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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점쟁이에 대한 연구: 이동성과 공간의 문화사

서론

한국 사회에서 떠돌이 점쟁이 - 곧 정주하지 않고 떠돌며 점복(占卜)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 - 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매우 드문 편이다. 무속신앙이나 역술 전반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특정히 이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점쟁이 집단에 주목한 사례는 거의 없다. 일례로 무속인을 대상으로 한 민속학·인류학 연구는 풍부한 반면, 길거리에서 점을 보고 다니는 유랑 역술인들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미미하였다. 이러한 연구 공백에도 불구하고, 떠돌이 점쟁이는 역사적으로 서민 생활 속에 깊숙이 존재해온 독특한 사회문화 현상이다. 본 논문은 한국 역사 속 떠돌이 점쟁이들의 실태와 변천을 살펴보아, 이들의 이동성, 공간적 특성, 제도 외적 생업으로서의 성격,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의 통제와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점술 문화의 주변부에 존재했던 이 직업 집단이 한국 사회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조명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시대별 사례를 발굴하여 다각도로 분석한다. 조선 후기 풍속화에 등장하는 길거리 점복 장면부터, 일제시기와 한국전쟁 전후의 기록, 근대 국가의 미신 단속 정책, 그리고 오늘날(2025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거리 점술인의 존재를 추적하였다. 특히 김홍도의 풍속화첩 속 그림 「점괘」(일명 시주(施主))[1],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의 1900년대 초 조선의 판수(判數) 묘사[2], 1950년대 부산 영도대교 점바치골목의 형성과 같은 사례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들 사례는 1차 사료(당대의 그림·사진·기록) 부터 2차 사료(후대 연구와 해석) 에 걸쳐 다양하며, 자료의 성격(1차/2차/3차)과 증거로서의 강도를 함께 평가한다. 연구 전반에 걸쳐 이동(예컨대 장시(場市)를 따라 이동하거나 유랑하는 모습)과 공간(시전(市廛)이나 다리 밑, 역 앞 등 점술 행위가 이루어진 장소)의 측면을 교차 분석하고, 그 생업이 공식 제도권 밖에서 어떻게 자생하거나 억압되었는지도 논의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2025년 직접 확인한 현대 점술 노점의 실태를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논의를 제시한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한국사의 떠돌이 점쟁이 현상이 단순한 미신 행위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민중의 욕구 속에서 발생하고 소멸을 거듭한 역동적인 문화사의 일부임을 밝히고자 한다. 본 논문은 서론에 이어 개념 정의, 연구사 검토, 자료와 방법, 역사 개관, 사례 연구, 직접 조사 결과, 논의, 결론의 순서로 전개된다.

개념 정의

‘떠돌이 점쟁이’ 란 말 그대로 정해진 거처나 점방(占房)이 없이 떠돌아다니며 점을 보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에는 길거리나 장터에서 노점(露店) 형태로 점괘를 봐주는 행위자가 포함된다.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명칭이 존재해왔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쓰인다.

  • 점쟁이: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전문적으로 점을 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소 구어적이고 때때로 경멸적인 뉘앙스를 띤다. 전문 분야에 따라 사주쟁이(四柱爭移), 관상쟁이(觀相爭移) 등으로 세분되기도 한다.
  • 판수(判數): 조선 말기부터 근대 초에 쓰인 용어로, 한자 그대로는 “수를 판단하는 자” 즉 운명을 판단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헐버트는 판수를 “맹인 남자로 구탄(驅邪)과 점복을 업으로 삼는 이”라고 설명했는데[2], 이는 당시 남성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역술과 푸닥거리를 생계로 삼았음을 시사한다. 판수는 여성 무당(巫堂)과 대비되는 남성 점술인을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 점바치: 주로 속어 또는 방언으로서, 부산 등지에서 점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바치’가 접미되어 다소 천시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예컨대 부산 영도다리 밑 ‘점바치 골목’ 은 유명한 떠돌이 점술인 밀집지였다[3]. 여기서 ‘점바치’는 떠돌이 점쟁이들을 일컬은 호칭이다.
  • 복술가(卜術家), 역술인(易術人): 비교적 현대에 와서 점쟁이를 지칭하는 완곡한 표현이다. 특히 역술인은 점술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 대한 공식적 호칭으로 사용되곤 한다. 1960년대 후반 서울 후암동에 형성된 이른바 ‘복술가촌’ 은 역술인들이 몰려 살며 영업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4].
  • 무당과의 구분: 무당은 신내림을 받아 굿을 행하는 주술적 종교인의 성격이 강하며, 대개 한 지역을 기반으로 신당(神堂)을 꾸리고 활동하거나 고객의 요청에 따라 굿을 하기 위해 이동한다. 반면 떠돌이 점쟁이는 굿이나 신탁보다는 사주풀이, 관상, 점괘 풀이 등을 통해 개인의 운세를 봐주는 역할에 집중하며, 상대적으로 의례(儀禮)의 규모나 종교성은 약하다. 물론 현실에서는 무당이 길거리에서 간단한 점을 봐주거나, 떠돌이 점장이가 굿을 주선하는 등 두 범주가 겹치기도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신앙적 매개자로서의 무당보다는 길거리 역술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점쟁이에 중점을 둔다.

이상의 용어 정의를 통해, 논문에서 말하는 떠돌이 점쟁이는 정착된 점집 없이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며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점을 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흔히 시장 터나 길목, 다리 근처, 역 주변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에 자리를 펴고 즉석에서 운세 상담을 해주는 형태를 띤다. 시기에 따라 중이 행각(行脚)하며 점을 보는 경우도 있고[1], 맹인이 방울을 흔들며 동냥겸 점을 치는 모습도 있었으며, 현대처럼 도심 거리의 포장천막이나 노점에서 타로 카드를 펼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동성과 비제도성이다. 곧 일정한 영업장소나 자격 면허 없이, 사람들의 신앙심과 호기심을 자본으로 삼아 공간을 유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정리하면, 떠돌이 점쟁이는 한 지역에 정주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장소를 옮겨 다니며 점을 보는 역술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이하의 장에서 이들의 역사적 실태와 사회문화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연구사 검토

