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뫼, 시간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함평 제동 고분의 다층적 경관과 기억의 재구성
별뫼, 시간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함평 제동 고분의 다층적 경관과 기억의 재구성
2025.07.14.에 올린 글을 보완했습니다.
초록
이 글은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에 위치한 제동 고분(일명 ‘별뫼’ 또는 ‘천문단)이 단일한 고대 유적을 넘어 여러 시대의 기억이 층층이 축적된 다층적 문화 경관임을 조명한다. 고고학·역사학·민속학·기억연구 등 학제적 접근을 통해, 이 봉토분의 물리적 형태와 ‘별’이라는 상징이 삼한 시대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근현대까지 각 시대의 필요에 따라 어떻게 재해석되고 전승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제동 고분이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단절된 역사를 잇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억의 장소’ 로 기능해왔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모리스 알박스의 집합기억 이론과 피에르 노라의 기억의 장소 개념을 이론적 틀로 삼아, 하나의 공간에 겹쳐진 시간의 흔적들을 팔림프세스트 로 해석하며, 별뫼가 어떻게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의미의 층위를 덧입으면서도 그 원형적 상징(‘하늘과 ‘별’)을 잃지 않았는지 고찰한다. 나아가 이러한 고찰은 문화유산 보존에 있어 물리적 형태뿐 아니라 그에 담긴 다층적 서사의 보존과 해석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I. 서론: 별뫼에 서서, 시간을 묻다
해 질 녘 함평 엄다 평야의 완만한 구릉 별뫼(星山) 의 정상에 올라서면, 시간의 흐름이 다른 밀도로 느껴지는 듯하다. 발아래 1,700년 전 마한인의 숨결이 깃든 고분이 잠들어 있고, 눈앞으로 함평천을 따라 펼쳐진 황금 들녘과 저무는 해가 장관을 이룬다. 이 고요하면서도 장엄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경외감에 사로잡혀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이 땅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이러한 개인적 체험은 곧 학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하나의 장소가 이토록 여러 시대의 이야기를 품고, 기억의 층위를 겹겹이 쌓아 올릴 수 있었는가? 이 잊힌 무덤은 단순한 고고학적 대상을 넘어,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기억이 교차하는 ‘폐허의 미학(Ruin Aesthetics)’을 체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본 연구의 목적은 함평 제동 고분이 단순한 고고학적 유구를 넘어, 삼한 시대 마한(馬韓) 소국 지배자의 무덤, 조선 시대 유학자의 천문 관측지, 그리고 근현대 민속 신앙의 성지로서 기능해온 과정을 밝히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고분 발굴조사보고서와 같은 고고학 자료, 조선시대 지리지 및 문집 등의 역사자료, 그리고 구술 채록 등 민속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또한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의 집합기억 이론과 피에르 노라(Pierre Nora)의 기억의 장소(lieu de mémoire) 개념을 이론적 틀로 삼아, 별뫼가 단절된 역사들을 잇는 상징적 기억의 앵커(anchor) 로 기능해왔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집합 기억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며 선택적으로 구성된다는 알박스의 지적과, “이제 더 이상 살아있는 기억 환경(milieux de mémoire)이 없기에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가 필요하다” 는 노라의 통찰은, 오랜 세월 잊혀졌다 다시 소환된 별뫼의 역사를 해석하는 유용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II. 제1층위: 고대의 권력과 천문 – 마한 지배자의 무덤
제동 고분의 첫 번째 층위는 서기 3~4세기경 마한(馬韓)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4년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하나의 봉분 아래에 두 기의 옹관(甕棺) 이 매장된 구조가 확인되었다. 두 옹관은 지면에 대해 ‘ㄱ’자 형태로 배치된 합구식(合口式) 이중 분묘였다. 합구식 분묘는 영산강 유역 마한 사회 최상위 지배층 고분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고대 영산강 유역의 무덤은 오늘날의 공동묘지처럼 하나의 큰 봉토 아래 여러 시신을 함께 안치하는 다장(多葬) 관습이 있었으며, 한 봉분에 함께 묻힌 이들은 혈연 등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집단으로 추정된다. 특히 영산강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대형 옹관(독널) 의 존재와, 한 무덤 안의 복수 관 배치는 마한 사회의 가족적 또는 계층적 결속과 권력 구조를 잘 보여준다. 다만 ‘ㄱ’자형 배치는 희귀한 사례로서, 지역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인 동일 장축 병렬 배치와는 달랐다.
