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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문학 내 패러다임 전환의 가능성 - 강신무·세습무 유형론 붕괴 사례를 중심으로

Ⅰ. 서론

한국 무속학계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받아들여진 강신무(降神巫)세습무(世襲巫) 의 이분적 유형 구분은 200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급격한 패러다임 전환을 겪었다. 강신무는 주로 개인이 신내림(영매 체험)을 통해 무당이 되는 비세습 샤먼을, 세습무는 집안의 대물림으로 무업을 이어가는 세습 샤먼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이 구분은 단순한 입무(入巫) 방식의 차이를 넘어 무당의 능력과 역할, 의례 형태, 사회적 위상, 지리적 분포까지 규정짓는 핵심 분류로 기능해왔다. 실제로 “강신무인가 세습무인가” 하는 질문은 한 무당의 개인적 종교경험을 넘어서, 그가 집전하는 굿의 양상과 사회적 위치, 나아가 한국 무속 전체의 계통과 성격을 설명하는 토대로 여겨졌다. 이러한 강신무-세습무 이원론은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별다른 이견 없이 통용되어 왔으며, 심지어 현장의 무당들마저 연구자들이 만든 이 분류 개념을 자신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해왔을 정도로 널리 정착된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강신무-세습무 개념은 한국 무속 연구의 ** “학계의 정설” **로 자리 잡아, 무속 현상을 이해하는 1차적 틀로 기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 패러다임은 21세기 초에 들어 학계 신진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강한 문제 제기에 직면했고, 짧은 기간 내 급속한 전환을 이루었다. 본 연구는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붕괴 과정을 사례 연구로 삼아, 한국 인문학 분야 전체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혹은 왜 어려운지를 메타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특정 전공분야(무속학) 내에서 정설로 굳어진 분류 체계가 비교적 빠르고 조용하게 해체된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인문학의 다른 분야들(예: 역사학, 문학, 국어학, 고고학 등)에서도 유사한 전환이 가능한 조건과 장애 요인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이 연구의 의의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무속학계 사례를 통해 인문학 지식체계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발생하는 내적 역학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둘째, 이를 바탕으로 한국 인문학 각 분야의 학술장(academic field)과 방법론, 외부적 영향 요인 등을 비교함으로써, 특정 분야에서의 지식 전환이 다른 분야에 비해 왜 용이하거나 어려웠는지를 통찰한다. 이러한 메타분석은 인문학 연구의 자기반성과 발전을 위한 단서를 제공하며, 나아가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의 모색 가능성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Ⅱ. 이론적 배경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 개념은 본래 토머스 쿤(Thomas Kuhn)의 과학사 논의에서 비롯되었으나, 학문 분야 전반에 널리 적용되어 왔다. 패러다임이란 특정 시대나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론적 틀과 문제의식, 방법론적 규범의 총체로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 단계의 안정적 축적을 가능케 하지만, 결정적인 이상 현상(anomaly)의 축적과 공동체 내 성찰을 통해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인문학의 경우 자연과학처럼 명백한 법칙의 형태는 아니지만, 특정 연구 분야마다 당대 학자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이론적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이 패러다임은 해당 분야의 연구 대상 분류 체계, 연구 질문의 구성 방식, 해석 관행 등을 규정하며, 때로는 지식 생산의 경향을 오랫동안 지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문학 패러다임은 자연과학에 비해 더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하거나,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인문 지식이 종종 민족적 정체성, 이데올로기, 학문 전통과 결부되어 있어,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이 단순한 증거의 축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는 패러다임 개념을 학술장의 구조와 세대 교체, 방법론적 전환, 외생 요인의 상호작용 속에서 파악한다. 부르디외(P. Bourdieu)의 학술장(field) 이론에 따르면, 학문 공동체 내 권위와 자본의 분포, 기성 학자와 신진 연구자 간의 역학이 지식의 형성과 변화를 추동한다. 새로운 학설이나 개념은 단순히 논리적 타당성뿐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집단의 힘 관계에 의해 수용 여부가 결정되곤 한다. 따라서 한 분야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해하려면 그 분야 학계의 세대 구성, 학회 및 연구회 활동, 지적 권위의 분포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방법론의 차이는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 열쇠이다. 서로 다른 연구 방법(예: 실증주의와 해석학,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등)은 동일한 대상이라도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증거의 기준을 적용한다. 기존 패러다임이 특정 방법론에 기반해 있다면, 새로운 방법론의 도입은 기존 개념 틀을 흔들 수 있다. 특히 무속학 분야는 민족지적 현장조사와 비교문화적 접근을 중시하는 민속학/인류학적 방법과, 과거 문헌과 계보를 탐색하는 역사학적 방법이 교차한다. 이는 새로운 세대가 해외에서 최신 인류학 이론을 학습하거나 다른 분야의 방법론을 접목하면서, 과거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실제로 2000년대 무속학계 신진 연구자들은 기존에 암묵적으로 수용되던 엘리아데(M. Eliade)의 샤머니즘 이론 등 본질주의적 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들여옴으로써 패러다임 변화를 모색했다.

아울러 외생적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 2003년 유네스코 무형유산협약의 발효와 이를 전후한 한국의 무형문화유산(ICH) 정책은 무속을 비롯한 전통문화 연구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다. 국가 및 지자체 차원에서 무당의 굿과 의례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보호되면서, 이전까지 주변적이거나 “퇴행적”으로 치부되던 세습 무속 전통에도 학계의 관심이 높아졌다. 무형유산 담론은 다양한 전통의 동등한 가치를 강조하였고, 이는 강신무와 세습무 중 어느 하나만을 정통으로 보는 관점을 재고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했다. 또한 1999년 시작된 Brain Korea 21 (BK21) 사업 등 학문후속세대 양성 정책은 인문학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무속학 분야에서도 신진 연구자들이 이러한 지원 속에 국내외에서 최신 학문 동향을 습득하고 독자적 연구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는 기성 연구의 관행에 도전하는 새로운 담론의 형성을 촉진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정리하면, 본 연구는 강신무-세습무 논쟁 사례를 통해 인문학 패러다임 전환이 학술장의 세력 구조, 방법론적 혁신, 그리고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펴볼 이론적 틀을 설정하였다.