앞서 언급했듯, 떠돌이 점쟁이 자체를 직접 연구 대상으로 삼은 선행연구는 드물다. 그러나 관련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문헌들은 존재하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연구 동향과 공백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한국 무속과 미신에 대한 연구사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부터 미신 타파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무당과 점쟁이에 대한 기록이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미신에 관해 조사하면서 점복 행위를 단속 대상으로 삼았으나, 이러한 행정 기록은 주로 식민권력의 시각에 국한되어 있다[5][6]. 해방 이후 1950년대~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부 차원의 미신타파운동이 이어졌고, 언론 기사와 경찰 보고서에 거리의 점술업자 통계나 단속 사례 등이 등장한다[7]. 그러나 이들 자료는 학술연구라기보다 정책자료 내지 보도자료의 성격이 강하다. 예컨대 1950년대 중반 “전국에 8천여 명의 미신 행위 업자가 있다”는 보도[8]나, 1960년대 후반 서울 후암동의 복술가촌에 기업형 점집 23곳이 성업 중이었다는 신문 보도[4] 등은 사료로서 흥미롭지만, 분석적 연구의 결과물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민속학·인류학 분야에서는 무속과 점복을 한국 전통문화의 일부로 간주하여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다. 다만 그 초점은 대개 굿의 기능, 무당의 사회적 역할, 신앙적 측면 등에 맞춰져 있으며, 점괘풀이 자체나 점쟁이의 생활사보다는 의례적·종교적 의미를 중시하였다. 예컨대 이남희(1990)의 무속신앙 연구나 김태곤(1981)의 한국점복문화 연구 등은 점치는 행위 전반을 다루지만, 떠돌이 생활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이런 연구들 속에서 점쟁이는 종종 무속의 하위 범주로 취급되거나, 정주한 철학관 운영자와 구분 없이 다뤄지기도 했다.

해외 연구자들의 기록으로 시선을 돌리면, 헐버트(H.B. Hulbert), 언더우드(H.G. Underwood) 등의 19~20세기 초 조선 풍속 기록에 점쟁이에 관한 묘사가 등장한다. 헐버트는 1903년 『Korea Review』에서 조선의 무속과 역술을 다루며 판수(p’an-su) 에 대해 상세히 적었는데, 판수는 “맹인 남성으로 푸닥거리(구마)와 점복을 업으로 삼는다”고 하여[2], 당시 시각장애인 점술인의 존재와 그들이 떠돌며 굿과 점을 행했던 현실을 전해준다. 이러한 외국인 기록은 1차 자료로서 가치가 높지만, 그 관찰이 단편적이라 전체상을 조망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외국인들이 유랑 점술인을 exotic하게 묘사하는 경향도 있어서, 그 사회경제적 맥락에 대한 분석은 부족하다.

한편, 지역사 연구도시민속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떠돌이 점쟁이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김경아(2022)는 1950년대 부산 영도대교 아래에 형성된 ‘점바치골목’ 을 분석하였다[3]. 이 연구는 한국전쟁기 부산 피난민 사회에서 점쟁이들이 밀집하게 된 현상을 공간의 장소성대중의 욕망 측면에서 조명한 것이다. 영도다리의 점바치골목은 당시 대중가요 가사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했고, 전쟁 직후 불안한 피난민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삶의 돌파구를 제공했던 공간으로 해석된다. 김경아의 연구는 떠돌이 점쟁이 집단에 초점을 맞춘 드문 사례로서, 본 논문에서도 그 성과를 참고하였다. 다만 이 역시 특정 지역과 시기에 한정된 사례연구이므로, 보다 장기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서의 연구가 추가로 필요하다.

요컨대, 떠돌이 점쟁이 자체를 조망한 선행연구는 부족하며, 관련된 정보들은 무속 연구, 민속학 자료, 역사 기록, 지역연구 등에 산재해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 지식들을 한데 모으고 종합함으로써, 비로소 떠돌이 점쟁이를 독립된 연구 주제로 부각시키고자 한다. 기존 연구들은 주로 미신 단속과 사회사적 맥락(정책사, 언론자료) 또는 문화기술적 묘사(민속기록)에 머무른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반해 본 논문은 다분야의 사료를 교차 분석하여, 떠돌이 점쟁이 현상의 구조적 의미를 해명하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특히 점쟁이의 이동 경로, 공간 선택 요인, 생계 전략, 그리고 권력에 의한 통제라는 네 가지 축을 따라 기존 자료들을 재해석함으로써, 앞으로의 후속 연구에 토대가 될 만한 거시적 서사를 제시하고자 한다.

자료와 방법

자료: 본 연구는 문헌 사료와 시각 자료, 구술·현지 조사를 포괄하는 다각적인 자료를 활용하였다. 우선 역사 문헌과 기록으로는 조선 후기 실록 및 일기류에 보이는 미신 관련 기사, 일제강점기의 행정문서와 신문, 해방 이후 정부의 보도자료와 신문 기사 등이 있다. 예컨대 1950년대 신문에 보도된 미신타파 주간의 단속 기사[7]나 1970년대 초 남산 주변 점집 철거 기사(매일경제 1972.8.17자) 등이 그런 자료다. 이러한 1차 자료들은 해당 시기의 공식 담론현상 파악을 위해 인용되었다.

시각 자료로는 회화와 사진을 적극 활용하였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작품 《단원풍속도첩》 중 <점괘>[1]는 당시 거리에서 중이 점을 치는 모습을 담은 생생한 1차 시각자료이다. 또 국가기록원과 언론사 사진자료에서 찾아낸 장날 점술 광경 사진, 유엔 사진자료에 남아있는 1950년대 시장 통의 노점 점쟁이 사진, 미군 종군기자가 1952년 촬영한 다리 위의 점쟁이 사진 등도 수집하였다. 다만 일부 사진은 열람 제한이 있어, 그 캡션(description) 을 통해 정보만 인용하였다. 예컨대 유엔 사진 아카이브는 “수원 장터 거리에서 한 나이 든 한국인 점쟁이가 알록달록 장식된 참고서들을 들춰보는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어[9], 이를 통해 당시 장터 점쟁이의 형상을 유추하였다.