주목할 만한 출토 유물로는 1호 옹관의 바닥에서 발견된 청동 거울이 있다. 청동 거울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 태양과 천상의 상징이자, 지배자의 신성한 권위를 나타내는 위신재(威信財) 로 기능했다. 거울의 존재는 이 무덤의 피장자가 단순한 촌장이 아닌 제사장적 권능을 지닌 군장이었음을 시사한다. 실제 고대 사회에서 권력자는 자신의 무덤에 일월(日月)과 하늘을 상징하는 물품을 부장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천명하곤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한반도 청동기 시대부터 권력자의 묘는 지역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언덕 위에 축조되고, 그 내부에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 무기나 거울 등을 함께 묻는 관행이 확인된다. 제동 고분도 바로 그러한 지형적·상징적 고려 속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전형적인 남성 지배자의 무덤에서 흔히 출퇴되는 철기·마구 등의 부장품 없이, 오로지 청동 거울만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유물이 청동 거울만 남아있던 이유는 1940년경의 도굴 사건 때문일 수도 있으나, 이때의 도굴 대상은 천문단 유물이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당시 사람들은 고분의 존재를 전혀 몰랐고, 1986년 고성정씨 문중에서 천문단 터를 정비할 때 옹관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이곳이 방대형 고분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무기 대신 거울만 부장된 옹관 사례는 영산강권 여성 피장자에게서 여러 번 확인되었다. 비록 제동 고분 피매장자의 유전자 감식은 산성 토양으로 인하여 인골이 완전히 부식되어 앞으로도 어려울 것으로 보이나, 최근 DNA 연구 결과는 영산강 옹관 사회가 모계 중심 친족 구조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한편 제동 고분은 북쪽에 위치한 함평의 여러 고분군, 그리고 남쪽의 나주 반남 고분군에 비하여 그 고분의 규모가 확연히 작으면서도 밀집된 고분군을 이루고 있지 않으며, 인근 지역에서 생활 유적지와 방어 시설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의 일반적인 청동기 유적과는 다른 제동 고분의 독특한 점이다.
고분의 입지 또한 의도된 선택의 결과물이다. 별뫼 구릉 정상에 서면 북동쪽으로는 함평천 유역의 드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남서쪽으로는 더 높은 산줄기가 시야를 막는다. 이는 외부 세력을 경계하는 방어적 조망보다는, 자신들의 지배 영역인 농경지와 취락지, 그리고 당시 영산강을 지나 바다로 이어지는 뱃길이었을 함평천 유역을 굽어보며 통치권을 과시하려는 시각적 연출에 가깝다. 다시 말해, 무덤의 주인은 자신이 지배하는 땅을 향해 열려 있는 방향에 묘를 두고 영원한 감시자처럼 군림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단 2개의 옹관만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들의 지배권은 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동 고분 축조 세력은 여러 마한 소국 중 하나로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 했다.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마한 소국의 이합집산이 격렬하던 3~4세기, 이 지역은 북쪽의 함평 지역 소국과 남쪽의 나주 지역 소국 사이에서 일종의 분쟁지였으나, 일출과 별의 운행을 다루며 농경 사회에 필수적인 역법(曆法) 과 제의를 관장했던 인물, 즉 하늘의 권위를 땅에서 실현한 여성 제사장의 등장으로 짧은 평화를 이루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제동 고분의 가장 깊은 층위에는 “하늘의 권위를 등에 업은 마한 지배자의 무덤” 이라는 기억이 새겨졌다.
III. 제2층위: 유교적 질서의 재편 – 조선 학자의 천문단(天文壇)
마한의 기억이 역사 속에 묻힌 지 천 년 남짓 흐른 후, 제동 고분은 한동안 잊힌 망각의 언덕으로 남아 있었다. 비록 마한 시대의 구체적인 기억은 사라졌지만, 별뫼의 풍광과 거대한 봉분 자체가 주는 위압감과 신성함은 정체불명의 “별뫼” 라는 이름과 “말무덤” 이라는 전설로 남아 민간에 구전되었다. 그러던 16세기 조선 중엽, 이 무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호남 사림의 거두인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이다.
