 세속적 정치 제도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공명하며 변형되었고, 억압된 과거의 기억은 비극 무대 위에서 새로운 폴리스 질서 속으로 상징적으로 봉합되었다.
- 공식화(Formalization): 최종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재구성된 기억을 이성적 담론으로 체계화하여, 남성 중심의 합리적 질서만이 유일한 문명의 기원이라는 공식 서사를 완성했다.
- 외부와의 상호작용: 이 모든 과정은 스파르타의 경쟁적 기억과 페르시아라는 외부 위협이 촉발한 전이적 기억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강화되고 재편되었다.
11.2. 학술적 기여 및 함의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학술적 기여와 함의를 지닌다.
- 정치사 연구의 확장: 본 연구는 아테네 민주정 연구를 단순한 제도사 분석에서 벗어나, 정치적 정체성의 문화사로 확장했다. 이는 정치 제도의 발전이 합리적 설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집단 정체성과 과거 서사가 어떻게 권력 구조의 형성에 개입하는지를 보여준다.
- 기존 연구와의 대화: 본 연구는 중장보병 개혁이나 해상 무역 발달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고의 문화기억적 접근은 그러한 물질적 변화가 어떤 문화적 토양 위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고 수용될 수 있었는지를 조명함으로써, 기존 연구에 새로운 차원을 더한다. 즉, 이 연구는 민주정 발전의 사회경제적 ‘하드웨어’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것을 작동시킨 문화적 ‘소프트웨어’와 이데올로기적 ‘운영체제’를 분석하는 틀을 제공한다.
- 서구 문명 기원에 대한 비판적 성찰: 본 연구는 ‘문명’과 ‘야만’, ‘기억’과 ‘망각’의 이분법이 역사 서술 과정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헬레네스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잊힌 ‘타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역사 서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1.3. 향후 연구 과제
본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후속 연구를 제안한다.
- 비공식 기억의 고고학적 복원: 아테네의 공식 서사에서 배제된 여성, 노예, 이주민의 삶을 가정용 제의 도구, 낙서가 새겨진 필기판, 납 주술판(κατάδεσμοι) 등 미시적 물질문화 분석을 통해 복원하는 연구.
- 비교 역사사회학 연구: 아테네의 ‘제의→정치’ 전이 모델을 로마 공화정의 가정 제의(sacra privata)가 공적 사제단(pontifices) 제도로 편입되는 과정과 비교하여, “의례의 세속화” 패턴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규명하는 연구.
- 계량적·과학적 방법론의 심화:
- 고대 DNA(aDNA) 분석: 발표 예정인 고전기 아테네 인골 DNA 데이터 분석을 통해 토착성과 이주민의 상호작용을 검증.
- 동위원소 분석: 스트론튬(Sr)·산소(O) 동위원소 분석으로 개인의 지리적 이동성을 추적하여, 아테네 시민단의 계층별 출신 성분을 재구성.
- 계량 모델링: 이상의 데이터를 종합하여 계층화 베이지안 모델(Hierarchical Bayesian model)로 ‘군사 엘리트 이동 vs 토착 인구 지속’ 등 경쟁하는 시나리오들의 확률을 시뮬레이션하는 연구.
11.4. 맺음말
아테네 민주주의가 인류에게 남긴 가장 심오한 유산은 완성된 제도의 청사진이 아니라, 그 기원에 내재된 근본적인 역설 그 자체일지 모른다. 모든 시민의 공적 발언(parrhesia)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던 정치 체제가, 실은 공동체의 절반인 여성과 자신들의 뿌리가 된 선주민의 역사에 대한 거대한 공적 침묵 위에서 성립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러한 아테네의 사례는 모든 정치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과거와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즉 기억과 망각의 끊임없는 투쟁 위에서만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테네 민주정의 진정한 의미는 그 완전무결함이 아니라, 바로 이 역설적 기원 속에 담긴 성찰의 가능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묻게 한다. 우리의 공동체는 누구의 기억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영광스러운 서사 아래에는 누구의 목소리가 잊히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아테네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가치 있는 민주적 유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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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ChatGPT와 Google AI Studio의 도움을 받아 3주 간 작성한 글이다. 내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GPT가 근거를 찾아주며, AI Studio가 검토 및 보완하며 분업했다. 이 글은 펠라스기인이라는 허깨비 같은 토대 위에 올려진 가설이다. 따라서 전제부터 틀린 글이다. 하지만 상상력을 자유로이 펼치는 것 그 자체가 재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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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D
20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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