문헌 연구 자료로는 국문/영문 단행본, 논문, 학위논문 등에서 점복 문화미신 풍속을 다룬 부분을 참고하였다. 특히 헐버트의 영문 저술(『The Korea Review』 1903년판)과 이즈음 RAS 등 외국인 기록은 조선 말의 판수 및 무당 활동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였다. 현대의 학술논문 중에서는 앞서 소개한 김경아(2022)의 연구[3], 그리고 미신타파운동의 역사를 다룬 신자토(2019) 등의 연구를 검토하였다. 또한 민속학자들의 저서, 이를테면 이윤석(2006)의 무당 연구나 최준식(1988)의 한국인의 운명관 연구 등에서 점복에 대한 사회인식 변화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2차 문헌들은 대부분 떠돌이 점쟁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니므로, 필요 부분의 정보를 발췌하여 맥락 설명에 활용하는 수준에 그쳤다.

구술 및 현장 조사: 현장 조사는 제한적으로 수행되었다. 2025년 현재 서울과 부산 일부 지역의 거리 역술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필자는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역 인근의 이른바 ‘타로 거리’ 와 종로구 일부 노점 밀집 지역을 답사하였다. 또한 2023년~2025년 사이 언론 보도를 통해 현대 거리 역술인의 동향을 파악하였는데, 예컨대 문화일보 2025년 9월 24일자 보도는 건대앞 타로거리 노점을 철거하는 과정과 논란을 상세히 전한다. 이를 통해 현대 떠돌이 점쟁이의 생태와 행정 대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구술 면담의 경우, 코로나 팬데믹 등의 영향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하였고 문헌조사 및 관찰 위주로 진행되었다.

방법: 자료 분석은 질적 해석에 기반하였다. 우선 각 자료의 사료성(史料性) 을 검토하여 1차/2차/3차 자료로 분류하고, 증거로서의 신뢰도한계를 평가하였다. 예를 들어 김홍도의 <점괘> 그림은 그 자체로 18세기 현실을 반영한 1차 자료이지만, 화가의 주관적 표현이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논의한다. 헐버트의 기술은 외부인의 관찰로서 비교적 객관성이 있으나 조선인 내부 시각이 아니므로 한계가 있다. 신문기사는 당시 상황을 기록하지만, 선정적 표현이나 이념적 의도가 개입될 수 있음을 유의하였다. 이러한 고려를 통해 각 증거의 강도를 “강함”, “보통”, “약함” 등으로 판단하여 해석에 반영하였다. (증거 평가의 요약은 부록의 표1 참조.)

또한 교차 검증(cross-checking) 을 중요한 방법론으로 삼았다. 서로 다른 유형의 자료들이 지칭하는 현상이 일치할 경우 해당 사실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았다. 예컨대 1950년대 영도다리 밑 점바치 존재는 당시 가요 가사, 신문 보도, 현대 연구논문에 모두 언급되어 그 실재를 확실히 뒷받침한다[3]. 반면 특정 일화가 한 종류 자료에만 등장하면,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보다 당시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교차 분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인식을 함께 조명할 수 있었다.

연구의 진행은 시대순 접근과 주제별 접근을 병행하였다. 역사 개관 부분에서는 조선후기부터 현대까지 떠돌이 점쟁이의 추이를 큰 흐름 속에서 개괄한다. 이어서 사례 연구 부분에서는 중요한 장면별로 초점을 좁혀, 각 사례를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심층 분석하였다. 이후 논의 부분에서 이러한 사례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종합하고, 앞서 제시한 이동성, 공간성, 제도 밖 생업, 통제 정책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해석을 시도하였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연구 결과를 요약하고, 학술적 의의와 한계를 밝혔다.

이상의 자료와 방법을 바탕으로, 다음 장부터 본격적인 분석을 전개한다.

역사 개관: 한국의 떠돌이 점쟁이 변천사

한국사 속에서 떠돌이 점쟁이는 시대에 따라 그 양상과 사회적 위상이 변화하였다. 여기서는 조선시대 후기에 포착되는 사례로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해방 후 근대화 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거시적 흐름을 개관한다. 특히 이들의 이동 형태와 공간적 분포, 그리고 국가·사회와의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조선 후기: 장터와 떠돌이 승려 점복

조선은 유교 이념을 국교로 삼았으나, 민간에서는 무속과 점복이 뿌리깊게 행해졌다. 국가적으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속에 불교 승려들의 입경이 금지되었고, 유사 이래로 점복 행위는 권장되지 않는 미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시장 통례민속 행사 때 점을 보는 이들이 등장하곤 했다. 조선 후기의 기록과 그림을 보면 이러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김홍도(金弘道) 의 풍속화 <점괘(占卦)>이다[1]. 이 작품(18세기 후반 추정)에는 시주(施主)를 바라는 떠돌이 중 두 사람이 길바닥에 점괘 그림판을 펼쳐 놓고 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목탁과 꽹과리(광쇠) 를 두드리고 있으며, 그림판 위에는 여러 개의 점괘패가 놓여 있다. 한편 옆에는 장옷을 쓴 아낙네가 미소를 띠고 돈을 꺼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1]. 바닥에는 이미 동전(엽전) 몇 닢이 놓여 있는데, 이는 여러 사람이 점을 보고 시주한 흔적으로 보인다. 여인의 표정으로 미루어 아마도 길흉화복을 좋게 점쳐 준 듯하다. 이 그림은 세부 묘사가 생생하여, 당대에 승려들이 민간에 내려와 점복 행위를 했음을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는 불교 승려들이 암암리에 도성이나 장시(場市)에 출입하며, 경전 대신 미륵불 손글씨나 점괘패 등으로 점을 치고 시주를 받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1]. 김홍도의 그림은 그런 광경을 직접 목격해 그린 것으로 평가되며, 떠돌이 점쟁이의 초창기 형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종교인 신분을 가장하여 활동했으므로 공식적 기록엔 드물게 등장하나, 그림과 야담 등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흔적으로, 조선시대 시장 통판(通判) 관련 기록에 “장시에는 항상 책과 죽간으로 점보는 맹인이 한 구석에 있다“는 취지의 언급이 나타난다. 시각장애인들이 점복과 안마로 생계를 잇는 관습은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에 있었는데, 조선에서도 맹인 점복인이 장시를 전전(轉轉)하며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에서는 일정한 맹인 단체(경사계 등)를 통해 이들을 관리하려 했으나, 떠돌이 판수들은 지방 장터를 옮겨 다니며 점을 봐주고 약간의 돈이나 쌀을 받는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등에 의하면, 촌락 장터에 장님 광대점쟁이가 끼어들어 민심을 현혹한다는 식의 비판이 있어, 이는 곧 떠돌이 점쟁이의 존재를 역으로 가리킨다.