정개청은 1570년대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평 엄다 제동 마을에 은거하였다. 그는 이 봉분 정상에 흙을 다져 ‘천문단(天文壇)’, 즉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단을 쌓고 제자들과 함께 천체의 운행과 성리학을 강론했다고 전한다. 사방이 탁 트인 별뫼의 지형은 천문 관측에 이상적인 입지였다. 정개청은 이곳 천문단에서 밤에 천기를 관찰하여 주민들로 하여금 재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존재하던 봉긋한 고분은 하늘에 가까이 다가서는 제단(祭壇)의 상징성을 부여하기에도 충분했다. 정개청은 무명의 잊혀진 옛 무덤을 유교적 합리성과 과학적 탐구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이 장소의 성격은 일변했다. ‘죽은 자의 공간’ 에서 ‘지식과 교화의 공간’ 으로 재편된 것이다.
정개청이 별뫼를 천문 관측지로 선택한 데에는, 이곳이 함평천 유역과 서해로 향하는 길목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시야를 확보한 위치였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전에 따르면 별뫼의 천문대는 왜구의 잦은 침입을 예의주시하는 역할도 하였다 한다. 이는 곧 천문단이 단순한 학문 연구소를 넘어, 관측소라는 실용적인 역할도 겸하였음을 뜻한다. 정개청과 같은 조선의 사대부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념 아래, 하늘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수기)과 국가를 방비하는 현실 정치(치인)를 분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즉 지식의 공간이자 군사적 관측소로서 별뫼는 다시 한 번 그 기능을 달리한 채 지역사 속에 등장한 것이다.
정개청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1616년(광해군 8) 별뫼 봉분 아래에 자산서원(紫山書院) 이 창건되었다. 자산서원은 곤재 정개청과 그의 동생을 배향한 서원으로, 이후 서인·남인 간 당쟁 속에서 훼철과 복설을 거듭하다가도 지역 유림들에 의해 끝내 보존되었다. 별뫼는 서원의 주산(主山)으로 인식되어 직접 훼손되지 않고 자연 지형의 일부로서 존중받았다. 고분의 봉분 자체도 정개청의 천문대로서 보존되었다. 이는 옛 무덤이 후대 권력에 의해 파괴되거나 개장(改葬)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다. 요컨대 조선 시대 별뫼의 두 번째 층위는, 유학자에 의해 ‘하늘을 관찰하는 제단’으로 격상된 장소라는 새로운 기억으로 덧씌워진 셈이다.
IV. 제3층위: 민속 신앙의 잔향 – ‘별뫼’에 서린 밤별굿
조선 선비들이 별뫼에 부여한 “천문(天文)”의 이미지는 이후 민중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민속 신앙을 낳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별뫼는 공식 지명으로도 자리잡는다. 18세기 지도인 《해동지도》에 이미 한자 지명 성산(星山) 이 표기되고, 19세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한글 병기 명칭 별뫼가 함께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명 별뫼는 한자로 ‘星山’이라 표기되며, 말 그대로 “별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단순한 행정 지명이 아니라, 이 장소에 깃든 기억의 핵심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별뫼의 지명 유래에 대한 별도의 전승도 존재한다. 별뫼 마을의 구전에 따르면 지명 ‘별뫼’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성산의 서남쪽 기슭에 파평윤씨 22세손 윤제(尹濟)가 정개청의 가르침을 받고자 무안에서 이주해 와 이곳에 정착했다. 윤제는 이곳 서편의 산세가 별 같다하여 별뫼(성산)라 한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역시 구전에 의하면 윤제의 이주 전에도 이 마을에는 김씨, 황씨 등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를 답사한 내가 보기에 마을 서편(별뫼의 서편)에서는 별을 연상시키는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성산 윤씨(지역 사람들은 번창한 이들 가문을 흔히 성산 윤씨라 부른다)들은 마을의 모든 지명이 입향조(入鄕祖) 윤제에게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을 이름 유래에 대한 위 구전은 마을에 세거지를 이룬 성산 윤씨의 입향조를 기리기 위한 설화 일 가능성이 높다. ‘천문단’이라는 역사적 사실과의 강력한 연관성으로 볼 때, 별뫼(성산)이라는 지명은 윤제의 이주 이전부터 존재했던 지역의 집합 기억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하늘의 별과 교감하던 공간으로서 별뫼의 위상을 지명 자체에 각인시킨 것이다.