Ⅲ. 연구방법

본 연구는 질적 메타연구(qualitative meta-study)의 성격을 띠며, 문헌분석과 비교분석을 주된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우선, 사례 연구로서 2000년대 초중반 한국 무속학계에서 진행된 강신무·세습무 이분 체계에 대한 비판 담론과 그에 따른 패러다임 전환 과정을 면밀히 분석한다. 이를 위해 해당 시기에 발표된 핵심 학술 논문들을 1차 자료로 삼아, 텍스트 내에 나타난 주장과 증거, 연구자들의 논리 전개를 직접 인용하고 교차 검토하였다. 특히 본 연구자는 한국무속학회가 간행한 학술지 《한국무속학》 제7집(2003년), 제8집(2004년), 제9집(2005년)에 수록된 관련 논문들과 한국무속학회 학술대회 자료집(2004년)에 발표된 공동연구 결과 등 총 8편의 주요 논문을 분석의 근거로 활용하였다. 이들 문헌은 모두 강신무·세습무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새로운 대안 모색을 다룬 것으로서, 당시 무속학계 내부 담론의 전환상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1차 문헌 분석을 통해 강신무-세습무 패러다임 전환의 내적 동인(연구자들의 논지와 방법론)을 파악한 후, 비교 분석 단계에서는 이를 다른 인문학 분야와 대조하였다. 비교 분석은 다른 분야 사례 연구보다는 거시적인 학술 풍토의 비교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시 말해, 무속학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했던 요인을 역사학·문학연구·국어학·고고학 등 분야의 사례와 비교사례적(comparative) 으로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각 분야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지배적 연구관행이나 분류체계(예컨대 역사학의 시대구분 논리, 국문학의 정전(正典) 체계 등)가 도전받은 사례를 문헌과 학계 담론을 통해 살펴보고, 무속학계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의하였다. 다만, 분량상의 제약으로 인해 각 분야의 세부 사례에 대한 1차 사료 분석보다는 기존 연구 경향과 저술을 참고한 2차적 고찰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본 연구는 개별 사례의 사실 확인을 넘어, 한국 인문학계 전반에 내재한 구조와 역학을 거시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Ⅳ. 강신무·세습무 이분법 패러다임의 형성과 전환

1. 강신무·세습무 분류 체계의 형성과 지배적 패러다임

현대 한국 무속학에서 강신무와 세습무의 구분은 앞서 언급했듯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역사적 개념이다. 이용범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무당을 강신무와 세습무로 구분하는 시각은 192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분명한 학술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이 분류법이 민간에 전승되던 전통적 분류법이 아니며, 근대 학술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차적 개념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강신무·세습무 개념은 일제시대 조선민속학자들의 연구와 해방 이후 한국 학자들의 민속학 연구 속에서 등장하여, 1960~70년대에 이르러 한국 무속의 대표적인 유형론으로 확립되었다. 그 배경에는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지식 담론이 민족문화의 원형 탐색에 집중되었던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당시 학자들은 한국 무속을 민족 문화의 기층이자 고대적 종교의 원형으로 간주하고, 강신무(영능력이 중심인 무당)와 세습무(혈연에 의한 제의주관 무당)의 구분을 통해 한국 샤머니즘의 고유한 계통과 다른 문화권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특히 엘리아데의 샤머니즘 이론(“엑스타시의 기술”로서의 샤머니즘 개념)은 한국 무속의 영적 체험을 중시하는 연구 경향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강신무-세습무 이원론에도 이론적 틀을 제공하였다.

이 분류 패러다임은 김태곤과 최길성 등의 저명한 무속학 연구자들에 의해 체계화되고 확산되었다. 예컨대 김태곤은 전국의 무속 조사를 토대로 한국 무당을 네 유형(무당형·단골형·심방형·명두형)으로 구분하면서, 그 중 강신무(무당)세습무(단골) 를 두 대표 유형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강신무를 “영력(靈力)에 의한 점복과 굿을 행하는 무당형”으로, 세습무를 “영력 없이 단골의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형”으로 파악하여, 두 범주가 본질적으로 영적 능력의 유무에 의해 구별된다고 보았다. 한편 최길성은 무속의 춤과 음악 연구에서 강신무와 세습무의 춤사위 차이에 주목하여 “두 발을 모아 뛰는 ‘도무(跳舞)’를 추는 쪽을 강신무, 두 발을 교차하며 추는 춤은 세습무”로 구분할 수 있다고까지 명확히 제시하였다. 나아가 최길성은 이러한 논거를 바탕으로 “남부 지방의 세습무는 샤먼(무당)이 아니며, 한국 무속에는 남과 북 두 가지 서로 다른 계통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기성 연구자들은 강신무와 세습무를 본질적으로 상이한 무속 집단으로 인식했고, 해당 개념들을 통해 한국 무속의 지역적 차이와 역사적 기원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 결과 강신무·세습무 이분론은 오랜 기간 별다른 의문 제기 없이 한국 무속의 표준 분류법으로 기능하였다. 학계에서는 두 용어의 정확한 정의나 적합성에 대한 엄밀한 검증 없이 관행적으로 인용되어 왔으며, 나아가 무속 현장의 조사보고나 예술 분야 담론에서도 “강신무 계통의 춤”, “세습무 계통의 음악” 등 다소 막연한 범주가 유통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요컨대 2000년대 초반까지 강신무-세습무 패러다임은 한국 무속 현상 전반을 해석하는 기본 전제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세대 연구자들이 이 통념에 도전하여 패러다임 전환을 꾀한 과정은, 인문학 분야에서 공고한 분류 체계가 변모하는 한 사례를 제공한다.