요컨대 조선 후기에는 중 또는 맹인 등 사회 주변인이 점복을 업으로 삼아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포착된다. 그 활동 무대는 주로 장날의 시전(市廛)이나 길거리였으며, 관청의 묵인 아래 혹은 눈을 피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떠돌이 점쟁이는 민중 오락 겸 신앙의 한 요소로 자리했고, 엄격한 유교 사회의 틈새에서 비제도권 종교 행위로 존속하였다.

2) 일제강점기: 단속과 변용

1910년대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미신단속의 일환으로 점복업을 관리하거나 금지하는 시도를 하였다. 1910년대 총독부 경무국 문서에 “음양점(陰陽占)을 업으로 삼는 자 단속” 등의 지시가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 당국의 관점은 미신 풍속을 근절한다기보다 치안 유지와 세원 확보에 있었다. 즉, 무허가 역술행위를 하면 처벌하지만, 정 필요하면 허가제를 통해 세금을 물리는 양면 정책을 폈다. 1920~30년대에 이르러, 도시에는 정식 허가를 받은 점술관(일종의 철학관)이 생겼지만, 떠돌이 점쟁이들은 여전히 음성적으로 존재했다. 이들은 허가세를 낼 형편도 아니었고, 경찰의 눈을 피해 유랑 행상처럼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외국인과 지식인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모습이 있다. 1920년대 방문한 한 서양인 여행자는 “서울 종로통에 맹인 점술가들이 길가에 앉아 대나무 죽간을 탁자처럼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린다”는 식으로 묘사했다는 전언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점쟁이와 무당의 구분이 애매해져, 관청에서는 모두 “미신업자”로 뭉뚱그려 취급했다. 1930년대 신문에 “점복 보러다니는 자제요(子弟요), 민심을 현혹함은 물론 가산 탕진케 하니 단속을 엄이(嚴宜)할지라” 같은 투의 기사가 실린 바 있는데, 이는 당시 떠돌이 점쟁이가 가족의 재산까지 탕진시킨다는 부정적 통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 담론에도 불구하고, 경제 공황과 사회 불안이 깊어지면서 운명을 점치려는 수요는 오히려 늘었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역술인 수천 명이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허가 없이 길거리에서 영업했다고 한다. 이는 일제가 통계를 통해 미신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한 자료였으나, 역으로 보면 떠돌이 점쟁이가 그만큼 흔했다는 의미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총력전 체제에서는 노골적인 미신 탄압이 이루어졌다. 1940년대 초 조선총독부령으로 일체의 무속·점복 영업이 금지되었고, 수많은 점술인이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떠돌이 점쟁이들이 밀행(密行)하거나 아예 숨어 지내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가 물러간 후, 이들은 다시금 활동을 재개했다. 해방 직후 1945~48년 과도기에는 사회질서 혼란 속에 각종 역술 활동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미군정도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결국 일제강점기는 떠돌이 점쟁이가 공권력의 탄압과 잠복을 경험한 시기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은 시기로 볼 수 있다.

3) 전후 혼란기(1950년대): 점바치 골목의 형성

1950년대는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을 겪으면서, 떠돌이 점쟁이들의 전성기와 단속이 교차한 시기였다. 전쟁 기간에 수도 서울을 떠나 남하한 피난민들이 모여든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절망과 불안 속에 점술을 찾는 사람이 폭증하였다. 이때 부산 영도대교 주변이 대표적인 예인데, 영도다리 밑에 자연발생적으로 점쟁이 촌락, 일명 ‘점바치골목’이 조성되었다[3]. 피난민으로 생활 터전을 잃은 역술인들이 다리 아래 빈터에 판잣집이나 돗자리 등을 펴고 줄지어 영업을 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전문 역술인도 있었지만, 일부는 생계에 몰린 일반인이 손쉽게 돈벌이를 찾다 진입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영도다리 주변에 가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운세를 보려 몰려들었다”는 증언이 있고, 이러한 분위기가 대중가요에도 반영되었다. 1956년 발표된 유명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후렴에 “영도다리 난간마다 점치는 아낙네” 운운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전쟁 직후 영도다리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공간이자 점복의 메카였음을 보여준다. 김경아(2022)의 연구는 이 현상을 전쟁 트라우마 속 민중의 심리적 욕구 분출로 해석한다 - 즉 “다리라는 공간적 비(比)와 점괘라는 시간적 비(非)가 만나 운명 바꾸기를 꿈꾸던 장소”라는 것이다.

한편, 전쟁 직후 혼란을 수습한 정부는 1950년대 중반부터 미신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6·25 종전 후 사회가 안정을 찾자마자, 1953년 9월 경찰은 “미신타파 강조 주간“을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점쟁이와 사주쟁이 수천 명을 일제 단속하였다[7]. 당시 신문에 따르면 “전후 불안 심리가 팽배하고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탓에, 도심에도 좌판을 펴놓은 점쟁이들이 즐비했다”고 한다[7]. 즉 서울 등 도시 거리에도 떠돌이 점쟁이가 넘쳐났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들을 무더기 검거하였으나, 처벌은 경범죄 처벌법 정도로 비교적 가벼웠다. 다만 단속 의도는 분명했다. 1950년대 정부는 사회 정화근대화 의지를 내세워, 점복 행위를 퇴폐풍조로 규정하고자 했다[10]. 그러나 역설적으로 높은 수요 때문에 단속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1950년대 신문 기사에는 “점을 보고 나서 비관 자살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보도될 만큼, 서민들이 점괘에 깊이 의존했다고 전한다[11]. 이는 한편으로 미신 폐해를 강조하는 담론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점을 찾는 사람이 많았음을 시사한다.