별에 얽힌 기억은 20세기 초까지도 지역 민속 의례로 살아남았다. 20세기만 하더라도 함평 엄다리 일대에서는 정월 대보름 전날 밤 별뫼 봉우리에 올라 “밤별굿” 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북두칠성이 밤하늘 한가운데 높이 뜨는 정월에, 주민들은 별뫼에 올라 별을 향해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불돌이를 벌였다. 별뫼는 여전히 신령스러운 터였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고대 마한의 제천 의식이나 조선 유학자의 천문 관심이 민중의 기복(祈福) 신앙으로 변형·전승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즉 고대의 제의(祭儀) 가 민속의 옷을 입고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비록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이러한 민속 의례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별뫼” 라는 이름 속에는 여전히 밤하늘의 별에 소원을 빌던 옛사람들의 기억이 잔향처럼 남아 있다.
V. 종합 논의: 기억의 팔림프세스트, 제동 고분
지금까지 살펴본 별뫼의 다층적 역사성은 한 장소가 여러 시대의 기억을 어떻게 겹쳐 쌓는지 잘 보여준다. 이는 마치 여러 겹의 글을 지운 흔적 위에 다시 글을 쓰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와도 같다. 겉보기엔 하나의 봉우리일 뿐인 제동 고분 위에는 마한의 권력, 조선의 학문, 근대의 민속이 시간차를 두고 각인되었다. 비록 시대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덧씌워졌으나, “하늘”과 “별”이라는 원형적 상징만큼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각 층위를 관통하는 주제로 남았다. 마치 양피지에 비친 옛 글의 희미한 흔적이 새 글에 영향을 미친 것만 같다. 이러한 현상은 피에르 노라(P. Nora)가 정의한 기억의 장소(lieu de mémoire) 개념과 정확히 부합한다. 노라에 따르면 살아 숨쉬는 기억의 환경(milieux de mémoire)이 사라진 자리마다, 과거를 붙들어두려는 기억의 장소가 등장한다고 한다. 함평 별뫼는 바로 그런 경우이다. 한때는 마한의 지배층이라는 살아있는 기억의 주체가 있었으나 그들이 사라진 뒤, 별뫼 자체가 과거를 증언하는 기호(symbol) 로서 공동체 기억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별뫼의 사례는 인류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지속하는 장소(persistent place)’ 의 한국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가 오랜 세월 반복적으로 이용되는 현상을 퍼시스턴트 플레이스(persistent place) 라 부르며, 그 배경으로 해당 장소의 특별한 자연·문화적 매력을 지적한다. 예컨대 풍부한 식수나 특이한 지형, 혹은 선대의 유산이 깃든 장소는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별뫼의 경우,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탁월성과 하늘과 맞닿은 듯한 상징적 이미지가 결합되어, 각 시대 사람들의 본능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전망이 좋은 높은 곳에 이끌리고, 자신을 넘어서는 거대하고 오래된 존재 앞에서 숭고한 경외감(awe) 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별뫼는 바로 그 본능적 끌림과 의미 추구의 욕구가 수천 년에 걸쳐 반복 투영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이와 유사하게 한 장소에 여러 겹의 시간이 누적된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강화도 참성단은 완전히 잊혀진 적은 없으나, 단군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 알려지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문 관측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민족 기원 신화의 성지로 여겨지며 국가적 행사의 장이 되었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은 원래 모든 신들을 위한 이교 사원으로 세워졌으나 7세기 이후 기독교 성당으로 재헌정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아일랜드의 신석기시대 고분 뉴그레인지(Newgrange) 는 한때 잊혔다가, 후대 켈트족의 전설 속에서 요정과 영웅의 신비로운 탄생지로 새롭게 의미부여 되었다. 이들 사례에서 보듯, 시대와 용도는 달라져도 장소의 지속성은 유지되며, 매 시대 사람들은 과거의 흔적 위에 자기 시대의 이야기를 덧붙여왔다. 함평 엄다리 별뫼 역시 이러한 기억의 팔림프세스트 위에서 한국적 공동체 기억을 축적해 온 셈이다.