2. 패러다임 전환의 서막: 문제 제기의 등장

강신무·세습무 이원 체계에 대한 문제 제기는 20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사실 이러한 의문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며, 몇 해 전부터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 서서히 제기되어 왔다(모 논문에서의 늬앙스로 보아 아마도 사석에서 술 마시다가 나눈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 같다). 현장 조사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연구자들은 기존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무속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용범은 “기존 연구성과나 현장보고서들을 검토해 보면 강신무·세습무 개념에 맞지 않는 사례들이 발견”되며, 심지어 조금만 현장조사를 해봐도 이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자주 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무속 현장에서는 전통적으로 세습무 지역으로 알려진 남부 지방에서 영매 체험을 한 세습 무당이 나타나거나, 반대로 강신무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령의 계보를 강조하며 가계적(家系的) 세습성을 주장하는 사례들이 보고되었다. 예컨대 일부 세습무 권역(호남 지역)의 굿판에서 내림굿을 경험한 무당이 활동하고, 서울·경기 지역의 강신무들 중에서도 “우리 집안에 대대로 무당이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강신=비세습, 세습=비영매” 라는 기존 도식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변화도 무속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산업화·도시화를 거치며 전통 사회에서 세습무 유지의 기반이었던 농촌 공동체와 단골 제도가 흔들렸고, 무당의 역할에 있어서도 전문화·분화가 약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경엽은 현대 무속 현장에서 “세습무의 재생산이 어려워지고 강신무들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전통적인 단골과 점쟁이의 이중적 구조가 무너지고 동일 공간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관찰했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지역 공동체의 제의를 전담하던 세습무당(단골무당) 과 개인적 치병·점복을 담당하던 강신무당이 분리되어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 이 경계가 허물어져 한 사람이 굿도 하고 점도 보는 일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강신무·세습무 구분의 기능적 의미를 약화시켰다. 더 이상 “강신무 = 굿 중심, 세습무 = 제의 중심”이라는 도식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이론 간의 괴리가 커지자, 2000년대 초 신진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2년 이용범이 한국종교학회 《종교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강신무와 세습무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하며 “무당이 주재하는 의례를 기준으로 무당의 유형을 구분하자”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주목할 만한 선구적 시도였다. 이는 강신무·세습무를 입무 방식이 아니라 무속 실천 양상에 따라 재분류하자는 제안으로서, 이후 논의의 방향성을 제시한 셈이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마침내 2003년, 강신무·세습무 개념 그 자체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일련의 연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3. 신진 연구자들의 논점과 방법론: 이분법의 해체

2003년 한국무속학회는 강신무·세습무 문제를 학술대회 공동 주제로 채택하며 본격적인 공론화에 나섰다. 2003년 11월 인하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무속학회 제11차 학술대회에서는 세 명의 연구자가 강신무·세습무 유형 구분을 재검토하는 발표를 하였고, 이 연구 결과들이 학회지 《한국무속학》 제7집(2003년)에 논문으로 게재되었다. 이어 학회 임원진은 2004년 한 해 동안 후속 공동연구를 추진하여 추가 학술대회(제12차, 제13차)를 개최하고 총 10편 이상의 발표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학회 차원의 조직적 노력으로,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논의를 심화시킴으로써 기존 패러다임을 재검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제 2003년 학술지에 발표된 핵심 논문들과 후속 연구들의 주요 논지를 검토함으로써 신진 연구자들이 이분법을 어떻게 해체해나갔는지 살펴보겠다.

(1) 개념사적 비판 – 이용범(2003): 이용범은 《한국무속학》 제7집에 「강신무·세습무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발표하여, 해당 개념의 역사성과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그는 강신무-세습무 개념이 애초부터 한국 무속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1차 개념이 아니라, 근대 학자들이 연구 편의를 위해 설정한 “이차적 이론 구성물” 임을 상기시켰다. 특히 이 개념이 한국 무속 연구 초기에 형성되어 어느새 연구자와 일반인의 시각을 거꾸로 규정하게 된 상황을 지적하며, 실제 무속 현장에 부합하지 않는 사례들이 다수 존재함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일부 중부 지역(강신무 전통 지역) 무당에게서 세습적 양상이 발견되고, 남부 지역(세습무 전통) 무당에게서 강신 체험이 보고되는 등 “개념에 맞지 않는” 현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학계가 이를 충분히 개념 수정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점을 비판했다. 이용범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강신무·세습무 개념이 “무당 개인의 종교적 체험”(내림 여부)에만 초점을 둔 개념이므로 현대 무속의 다양한 양상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해당 개념의 비판이 곧 그것의 전면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이 개념에 대한 성찰은 “한국 무속연구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작업”이라고 역설하였다. 요컨대 이용범의 논지는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밝히고 그것이 지닌 설명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학계가 새로운 범주와 개념을 모색할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2) 경험적 반증과 개념 재정립 – 홍태한(2003): 한편 같은 호에 발표된 홍태한의 「강신무의 사례로 본 강신무와 세습무의 유형 구분」은 보다 경험적 자료에 입각하여 기존 개념을 재검토한 연구였다. 홍태한은 서울·경기 지역 등 강신무 전통 지역에서 여러 강신무 사례를 조사한 결과, “강신무의 경우에도 세습적인 면이 매우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강신무의 특성을 정의하는 여섯 가지 측면—①신병/강신체험, ②구체적 신관(神觀)과 신당의 구비, ③굿 진행의 춤·음악 양상, ④영력에 의한 점복, ⑤단골(고객 집단)과의 관계, ⑥무가(巫歌) 전승 등—에서 사례 분석을 수행하고, 각각의 측면에서 강신무와 세습무 사이의 전통적 차별성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첫째 측면인 입무 계기에서는 강신무는 신병을 앓고 내림굿을 하는 것이 원칙이나 실제로 세습무 가계에서 강신무로 입문하는 사례가 다수 존재하며, 마찬가지로 세습 전통에 속한 무당도 신병 체험을 하는 경우가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섯째 측면인 단골과의 관계에서도, 강신무라고 해서 반드시 개인 신당만 섬기고 공동체 제의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세습무도 개인 치병과 점사에 적극 관여하는 현실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홍태한은 “강신무와 세습무는 완전히 다른 두 집단이 아니라 공통점도 많이 가진 집단”이라는 인식을 사례를 통해 부각시켰다. 요컨대 그의 연구는 경험적 반증을 통해 기존 이분법의 타당성을 흔드는 한편, 강신무 개념을 현실에 맞게 재정립할 것을 제안했다. 홍태한은 강신무를 “신병체험을 통해 무당이 되지만 세습적인 성향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영력을 바탕으로 하되 개인적 능력과 예술적 소양으로 굿을 진행”하는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강신무 개념 속에 세습성의 요소를 통합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에 강신무=비세습으로 단순 대립시켜왔던 도식을 깨고, 분류 항목들의 재구성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평가된다.