결국 1950년대 말까지 떠돌이 점쟁이는 전쟁 피난기에는 폭증하고 정화기에는 단속되는 부침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정착의 길을 걷기도 했다. 예컨대 부산 영도다리 점바치골목의 점쟁이들 중 전쟁 후 부산에 눌러앉아, 이후 국가의 미신 단속이 심해지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철학관을 연 경우도 있었다. 반면 서울 등지에서는 1950년대 말 점술인들이 후암동이나 남산 자락 등에 집단촌을 형성하여 당국의 눈을 피해 영업하다가, 1960년대 들어 표면화되기도 했다[4]. 이를테면 1960년대 후반 후암동 일대에 50여 명의 복술가가 활동하며 사실상 역술 시장을 이루었는데, 이는 떠돌이에서 반정착 형태로 옮아간 사례라 할 수 있다.

4) 산업화 시기(1960~70년대): 음지와 양지의 사이

1960~70년대는 대한민국 정부의 근대화·산업화 정책과 맞물려, 사회문화 전반에서 미신 타파 운동이 강력히 추진된 시기이다[5].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운동(1970년대 초)을 진행하며 전근대적 미신 행위를 근절하고 과학정신을 보급하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당산나무나 서낭당 철거, 무당·점쟁이 색출 등이 일어났다[12][6]. 새마을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굿당을 허무는가 하면, 경찰이 야간에 집에서 굿이나 점치는 소리가 들리면 경범죄법으로 검거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6].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떠돌이 점쟁이는 더욱 지하화되었다. 거리에서 대놓고 점을 보다가는 “삼반분자”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시대였기에, 많은 역술인이 은신하거나 변장하여 활동했다. 가령 1970년대 서울 남산 순환도로 부근에는 수십 개의 점집 가두 노점이 있었는데, 시 당국은 이를 도시미관 저해를 명분으로 철거하였다[13]. 당시 매일경제 기사(1972.8.17)는 “남산 도로가에 즐비한 점집들 철거”라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는데[14], 이 사례에서 보듯 점쟁이들은 아예 포장마차 식의 간이 점방을 거리변에 세워놓고 영업하다 쫓겨나곤 했다.

하지만 1960~70년대의 역설은, 한편으로는 정부가 미신 척결을 외치면서도 정치권과 경제인들이 은밀히 점술에 의존했다는 점이다[15]. 실제로 1960년대 후반 서울에는 유명한 철학관들이 생겨나 고위층 인사들을 상대했다. 떠돌이 출신 역술인이 성공하여 개인 비서까지 둔 기업형 점쟁이로 변모한 경우도 있었다[4]. 1967년 보도에 따르면 월 수입 50만 원(현재가 약 5천만 원 상당)에 달하는 역술인이 20여 명 있었다고 하니[4], 이는 단속의 칼날이 미치지 않는 양지에서 번성한 점술업의 일면이다. 이들은 주로 건물 안에 사무실 겸 점방을 차리고 활동했기 때문에 더 이상 “떠돌이”라고 부르긴 어려웠지만, 법적 제도권 밖이라는 점에서는 연속선상에 있다. 한편, 이 시기에도 완전히 떠돌며 노상에서 영업하는 이들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났고, 도시보다는 농촌 장날이나 산간 지역 등지에서 활동하거나, 또는 밤에 몰래 다니며 신용 있는 집을 찾아가 방문 운세풀이를 해주는 식으로 변신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유신 말기의 사회통제가 극심해지면서 거리의 무당·점쟁이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1977년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아예 “사회정화위원회” 가 설치되어 모든 반사회적 행위를 일소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16]. 이 범주에 점쟁이, 무당, 맞춤법 미준수자(?) 까지 포함될 정도로 광범위한 대상이 설정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70년대의 마지막 무렵, 사회 저변에는 새로운 변화의 조짐도 나타났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 1980년대 초 신군부 집권기가 오기 전까지 잠시 과도한 억압의 완화가 있었다. 이 시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서양식 점술(타로, 손금 등) 이 소개되고, 도시의 뒷골목에서 은밀히 점술카페 같은 것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곧 다룰 1980년대 사례에서 보겠지만, 이는 떠돌이 점쟁이의 새로운 변태(變態) 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리하면, 산업화 고도기인 1960~70년대에 떠돌이 점쟁이들은 극심한 사회 통제의 압박 아래 숨죽였으나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고, 일부는 지하화, 일부는 합법적 가면을 쓴 채 실내로 이동하는 등 양분화되었다. 이는 이후 1980년대의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

5) 현대(1980년대 이후): 명멸하는 거리의 점술사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은 삼청교육대 등 강압적 수단을 통해 사회정화를 추진했다[17]. 삼청교육대에 수용된 이들 중에는 깡패, 부랑인뿐 아니라 일부 무당·점쟁이도 포함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떠돌이 점쟁이 = 사회악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더욱 강도 높은 탄압이 가해졌다. 실제로 1980년대 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는 “사회악 일소” 명분으로 3만여 명을 일거에 검거했는데[18], 여기에는 무허가 역술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폭압 정책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거리의 역술인은 지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듯 보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지하로 숨었을 뿐이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바람이 불자, 곧장 점술 수요가 다시 드러났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등 사회 개방의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대중 문화 현상이 표면화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점술에 대한 관심의 재부상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로 젊은이들 사이에 “토정비결” 책자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거리에는 이를 간이 판매하며 즉석에서 운세를 봐주는 노점이 슬며시 등장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는 전반적으로 규제가 완화되고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역술인에 대한 시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아예 역술을 “생활의 지혜”로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타로카드 점 등 서양 점술이 젊은 층 취미로 유행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떠돌이 점쟁이들이 다시금 도시의 특정 공간에 모여 영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건대입구역 인근의 “타로 거리” 이다. 이 거리는 1990년대 말부터 건대 앞 유흥가 주변에 사주나 타로를 보는 노점들이 집결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몇몇 역술인이 길모퉁이에 소규모 천막을 치고 손님을 받았는데, 용하다 소문나면 학생들과 젊은 직장인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TV 예능 등에 출연한 스타 점술인의 영향으로 운세를 보려는 긴 줄이 생기자, 그 주변으로 길거리 음식 노점과 점집 천막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과밀 현상이 벌어졌다. 이처럼 현대 도심에서는 상업지구 일부가 점차 역술 노점 밀집지로 변모하는 양상이 보였다. 건대 타로거리는 그 전형으로, 한때 70여 개에 달하는 노점들이 인도를 빼곡히 차지하기도 했다[19][20]. 이는 과거의 떠돌이 점쟁이와 동일선상에 있는 현상으로 평가된다. 비록 이들은 한 동네에 몰려 있기에 겉보기에는 “떠돌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점포 없이 공공장소에 임시 가설물을 지어 영업한다는 점에서 제도권 밖의 떠돌이와 다름없다. 더욱이 구청 등의 단속이 심해지면 순식간에 흩어졌다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등 유동성을 유지한다는 면에서도 연속성이 있다.