VI. 결론: 잊히지 않는 언덕, 별뫼
전라남도 함평의 제동 고분, 일명 별뫼는 더 이상 하나의 시대에 속한 유적이라 보기 어렵다. 그곳은 마한 지배자의 권위, 조선 학자의 이성, 민중의 염원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살아있는 역사 지층이다. 본 연구는 고고학·역사·민속의 경계를 넘어 이 다층적 경관의 형성과 변용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하나의 장소가 어떻게 기억을 매개하고 공동체 정체성을 형성하는지 규명하고자 했다. 그 결과 별뫼는 마을의 무덤에서 하늘의 제단으로, 다시 민속의 성역으로 끊임없는 재해석과 재사용을 거치며 지역 사회의 기억적 동심원 역할을 해왔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그 정체가 드러난 이 순간, 별뫼는 인간의 의도와 시간의 풍화가 빚어낸 ‘폐허의 미학’ 을 온전히 체현하게 되었다. 폐허가 과거의 완전한 부재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과거를 상상하게 하는 강력한 매개체이듯, 봉분 위로 잔풀과 바람, 노을빛이 뒤섞이는 별뫼의 풍광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별뫼 제동 고분의 사례는 우리가 문화유산을 보존함에 있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봉토의 물리적 원형만이 아니다. 그 안에 켜켜이 쌓인 다층적인 이야기, 곧 시간의 팔림프세스트 자체를 보존하고 후대에 해석해 전달하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 작은 언덕 별뫼는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고, 개인의 실존적 물음과 공동체의 집합 기억이 만나는 소중한 장소이다. 앞으로 이 유산을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토양의 미세 유물 분석, 문헌에 남지 않은 구술 전승의 추가 발굴 등 다각도의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천 년 넘게 잊혔다 다시금 말없이 서 있는 별뫼는, 오늘도 저무는 하늘 아래서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말없이 그러나 가장 깊은 목소리로 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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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24년 제동 고분 발굴 조사, 현대의 지방지(함평군지, 함평 마을유래지), 조선 시대의 사료와 지도, 저자의 현장 답사(2000년대 이래 매년) 및 개인적인 구술 증언 채록(2000년대 이래 매년) 등을 종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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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Halbwachs, On Collective Memory. Halbwachs는 개인의 기억이 철저히 사회적 틀 속에서 구성됨을 주장하며, 집합기억이 선택적이고 가변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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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Nora, 〈Between Memory and History: Les Lieux de Mémoire〉, Representations, No. 26 (1989). 노라는 살아있는 기억 공동체의 소멸과 함께 lieux de mémoire, 즉 기념비적 기억의 장소들이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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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나주박물관 상설전시 자료 . 영산강 유역 마한 고분문화의 특징으로 하나의 봉토 아래 여러 옹관을 매장하는 방식과 대형 옹관(독널)의 사용이 소개되어 있다. 제동 고분의 구조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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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동 고분 발굴 조사에서의 Ⅷ층 훼손층이 이 사건의 흔적으로 보인다. 도굴 사건은 구전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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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부장품으로 청동 거울의 출토, 영산강 인근 옹관묘에서의 모계 사회 흔적, 무기 출토의 부재, 방어 시설 및 생활 유적이 부재한 고립된 위치, 고분군을 이루지 못 했다는 점만으로 ‘여성 제사장 시대의 짧은 평화’라는 서사적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특히 제동 고분 북쪽의 함평 지역 고분군에서 무기가 출토된 점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기록과 유물의 부재 사이에 과감한 추론을 시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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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동 고분에서 내려다 보이는 엄다 평야는 한 때 함평천과 영산강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하중도였다. 조선과 일제 시대를 이어 진행 된 치수 개간 사업으로 엄다 평야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엄다면 곳곳에 현재까지도 산포해 있는 고인돌 유적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는 제동 고분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춘천 중도 유적에서처럼 엄다 평야가 과거의 주거지였고, 현재 엄다 평야에 가득한 논 아래에는 청동기 시대의 생활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오랜 개간으로 인하여 대부분 훼손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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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별뫼와 정개청의 “천문단” 관련 기록은 함평 지역향토지와 함평타임즈 기사 등을 통해 전해진다. 예컨대 함평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이 고분은 인근에서 ‘말무덤’으로 불리다가, 곤재 정개청 선생이 하늘 이치를 탐구한 자리라 하여 “천문단”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는 조선시대 유림에 의해 별뫼가 학문적·국방적 거점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정개청 본인의 저술에 천문 관측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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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가 인용한 대부분의 구술 증언은 ‘함평군 마을유래지(1989)’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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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천문단이 왜구 침입에 대한 관측소 역할을 했다는 구전은 다소 모호하다. 함평 천문단의 건립 시점을 1570년대로 본다면, 이곳에서 정개청이 직접 관측할 수 있는 왜구 침입 사건은 없다. 