(3) 현장 변화와 복합 양상 – 이경엽(2003): 이경엽의 「세습무 사례를 통해 살펴본 강신무·세습무 구분 검토」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세습무 측면의 사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경엽은 주로 남부지역 세습무 공동체에서 진행된 현장조사를 토대로, 현대의 세습무들이 전통적 위상과 역할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현실을 지적했다. 젊은 세대의 무업(巫業) 기피로 인해 세습무의 가계 전승이 단절되고, 한편으로 도시로 진출한 강신무들이 지역 굿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예전처럼 지역 무속을 세습무만으로 유지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강신무와 세습무가 하나의 지역 사회에서 공존하거나 역할을 나누는 구도가 흔해졌고, 이는 기존 분류법에 의해 “남과 북, 세습과 강신으로 나뉘었던 두 계통”의 융합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경엽은 이러한 변화상을 통해 강신무·세습무 구분의 경계가 실천 현장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더 이상 입무 방식 하나로 무당 유형을 양분하는 것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특히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동과 무속 현실의 변화를 연결시켜 논지를 전개함으로써, 강신무·세습무 이분법이 시대적 유효성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부각시켰다. 이경엽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도 흥미로운데, 현장 무당들과의 인터뷰, 구술 자료 등을 활용하여 무당 자신들의 인식 변화를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강신무·세습무 유형론 논의의 시발점이 된 “강신무의 세습성 주장”이 정작 무당 자신의 정체성 창조 전략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조명하였다. 즉, 일부 강신무들이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령”을 운운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들이 세습무였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통성과 연속성을 지닌 무당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일종의 서사적 전략임을 시사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강신무·세습무 담론을 무당 개인의 사회적 전략과 주체성 문제로까지 확장하여 분석한 것으로, 전통적인 범주 논쟁에 새로운 해석학적 층위를 제공하였다.

(4) 이론적 전환과 종합적 제언 – 김동규(2004): 2003년의 일련의 논의를 바탕으로, 2004년에는 강신무·세습무 논쟁을 이론적 차원에서 총괄·반성하는 연구가 등장했다. 그 대표격인 김동규의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에 대한 일고찰」(《한국무속학》 제8집, 2004년)은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이 출현했던 당대의 학문적 패러다임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김동규는 먼저 1960~70년대 강신무·세습무 개념이 확립될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본질주의적이고 원형론적인 무속 연구 패러다임” 으로 규정하였다. 이 패러다임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무속을 민족 문화의 원형으로 이상화하고, 샤먼의 엑스타시(접신 체험)를 샤머니즘의 본질로 간주한 엘리아데 이론 등에 기반한 것이었다. 김동규는 인류학계에서 엘리아데식 샤머니즘 이론에 비판이 제기되어왔음을 소개하며, 원형 담론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 강신무·세습무 이분법은 형성 당시 해당 패러다임 내에서는 나름의 설명력을 가졌으나, 패러다임의 교체 없이 그 개념만 관성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현대의 다양해진 무속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김동규는 기존 논의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 강신무·세습무 구분의 핵심 기준이던 “강신체험 유무”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 유형론이 내림굿 이후 무당의 지속적 성장과 변모 과정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무당이 일회적 입무 경험으로 정체성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림굿 이후 평생에 걸쳐 신령과 신도(信徒)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창조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김동규는 강신무와 세습무 구분의 경계지점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예컨대 강신무가 자신의 세습성을 주장하는 행위—을 “사실의 차원이 아닌 가공된 이야기(내러티브)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그것은 무당이 자기 정체성을 재창조하는 전략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앞서 이경엽이 언급한 사례와 통하는 해석으로서, 강신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적극적 행위를 하나의 상징적 자기표현으로 분석한 것이다.

김동규는 이러한 이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새로운 무속 분류 체계의 정립 방향을 제언하였다. 그는 강신무·세습무라는 기존 틀을 당장 폐기하기보다는, 귀납-연역의 순환적 방법을 통해 기존 유형론을 전면 수정·보완할 것을 역설한다. 즉 선행 연구자들이 방대한 현지조사를 거쳐 귀납적으로 세운 거시적 분류 원칙을 이제는 연역적으로 검증하여 새 사례들에 적용해보고, 여기서 드러난 새로운 사항들을 다시 귀납적으로 종합함으로써 보다 유연한 거시적 유형론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무당 개인만이 아니라 신격(神格), 신앙공동체(신앙민), 의례의 구조 등을 모두 아우르는 다차원적 관점에서 분류 기준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기존에는 무당의 영적 체험 여부 하나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무당-신령-의뢰인-의례의 관계망 속에서 나타나는 복합적 특징들을 고려한 분류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이분법을 깨뜨린다”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을 향한 건설적 제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김동규는 선학들의 업적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도, “지금까지의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전면적인 수정 작업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분명히 하였다.