한편 현대의 떠돌이 점쟁이들은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지역 축제나 관광지에서 이동식 점술 부스를 운영하기도 하고, 점집 트럭이나 캠핑차 개조를 통해 전국을 돌며 손님을 받는 신종도 등장했다. 또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는 온라인 점술방이 성행하면서, 길거리 점쟁이들의 입지가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주요 도시의 역술 노점이 상당수 사라지거나 실내 카페형 태도로 변환하였다. 그러나 2020년대에 이르러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MZ세대의 새로운 관심사로 타로점 등이 부각되면서, 다시 거리 점술의 부활 조짐이 보인다. 2023년 기준으로, 서울 홍대 앞 예술시장이나 종로 젊음의 거리 등지에서도 종종 거리 운세 상담사를 목격할 수 있었다 (필자 관찰). 이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심리적 안식처로서 점술이 여전히 기능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요약하면, 현대에 들어 떠돌이 점쟁이는 공식 경제·문화 시스템의 주변부를 맴돌며 생멸을 반복했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기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가, 민주화 이후 상당 기간 부활했으며, 다시 온라인화 등으로 주춤하는 듯 보이다가 최근에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는 등 계속된 변용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본 논문의 논의 부분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사례 연구

앞 장의 거시적 개관을 바탕으로, 이 절에서는 주요 사례 몇 가지를 발췌하여 심층 분석한다. 각 사례는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을 대표하며, 떠돌이 점쟁이의 모습과 사회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선정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조선 후기의 떠돌이 승려 점괘 (김홍도 <점괘>), (2) 개화기 판수(判數)의 생활상 (헐버트의 기록), (3) 1950년대 부산 영도다리 점바치 골목, (4) 1970년대 서울 남산 주변 역술 노점의 흥망, 그리고 (5) 현대 건대 타로거리의 형성과 갈등. 각 사례는 사료의 종류맥락이 달라 독립된 논리로 전개되지만, 전체적으로는 떠돌이 점쟁이의 이동-공간-생업-통제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각 사례에 대해서는 해당 사료의 1차성 여부와 신뢰도를 함께 평가하면서 논지를 전개한다.

사례 1: 김홍도의 풍속화 <점괘> - 조선시대 거리 점복의 단면

김홍도(1745~180?)의 《단원풍속도첩》 중 한 장면인 <점괘> 는 조선후기 서민 생활 속 점복 풍속을 보여주는 대표 그림이다[21]. 이 그림은 앞서 개관 부분에서도 언급했듯, 두 명의 승려가 길바닥에 앉아 점괘를 펼쳐놓고 지나가는 여인에게 점을 봐주는 장면이다[1]. 그림의 세부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인물 배치: 승려 둘은 바닥에 그림판(점괘도를 그린 종이나 천)을 펴놓았다. 한 승려는 목탁을 치고, 다른 이는 꽹과리를 들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 위한 소리 공연으로 해석된다[22]. 주변을 지나는 행인들을 고객으로 유인하는 모습인 것이다. 실제로 그림 속 다른 행인들도 호기심을 보이는 눈치다.
  • 점괘 도구: 그림판 위에는 여러 장의 그림 조각(또는 패)이 나열되어 있다. 이들 각각에 길흉이 적혀 있거나 상징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점괘풀이나 점패로서, 뽑기식 점(제비뽑기와 유사한 운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후기 민간에 유행한 “토정비결” 책자“운수 좋은 그림패” 같은 것이 이와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승려들이 그런 상업적 점복 도구를 이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 고객과 상호작용: 그림의 오른쪽에는 장옷을 각지게 접어 쓴 젊은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한 손에 지갑을 들고, 다른 손으로 거기서 돈(동전)을 꺼내 승려에게 주려 한다[1].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는데, 이는 점괘 결과에 만족하거나 안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혹은 시주 행위를 통해 복을 샀다는 심리적 만족일 수도 있다. 여인의 발치에는 이미 몇 닢의 엽전이 놓여 있어, 그녀보다 앞서 점을 본 사람이 두고 간 돈일 것이다.
  • 사회적 맥락: 승려가 속세에 나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조선 후기 불교의 몰락과 관련된다. 승려들은 산문(山門)을 떠나 방랑하며 불경보다는 민간신앙적 행위(굿, 점복 등)로 생계를 꾸리는 일이 있었다. “걸승(乞僧)”이라고 불린 이들은 시주를 받기 위해 다양한 재주를 부렸는데, 그중 하나가 점보기였다. 김홍도의 그림 제목이 <점괘> 또는 <시주>로 불리는 것도, 점괘를 통해 시주받는 승려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때문이다[23]. 또한 이 그림은 풍속화로서, 서민들의 일상을 익살과 함께 그린 것이므로, 점복 행위도 희화화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 풍속을 그린 것이기에, 사실성 측면에서 1차 자료로 인정된다.

사료 평가: 김홍도의 <점괘>는 1차 시각자료로서 역사적 현상의 한 단면을 증거한다. 증거 강도: 높음. 다만 화가의 구성 의도가 반영되어 있을 수 있고, 과장이나 풍자가 없지 않으므로 이를 당시 점쟁이들의 평균적 모습으로 일반화하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모든 떠돌이 점쟁이가 승려인 것은 아니지만, 그림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해 파계승 캐릭터를 쓴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조선 후기 길거리 점복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주며, 특히 이동하는 승려-점쟁이라는 특수한 유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후대의 기록과 비교하면, 19세기 말~20세기 초에도 전국을 유랑하며 점치는 불량 승려들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고, 일제시대까지도 일부 잔존했다고 하므로, 김홍도 그림의 상황은 연속성 있는 문화현상으로 볼 수 있다.