그의 생전에 왜구가 등장하는 사건은 정해왜변(1587년) 뿐이나, 이 시점에 정개청은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관직이었기에 지금의 서울시 후암동 인근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왜구 관측의 주체는 정개청 본인 보다는 인근 주민이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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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뫼의 입지로 보아 전망대로서의 역할은 천문대 건립 전후 어느 시점에서든 가능하다. 앞서 논한 것처럼 함평 천문단이 왜구 관측소의 역할을 했다는 구전은 왜곡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관측소로서의 기원은 멀리 마한 시대의 도적 혹은 고려 말 왜구에서 비롯했고, 훗날 상세한 기원은 망각된 채 이곳에 천문단과 서원이라는 물질적 족적을 남긴 정개청에게 그 기원을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와 무관하게 단수히 후대에 부여된 기능적 의미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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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지리에 도통했던 정개청이 제동 고분의 정체를 몰랐을 리가 없다는 지역 주민의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정개청은 개간으로 인한 훼손 혹은 도굴로부터 제동 고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분의 사면 벽을 돌로 쌓고, 고분 바로 위에 천문단을 세웠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유학자가 무덤 위에 기꺼이 천문단을 세웠으리라는 주장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쩌면 정개청이 천문단을 세우던 시점에서도 지역 주민에게 제동 고분 혹은 별뫼는 여전히 일출과 별의 운행을 살피는 신령스러운 장소라 여겨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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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군사(2010)에 기록된 인근 제동 마을의 구전에 따르면, ‘전’이라는 물고기가 이곳 별뫼에 살고 있다고 한다. “전이란 머리는 용이고 꼬리는 잉어인 물고기를 뜻한다. 마을 뒷동산에 서원골이 있는데 현재 생존자 중 이 고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이 전은 이곳에 두 마리가 살았는데 한 마리는 곤재 정개청이 잡아먹고 남은 한 마리가 현재까지 이곳에 있다고 한다.” 이 전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개청이 이곳에 있던 무속신앙(어쩌면 마한 시절부터 이어져왔을)과 대치하여 그 영향력을 흡수했다고 넘겨 짚어도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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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지명을 입향지명으로 해석하고자 한 별뫼 마을의 입향조 설화 역시 별뫼의 잊혀진 옛 기억에 지역 주민 나름의 해석을 더했다는 면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별뫼의 입향지명설은 이곳 인근의 지명으로 월산(月山), 성암(星岩)이 있음을 고려할 때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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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뫼 정월 밤별굿은 구술 증언에서는 ‘불돌이’라 불렸다. 굳이 ‘밤별굿’이라 이름한 이유는 해당 풍습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본고의 자의적인 명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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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뫼가 바라 보이는 곳에서 평생을 보내신 나의 할아버지께 직접 별뫼에서의 정월 밤별굿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별뫼 정월 밤별굿이 멀리 마한 시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면 낭만적이겠으나, 구전에 의하면 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인 번동 마을의 개창 시기는 700년 전 고려 시대라고 한다. 역시 구전에 의하면 번동 마을의 본래 이름은 본골(本洞)으로, 인근 여러 마을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었기에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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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팔림프세스트를 핵심 메타포로 사용하지만, 단순한 덮어쓰기로 논의를 국한시키지 않으려 한다. 이전 층위의 기억이 미미하게나마 살아남아 다음 층위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변형시키는 현상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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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d Lepper, “Persistent Places,” Ohio Archaeology Blog (2012). 고고학적 관점에서 한 장소가 세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활용되는 현상을 설명한 글로, 별뫼와 같은 사례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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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heon의 용도 변천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로마 시 당국의 안내판 및 관련 연구들에 상세히 나와 있다. 609년 교황 보니파키오 4세에 의해 판테온이 성 마리아 성당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1400여 년간 기독교 예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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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grange의 신화화에 대해서는 켈트 민속(Celtic folklore) 자료에서 확인된다. 신석기 거석묘인 뉴그레인지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중세 아일랜드 신화에서 신족(神族)인 ‘투어허 데 다넌(Tuatha Dé Danann)’의 신성한 공간이자, 신들의 왕 다그다(The Dagda)가 잠든 곳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는 선사시대 유적이 후대 문화의 상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은 대표적 사례이다.
참고 문헌
- 제동 고분 발굴 기사
- 함평군마을유래지발간위원회, [함평 마을유래지], 함평군, 1989
- 함평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지], 함평군, 2010
- 해동지도
- 대동여지도
이 글은 ChatGPT와 Gemini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OD
202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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