(5) 후속 연구와 종합: 2004년의 한국무속학회 학술대회에서는 김동규 이외에도 여러 연구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이 이분체계를 조명하였다. 양종승은 강신무·세습무 용어의 등장 배경과 연구사를 추적하며, 김태곤·최길성 등의 이론이 한국 무속의 기원 논쟁과 얽혀 해당 분류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 과정과, 그 개념이 오랫동안 학술적 검증 없이 확대 재생산된 실태를 밝혔다. 그는 “두 용어 사용의 불가피성은 한국 무속 연구 초창기에 학문적 초석을 다듬는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오늘날 두 용어가 거시적 이해에 적지 않은 방해 요인이 되고 있다”고 평함으로써,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개념의 유용성과 한계를 동시에 짚었다. 또한 발표 토론자들은 일제 관학자들의 조선 무속 연구에서 해당 개념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최석영), 조선후기 호적 자료에 보이는 무당 세습 사례(임학성) 등 역사자료 분석을 통해 기존 통설을 재검토하였다. 이처럼 실증 연구, 이론 연구, 역사 연구가 망라된 공동 작업을 거쳐, 무속학계는 강신무·세습무 분류법의 문제점을 폭넓게 확인하는 한편 대안 모색의 방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루게 되었다.

(6) 요약 – 패러다임 전환의 실현: 2005년 허용호의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비판적 고찰: 충청도 앉은굿을 중심으로」는 이러한 일련의 논의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연구로서, 지역 현장의 복합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허용호는 충청남도 지역의 독특한 무속의례인 “앉은굿” 을 사례로 들어, 강신무·세습무 이분법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다층적 현상을 보고하였다. 충청도 앉은굿에는 “비강신·비가계 세습 유형의 존재”, “독특한 신격의 존재와 인식”, “춤이 거의 없으며 ‘경’(經)의 구송으로 이루어지는 연행 방식”, “직접적이고 주술적인 축귀(逐鬼) 방식의 재현” 등 여태까지 분류 기준에 포섭되지 않은 양상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 강신무와 세습무로 대립적으로만 인식되었던 항목들이 결합되고 혼재된 모습이 드러난다. 예컨대 “강신의 가계 세습”, “영적 세습(조상의 영이 내려 무당이 되는 경우)”, “비강신 법사에게서 보이는 강신무들의 뚜렷한 사승(師承) 관계”, “의식과 절차를 중시하면서도 주술성과 의례성을 병행함”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하나의 지역 사례 안에 강신과 세습 요소, 주술적 요소와 의례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허용호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 무속 연구의 지평에서 충청도 앉은굿과 같은 중간적·복합적 사례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른 지역의 무속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전면적인 수정 작업이 불가피하다”면서, 기존 패러다임의 대대적 수정을 촉구하였다. 그는 선학들의 업적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식 전환과 보완을 통해 새로운 거시적 유형론을 모색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2000년대 초중반 한국 무속학계는 강신무·세습무 분류 패러다임을 둘러싸고 집단적 성찰과 비판을 수행함으로써, 해당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거쳤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여러 연구자들의 다양한 방법론(현지조사, 역사 문헌 분석, 이론 비평 등)이 총동원되어 하나의 통설이 해체·재구성되는 드문 예를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빠르고도 비교적 합의에 이른 전환은 현재 무속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연구에서 더 이상 강신무·세습무 이분법을 절대적 전제로 삼지 않게 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지역적 맥락과 무속 신앙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연구 관점을 전환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다른 인문학 분야와 비교했을 때 어떤 특수성을 지닐까? 다음 장에서는 본 사례를 토대로, 한국 인문학 내 다른 분야와의 비교 분석을 시도한다.

Ⅴ. 다른 인문학 분야와의 비교: 왜 무속학계만 조용한 전환이 가능했나?

무속학계에서 강신무·세습무 이원론의 붕괴가 일어난 시기와 방식은 다른 인문학 분야와 뚜렷이 대비된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학문 분야에서 지배적 이론이나 분류 체계가 변화할 때에는 상당한 시간에 걸친 세대 교체나 격렬한 논쟁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무속학계의 경우, 비교적 단기간 내 학계 내부의 합의에 가까운 변화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도 학술지와 학술대회라는 전문 공동체의 장에서 조용하고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본 절에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무속학계와 다른 인문학 분야를 비교 분석한다.

1. 학술장의 규모와 세대 역학

무속학은 한국 인문학계 내에서도 비교적 작은 학술장에 속한다. 전문 연구자가 수적으로 많지 않고, 한국무속학회와 같은 전문 학회 중심으로 연구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규모의 작음은 오히려 의견 합의의 용이성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비록 패러다임 전환 논쟁에 불을 붙인 이용범의 연구가 한국종교학회의 《종교연구》에서 발표되기는 하였으나, 곧 한국무속학회를 중심으로 논의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앞서 살핀 대로, 한국무속학회는 2003~2004년에 걸쳐 강신무·세습무 논제를 임원회 차원에서 기획하여 세 차례의 공동연구 발표회를 개최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며 점진적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는 규모가 큰 학술장에서는 이루기 힘든 신속하고도 조직적인 대응이라 하겠다. 반면 역사학이나 국문학 같은 분야는 학자 수가 훨씬 많고 학파·계보도 다양하여, 하나의 통설에 이견이 생길 경우 학회 단위에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다. 예컨대 한국 역사학계에서 2000년대 중후반 벌어진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보면, 전통적 민족주의 사학과 새로운 관점을 지닌 일군의 학자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 논쟁은 학술대회와 학회지뿐 아니라 대중 매체와 사회 담론으로까지 확산되어 공개적 충돌 양상을 띠었고, 결국 지금까지도 단일한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긴 어렵다. 이러한 차이는 해당 학술장의 세대 구성 및 권력 구조에서도 기인한다. 국사학계의 경우 원로 학자들이 학계 의사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신진 세력의 도전이 있을 때 즉각적 변화를 허용하기보다는 오랜 논변과 검증 과정을 거치려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무속학계에서는 1990년대까지 권위자였던 1세대 연구자들(예: 김태곤(1996년 사망), 최길성(2000년대 부터는 위안부 문제를 주로 연구했으며, 2022년 사망) 등)이 2000년대에 접어들며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작고한 상태였고, 중견·신진 학자들이 비교적 자율적 담론 형성의 공간을 얻고 있었다. 실제로 강신무·세습무 논쟁에 적극 참여한 인물들은 모두 그 시점에 젊은 연구자(서울대, 경희대, 목포대 등에서 강사나 신진 박사)들이거나 해외 유학파 등이었다. 이들이 기성 권위에 대한 지나친 부담 없이 학회장에서 평등하게 토론할 수 있었던 분위기 자체가 조용한 패러다임 전환을 가능케 한 토양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연구 방법론과 증거의 성격