사례 2: 헐버트의 판수 묘사 - 조선 후기 맹인 점쟁이

호머 B.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한국에 19세기 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이자 저술가로, 조선의 풍속을 다룬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1903년 영문 잡지 『The Korea Review』에 실은 논문에서 조선의 무당과 판수를 비교 설명하였는데, 이 기록은 당시 떠돌이 점쟁이의 직업적 특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2].

헐버트의 기술에 따르면, “mudang(무당) 은 항상 여성이고 그 지위는 천하다. 반면 p’an-su(판수) 를 보면 상황이 사뭇 다르다. 판수는 맹인 남성으로서, 푸닥거리(exorcist)와 점쟁이(fortune-teller)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판수라는 말은 한자 判數에서 왔는데 ‘운수를 판단하는 자’, 즉 점쟁이를 의미한다.”[2] 이러한 서술은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 성별과 신체조건: 판수는 대개 남성 시각장애인이었다. 조선시대에 맹인 남성들은 침술이나 관상, 점복 등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맹인안법(按摩) 등 기술을 익히기도 했지만, 일부는 주술과 점복으로 방향을 틀었다. 헐버트는 판수의 맹인 여부를 분명히 하여, 이것이 당시 일반적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조선 후기 맹인 조직(경무청 관련 맹인계)이 있었고, 거기에 속한 맹인들이 점과 굿을 하러 다녔다는 기록이 다른 문헌에도 나타난다. 이는 떠돌이 점쟁이 중 큰 축이 바로 맹인 남성이었음을 시사한다.
  • 직능: 판수는 exorcist(퇴마사)fortune-teller(점쟁이) 를 겸했다고 한다[2]. 즉, 굿을 통해 악귀를 쫓고 질병이나 화를 막아주는 역할도 했으며, 동시에 점술로 사람들의 미래를 예측해주는 역할도 했다. 이는 무당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무당은 주로 신병(神病)을 겪은 뒤 신내림을 받아 굿을 하는데 비해, 판수는 선천적(혹은 어릴 때 획득한) 맹인 신분으로 학습된 주술을 행사했다. 판수는 굿을 할 때도 무당과 협업하거나 독자적 방식(맹인고사를 지냄)으로 했고, 점을 볼 때는 주역, 사주, 단시(短詩) 등의 지식을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헐버트는 이러한 판수의 복합적 직능을 간명히 짚어준다.
  • 어원과 사회인식: 판수라는 말이 한자로 “운수를 판정하는 사람”이라는 뜻임을 밝혀주었다[24]. 이는 조선 당대인들도 판수를 운수 보는 사람으로 인식했음을 뜻한다. 또한 헐버트는 판수의 사회적 위상이 무당과 달리 어느 정도 남성 집단으로서 체계가 있었다고 암시한다. 실제로 판수들은 보통 스승-제자 관계로 맹인 점복술을 전수받았고, 지역 단위로 떠돌며 활동 영역을 나누거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헐버트의 다른 글에는 판수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굿할 때 일정한 통행 인증을 받기도 했다는 언급이 있는데(예: 맹인청 발행 증서 등), 이는 판수 집단이 일종의 조직화를 보였다는 뜻이다.
  • 사료 평가: 헐버트의 기록은 외부 관찰자의 1차 서술로서 매우 가치가 있다.
  • 증거 강도: 높음. 다만 언어가 영어이고, 그 대상이 되는 조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100%인지 여부는 고려해야 한다. 그의 설명은 비교적 정확하지만, 판수가 항상 맹인 남성이라는 등 일반화에 해당하는 부분은 실제로 일부 예외도 있었을 수 있다. 예컨대 맹인 여성 점쟁이나, 시력이 있는 남성 점쟁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헐버트의 묘사는 다른 사료 (예: 1930년대 조선어 학자 최남선의 설명 등)와도 부합한다. 최남선도 “판수는 맹인이며 점복에 종사한다”고 쓴 바 있어, 교차 검증상 일치한다. 따라서 헐버트의 기록으로 우리는 조선 말기 떠돌이 점쟁이의 전형 - 맹인 남성 판수 -의 실체를 상당 부분 재현할 수 있다.

이 사례를 통해 드러나는 떠돌이 점쟁이의 특성은 전문성의 세습/전승이동 범위의 광범위함이다. 판수들은 특정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필요하면 굿도 하고 점도 보았으니, 당대 민중에게는 “걸인(乞人)+역술인” 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안전망 밖의 직업으로서, 역병이나 재난 시에나 찾는 비상시적 직능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판수들은 조선 후기 떠돌이 점쟁이 계층의 핵심 인물상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일제의 시각장애인 통제정책 등에 따라 사라져갔다.

사례 3: 부산 영도대교 ‘점바치 골목’ - 피난민 시대의 점술촌[3].

역사적 배경: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은 임시수도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수십만의 피난민은 먹고 살기 위한 방도가 막막한 상태였고, 장기화되는 전쟁에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극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운명에 기대려는 심리가 팽배하여, 부산 곳곳에 역술인이 난립하였다. 특히 부산 본토와 영도를 잇는 관문인 영도다리(영도대교) 일대는 피난민들이 모이는 중심지였다. 다리 밑 공간과 인근 부둣가 빈터에는 온갖 상업 행위와 노숙이 이루어졌는데, 그중 두드러진 것이 점치는 사람들이었다. 영도다리 아래 모여든 점쟁이들은 대부분 전쟁 전에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속인이나 역술인이었거나, 혹은 전쟁통에 하루아침에 신세가 기울어 미신 업에 뛰어든 이들이었다.

형성 및 모습: 전언에 따르면, 영도다리 밑에는 판잣집이나 천막 형태로 즉석 점집들이 즐비했다. 그 수는 많을 때 수십 개에 달했다고 한다. 점쟁이들은 각자 전문 분야를 내세웠는데, 어떤 이는 “천기누설 잘 보는 집”, 다른 이는 “신점 잘 보는 집”, 또 다른 이는 “관상 잘 보는 집” 식으로 간판 아닌 간판을 내걸었다고 한다. 손님들은 주로 피난민들, 특히 가족 잃은 사람, 장사 밑천을 마련하려는 사람, 병든 가족 둔 사람 등이었다. 점바치들은 이들의 사연을 듣고 “서울에 남은 가족이 살아있나”부터 “언제 전쟁이 끝나나”, “이번에 가져온 물건 팔면 이익 남나” 등 온갖 질문에 점을 쳐 주었다. 요금은 현금 몇 환 혹은 쌀이나 미군 담배 같은 현물로 받았다.