무속학계의 패러다임 전환은 경험적 증거와 다학제적 방법론의 힘에 크게 의존했다. 즉 현장 민족지 자료, 구술 사례, 역사 문헌 분석, 이론비판 등 다양한 증거와 방법이 총동원되면서 기존 개념의 허구성이 설득력 있게 폭로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세습 무당도 신내림굿을 한다”거나 “강신무당도 조상 대대의 무업을 말한다”는 경험적 관찰은 그 자체로 강신무=비세습, 세습무=비강신이라는 명제를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러한 직접적인 반증 사례는 논쟁의 추상성을 낮추고 학계 구성원들에게 문제의 실상을 납득시키는 역할을 했다. 반면 다른 인문 분야의 패러다임 논쟁에서는 증거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모호하거나 해석 여지가 큰 경우가 많다. 예컨대 문학 연구에서 문학사 시대 구분을 둘러싼 논의나, 국어학에서 계통 분류에 관한 논쟁은 주로 기존 연구의 재해석, 개념 정의의 재검토 등 이론적 주장 대 주장의 형태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우 각 진영이 동일한 텍스트나 자료를 두고도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합의 형성이 어려워진다. 이에 비해 무속학계 논쟁에서는 새로운 1차 자료의 발굴(현장조사 결과 등)이 논의의 전환점마다 제시되었고, 이는 학자들로 하여금 기존 이론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또한 방법론 측면에서, 무속학계 신진들은 인류학적 이론과 기존 민속학의 접목을 통해 논의를 심화시켰다. 김동규의 연구에서 보이듯, 엘리아데 이론에 대한 인류학계의 비판담론을 끌어와 한국 무속 연구의 패러다임을 성찰한 것은 전통 민속학 방법론만으로는 나오기 어려운 관점이었다. 이러한 이론 수혈과 전환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 점도 무속학계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역사학이나 문학연구 분야에서는 새로운 이론 도입(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 사학, 탈식민주의 문학이론 등)에 대한 거부감이나 검증주의적 태도가 오래 지속되어 왔다. 이는 해당 분야 패러다임의 변화를 더디게 하거나 논쟁적으로 만드는 한 요인이다. 예컨대 국문학계에서 1990년대 이후 서구 문학이론(구조주의, 해체주의 등)을 수용하는 문제를 두고, 전통적 실증 연구 진영과 신진 이론 진영 간에 지속적인 견해 차이가 존재했으며 이는 한동안 명확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처럼 방법론적 분화가 뚜렷한 분야에서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공존하거나 충돌하면서도 결정적 우위를 얻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무속학계 논쟁은 공통의 문제의식(강신무·세습무 개념의 타당성) 하에 여러 방법론이 협력적으로 활용되었고, 결국 문제 해결 방향에 대해 상대적 컨센서스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는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공유한 현실 인식의 급박함과, 논쟁을 생산적으로 이끌고자 한 학회 차원의 조율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3. 외부 환경 요인

앞서 이론적 배경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정책적 환경도 패러다임 전환의 양상에 영향을 미친다. 무속학계 사례의 시점(2000년대 초중반)은 마침 한국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재조명과 지원이 활발해지던 때와 겹친다. 특히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담론의 확산은, 샤머니즘을 국가 문화유산의 맥락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무속은 일부 학자들에게 민족문화의 정수로 칭송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 일반에서는 미신으로 배척되는 이중적 위상에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 무속 의례(굿)가 예술공연이나 관광 자원으로 소개되고, 세습무들이 주관하는 지역 축제가 정부 지원을 받는 등, 무속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비교적 호의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학계 내부에서도 세습무 전통에 대한 평가의 재고를 촉진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세습무당이 거행하는 굿인 영남 지역의 「동해안 별신굿」, 호남의 「진도씻김굿」 등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계승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과거 학자들이 “퇴화된 샤머니즘”으로 치부했던, 혹은 사이비 사제, 돌팔이 무당이라 보거나, 긍정적으로 보아도 사제로서의 기능만 남은 무당의 잔재거나 전통 예술의 박제 정도라고 생각했던 세습 굿의 문화적 가치가 재인식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신무만이 진정한 샤먼이라는 은연 중의 가치판단을 재고하고, 세습무도 한국 샤머니즘의 중요한 한 축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는 강신무·세습무 이분적 위계에 대한 비판 담론이 학계에서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토양을 제공했다. 반면 다른 인문학 분야에서 외부 요인은 때로 패러다임 전환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한국사학계의 경우,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 외부 집단이 역사서술의 방향에 개입하여 특정 패러다임(예: 식민지 근대화 담론)을 둘러싼 논쟁을 이념 대립으로 비화시킨 사례가 있다. 이러한 경우 학계 내부에서 차분히 이루어져야 할 증거와 논리의 검토가 흐려지고 진영 논리가 강화되어, 오히려 합의 형성이 요원해질 수 있다. 무속학계 논쟁은 다행히도 일반 대중에게까지 큰 쟁점으로 비화하지 않았다. 어쩌면 입무 방식에 따른 구분이 애시당초 현실 세계의 무속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해당 논쟁은 주로 전문가 공동체 내부의 토론으로 머물렀고, 학술적 논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조용한 전환”을 가능케 한 환경적 요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4. 분류 패러다임 자체의 성격(“두께”)

마지막으로, 전환의 용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도전 대상인 패러다임 자체의 성격과 ‘두께’ 이다. 여기서 ‘두께’란 해당 패러다임이 지식체계와 담론 전반에 어느 정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강신무·세습무 분류론은 비록 30여 년간 학계 정설로 기능해왔으나, 그것이 예컨대 한국사의 정통 해석이나 국문학의 정전 체계만큼 사회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강신무·세습무 구분은 학술 전문 영역 바깥에서는 비교적 얕은 지식으로 존재했다. 일반인들에게 “무당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다”는 정도의 상식은 있었을지언정, 그것이 사회적 정체성과 결부되거나 교육 교과에 깊이 각인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학계 내부에서도 이 개념은 주로 설명 편의상 사용되는 기술적 범주였지, 이를 둘러싸고 거대한 이론 체계나 이념이 구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전 세대의 대표적인 연구자였던 최길성은 민족주의가 무속 연구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지하며 경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신무·세습무 패러다임은 그 두께가 비교적 얇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들이 그 한계를 지적하고 보완을 제안할 때,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 심리적·이념적 저항이 적었다. 앞서 이용범도 강조했듯 “강신무·세습무 개념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곧 그 개념의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였고, 기존 연구자들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이는 논쟁을 협력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이다.

반면, 다른 인문학 분야에서의 지배적 패러다임들은 종종 학문장 뿐 아니라 국가·사회 차원에서 두텁게 형성된 담론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국 고고학계의 오랜 패러다임이었던 “단일 민족 기원론” 은 학술적 가설임과 동시에 근대 국가 형성과 결부된 서사적 담론이었다. 따라서 이를 둘러싼 새로운 가설(복수 기원론 등)이 제기될 때 단순한 학술 논쟁을 넘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러한 두꺼운 담론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변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논쟁의 진통을 수반한다. 국어학 분야에서의 계통 논쟁(예: 알타이설 vs. 비알타이설)도 유사하게, 학술을 넘어 민족 정체성과 학문의 권위가 걸린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무속학계의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은 상대적으로 국지적이고 제한된 범위의 패러다임이었기에 유연하게 수정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비교를 종합하면, 무속학계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이 유독 빠르고 조용하게 이루어진 것은 내부적 요인(작은 학술장의 신속한 합의, 다양한 증거의 제시와 방법론 통합, 젊은 연구자들의 주도)과 외부적 요인(전통문화 재평가 흐름, 논쟁의 사회적 비확산, 패러다임의 얕은 두께)이 두루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분야에서는 쉽게 충족되기 어려운 조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사례는 인문학 지식 패러다임도 변화 가능하며, 그 변화는 비단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의식적 성찰과 공동의 노력을 통해 촉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비교 분석을 토대로 본 연구의 함의를 논의한다.

Ⅵ. 논의 및 함의

앞 절의 비교를 통해 도출한 관찰점들을 기반으로, 본 장에서는 한국 인문학 내 패러다임 전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종합적으로 논의한다.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붕괴 사례는 몇 가지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첫째, 인문학 분야에서도 비교적 단기간에 지배적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인문학의 패러다임은 과학처럼 혁명적으로 바뀌기 어렵다”는 통념에 도전하는 결과이다. 무속학계의 사례에서 보듯, 적절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증거 기반의 설득력 있는 대안이 제시되며 학술 공동체의 소통 구조가 원활하면, 이전까지 정설로 굳어졌던 틀도 비교적 신속히 수정될 수 있다. 이는 인문학 지식을 정체된 축적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담론으로 볼 때 얻어지는 관점이다. 특히 연구자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학회와 같은 집단 지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무속학회가 보여준 기획력과 조정 능력은 다른 인문학 학회들도 참고할 만하다. 예를 들어 국문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용되었던 시대구분 체계나 장르 구분 등에 대한 재검토 작업을 학회 차원에서 조직한다면, 새 관점의 도입과 합의 형성이 보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패러다임 전환은 방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의도적 기획과 합의 형성의 메커니즘을 통해 촉진될 수 있다. 이는 본 연구 사례가 한국 인문학계 전체에 주는 긍정적 시사점이다.

둘째,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서는 “증거”와 “맥락” 두 측면에서의 설득이 모두 필요하다. 무속학계 신진 연구자들이 성공적으로 통설을 흔들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여 기존 이론의 허점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통설이 형성된 역사적·이론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해체하였기 때문이다. 이용범, 홍태한 등이 제시한 현장 사례들은 증거적 설득력을 발휘했고, 김동규, 양종승 등이 펼친 개념사·연구사 분석은 기존 패러다임을 상대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는 인문학 담론 전환에 있어 다층적 접근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단순히 새로운 사실이나 자료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패러다임 자체를 흔들기 어려울 수 있다. 반대로 추상적 이론 비판만으로는 실천적 설득력이 부족하다. 자료와 맥락의 이중 검증이 병행될 때 학술 공동체는 비로소 기존 개념틀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다른 분야에서도 이러한 전략은 유효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역사학의 경우, 새로운 사료의 발굴(증거)과 함께 기존 해석 틀이 형성된 시대적 담론(맥락)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 병행될 때 더 근본적인 서술의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인문학 연구자가 사료 분석가이자 비판적 이론가로서 이중의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시사한다.

셋째, 학문장의 세대 교체와 개방성이 패러다임 전환을 좌우한다. 무속학계 사례에서 보듯, 새 패러다임은 주로 신진 연구자층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유롭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해당 학문장이 비교적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문학 발전에 있어 세대교체의 원활한 이행이 중요함을 재확인시킨다. 때로 한 분야의 지배적 담론이 오랜 기간 견고히 유지되는 이유는,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이 발언권을 얻지 못하거나 기득권 구조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러다임 전환의 가능성을 높이려면, 학회 운영이나 연구비 지원 등에 있어 신진 연구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통로를 마련하고, 기존 권위자들도 유연한 태도로 새로운 주장을 경청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무속학계 선배 연구자들의 경우, 2000년대의 논쟁에서 직접적 반박이나 수세적 태도를 보이지 않고 대화의 장을 열어둔 채로 후속세대의 논의를 수용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세대 간 소통은 다른 분야에도 필요한 덕목이다. 물론 분야마다 상황이 다르고, 기존 연구자들이 축적한 지식의 가치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학문적 권위는 결코 패러다임 전환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점을 본 사례는 일깨운다.

넷째, 인문학 연구의 외부적 지원 및 사회적 인식 변화는 패러다임 전환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2000년대 초 한국 사회의 전통문화 재조명 분위기, BK21 등을 통한 인문학 지원(money)은 무속학계의 새로운 연구를 간접적으로나마 후원한 셈이 되었다. 이는 인문학 진흥 정책이 단순히 연구자 수 증가나 논문 편수 증가에 그치지 않고, 질적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나 대학 차원의 지원이 젊은 연구자들의 국제학술 교류나 학제 간 협력 연구에 쓰일 때, 기존에 정체되어 있던 담론에도 새 숨을 불어넣을 수 있다. 또한 대중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무속을 부정시하지 않고 문화로 바라보는 시각 등)는 학자들이 해당 연구를 더욱 자긍심을 갖고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는 향후 다른 인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오래된 문학 정전(正典)을 재구성하거나 국사 교과서 서술을 바꾸는 일은 학계 내부 노력만큼이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문학자들은 학문 대중화와 소통을 통해 새로운 연구 성과의 의의를 사회에 설명하고 지지를 얻는 일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 사례에서 무속학자들이 대중적 논란 없이 학술 담론을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도 해당 주제가 이념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만큼 사회 일반의 관심이 크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앞으로 무속학계의 새로운 관점들이 대중 문화 담론이나 교육에까지 반영되려면, 학계의 지식 전달 노력이 추가로 요구될 것이다. 이는 패러다임 전환 이후 새 패러다임의 확산과 정착 단계에 해당하며, 인문학 지식의 사회적 구현 측면이다.

다섯째, 패러다임 전환의 궁극적 목표는 보다 포괄적이고 유연한 이론 체계의 구축에 있다. 무속학계 사례에서 연구자들은 단순히 기존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유형론의 정립을 지향했다. 이는 패러다임 전환을 “부정의 과정” 이 아닌 “창조의 과정” 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준다. 실제로 허용호 등은 강신무·세습무 대신 다층적 분류 체계를 고민하는 작업을 제안했다. 이렇듯 한 번의 논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제 연구에서 적용하고 다듬는 후속 연구들이 연이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패러다임 전환이란 기존에 간과되었던 현상에 주목하고, 새로운 개념틀을 짜는 지속적 탐구라는 점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마찬가지로 새 이론의 모색과 검증이라는 도전이 뒤따를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자들은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동시에, 변화 이후의 과제를 꾸준히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본 연구 사례의 논의는 자기반성적 학문으로서 인문학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고정불변의 진리보다는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하는 유연한 이론을 추구하고, 필요하면 스스로의 전제를 성찰하여 개조할 수 있는 태도가 인문학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일 것이다.

Ⅶ. 결론

본 연구는 2000년대 초중반 한국 무속학계에서 진행된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붕괴 과정을 사례로, 한국 인문학 분야에서 패러다임 전환의 가능성과 조건을 메타적으로 분석하였다. 서론에서 문제 의식을 제기한 바와 같이, 강신무·세습무 이분법은 한때 학계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개념이었으나, 신진 연구자들의 비판적 고찰과 공동체적 논의를 통해 비교적 신속하고 평화롭게 수정·보완되었다.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신무·세습무 패러다임 전환은 이용범, 홍태한, 이경엽, 김동규, 허용호 등 신진 연구자들의 주도 아래, 경험적 증거의 제시와 이론적 성찰이 결합되어 이루어졌다. 이들은 무속 현장의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기존 이분법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아울러 해당 이분법이 근대 학술사에서 형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통설의 권위를 상대화하였다. 둘째, 이러한 지식 전환은 학회 차원의 체계적 공론화 노력에 힘입어 원만히 진행되었다. 한국무속학회는 2003~2004년 3회에 걸친 공동연구 발표회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수렴하고 합의를 도출해 냈다. 그 결과 학계 내부에서 강신무·세습무 구분의 문제점에 대한 이해가 공유되었고, 새로운 연구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셋째, 무속학계만의 이러한 “빠른 전환”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작은 학술장의 개방성과 유연성, 다양한 방법론을 포괄하는 학제적 전통, 전통문화 재평가라는 사회적 흐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역사학이나 문학연구 등 거대 담론 분야와 비교되는 점으로서, 다른 분야에서는 패러다임 전환이 더딘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학술장 규모가 크고 세대간 권력격차가 큰 분야, 또는 지배적 이론이 사회적·이념적 담론과 두텁게 연계된 분야에서는 새로운 관점이 나와도 단기간에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본 연구는 몇 가지 메타적 결론을 제시한다. 한국 인문학 분야에서 패러다임 전환은 가능하며 필요하다. 지식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산물인 만큼, 학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패러다임을 성찰하고 필요시 그것을 넘어서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는 단순히 혁신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연구 대상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위해 학문 스스로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무속학계 사례에서 연구자들은 한국 무속의 현실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기술하기 위해 기존 개념틀을 스스로 수정하였다. 그 결과 강신무·세습무라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분법 대신, 한국 무속을 다층적 스펙트럼 위에서 이해하는 관점이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패러다임 전환은 지식의 정교화와 고도화를 위한 과정으로 기능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 무속학계와 같은 방식의 전환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 학문의 전통과 맥락이 다르고, 변화의 장애 요인도 상이하다. 그러나 학술 공동체의 노력과 대화, 증거에 기반한 설득, 외부와의 소통이라는 요소는 어느 분야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조건일 것이다. 본 연구는 작은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의 사례를 통해, 한국 인문학 전반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인문학이 과거의 권위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질문과 증거에 열려 있을 때, 비로소 현대 사회에서 그 지적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는 비전이다. 강신무·세습무 유형론의 해체 과정은 이러한 인문학의 자기혁신 가능성을 잘 보여준 사례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앞으로도 인문학 각 분야에서 건강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이 꾸준히 생성되길 기대한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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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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