점바치 골목이 유명해지자, 오갈 데 없는 무당들도 일부 합류해 약식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하루는 다리 밑에서 비나리 소리가 울려퍼지고, 다음 날은 누군가 칼을 물고 곡예를 하며 귀신 쫓는 흉내를 냈다고도 한다. 이런 난장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이는 그만큼 간절하게라도 알고 싶은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아질까?”라는 물음에 답해주는 이는 점바치들 뿐이었다.

문화적 파장: 영도다리 점바치골목은 당대의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노래, 1956)의 가사에 “영도다리 난간마다 점치는 아낙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노래는 전쟁으로 이별한 연인을 기다리는 정서를 담았는데, 영도다리라는 공간 배경 속에 점치는 여성의 이미지를 삽입함으로써, 그 시대적 현실을 생생히 그려낸 것이다. 이처럼 노랫말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점바치골목은 1950년대 한국인의 집합 기억에 각인되었다. 또한 이는 피난민들의 고달픈 삶불확실한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당국의 대응: 전쟁 기간에는 군사 및 행정 당국 모두 치안 유지에 급급하여 이런 점바치들을 단속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휴전 후 1950년대 후반부터 부산시 당국은 위생, 도시질서 등을 이유로 정비에 나섰다. 점바치골목도 그 대상이었다. 경찰은 몇 차례 불시 단속을 나가 노점들을 걷어내고 퇴거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단속이 뜸해지면 이들은 다시 모여드는 식의 밀고 당기는 공존이 이어졌다. 결국 1960년대에 접어들어 부산이 비교적 안정되고 경제성장이 시작되면서, 점바치골목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역술인들 중 일부는 부산에 아예 눌러앉아 합법 영업으로 전환했고, 나머지는 다른 도시나 읍내로 이동하거나 업종을 바꾸었다.

사료와 연구: 이 사례에 대한 1차 사료는 주로 구술 증언과 신문기사 형태로 남아 있다. 1950년대 부산일보 등 지역 신문에 영도다리 주변 미관을 해친다는 논조의 기사가 있었고, “영도교 밑 잡상(雜商) 무리를 일소해야“라는 제목도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점바치를 언급한 당대 기록은 많지 않다. 이는 미신 행위를 드러내 놓고 기사화하기 꺼렸던 사회 분위기 때문일 수 있다. 대신, 대중가요, 문학작품, 수기 등에 이 에피소드가 간접 등장한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 해당 일을 기억하는 부산 원로들이 인터뷰에서 회고한 자료도 있다. 김경아(2022)의 연구는 이런 2차적 증언과 대중문화 자료를 모아 분석한 것으로, 증거 강도는 중간 수준이지만 여러 출처가 교차 검증되어 신뢰성을 높였다.

의의: 영도다리 점바치골목 사례는 떠돌이 점쟁이가 사회적 집단(folk group) 의 형태로 등장한 보기 드문 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하에서 이들은 정주하는 듯 모였으나, 실상은 각자 피난민 출신으로 전후에 흩어졌다. 즉, 일시적 군집이었다. 이는 떠돌이들의 느슨한 연결망이 어떨 때는 촌락처럼 보일 정도로 뭉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가 극심히 불안할 때 사람들은 점쟁이를 필요로 하고, 점쟁이들은 서로 어울려 시장을 이룬다. 평시라면 흩어졌을 개인들이, 난세에는 하나의 공동체 비슷하게 활동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 크게 반복되진 않았지만, 1997년 IMF 위기 직후 서울 종로 피맛골에 역술인들이 모여든 일 등 유사한 일이 간헐적으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점바치골목은 떠돌이 점쟁이와 사회 불안 요인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사례 4: 1970년대 서울 남산 점집 노점 - 통제와 적응

1970년대 초 서울 남산공원 순환도로 변에 밀집했던 점집 노점들의 흥망사는, 떠돌이 점쟁이들이 도심 관광지를 무대로 어떻게 활동했고 그 결과 어떠한 통제를 받았는지 보여준다. 이 사례는 주로 신문기사와 행정기록으로 남아 있다.

  • 배경: 남산은 일제강점기부터 서울 도심의 공원이었고, 1960~70년대에는 내외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 코스였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남산 북쪽 자락, 회현동·후암동 일대에는 여러 가지 비공식 거주지와 상업행위가 난립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역술 노점촌이었다. 후암동 일대 복술가촌에서 활동하던 일부 점쟁이들이 보다 손님을 끌기 좋은 남산 도로변으로 진출하여, 포장 점집 형태로 영업을 했다. 이들은 대개 나무 판잣집이나 컨테이너 비슷한 구조물을 도로 옆에 설치하고, 겉에는 “철학상담” “관상여기” 등 현판을 걸었다. 형태상 고정 점포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건축 허가나 영업 허가는 전혀 없는 불법 노점이었다.

  • 성행: 1970년대 초까지 남산 일대에 약 수십 개의 점집 노점이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이들은 낮에는 문을 닫고 있다가 주로 밤에 영업했는데, 관광객이나 젊은 남녀가 산책 겸 운세를 보러 들르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도 사복 차림으로 찾아와 점을 보고 가는 일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러한 점집 노점들은 남산을 찾은 행락객들에게 일종의 볼거리가 되기도 했고, 일부 안내 책자에는 “남산의 이색 풍경: 점집 골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미관 저해퇴폐 행위로 지탄받았다. 1971년의 한 신문 칼럼은 남산의 점집촌을 가리켜 “서울 한복판에 미신의 굴레가 판치고 있다”고 개탄했다.

  • 단속: 결국 1972년 서울시는 남산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이 점집 노점들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8월 17일자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시 당국은 “남산순환도로변 불량건축물 및 점집 37개소” 를 선정하여 철거 명령을 내렸다[14]. 기사에는 “도시 미화 차원에서 이들 점집을 없앤다”는 시 당국자의 발언이 실려 있다[25]. 철거 당일, 많은 경찰과 시 직원들이 동원되어 노점을 철거하고 구조물을 치웠다. 저항은 비교적 적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전에 구청을 통해 수차례 계고장이 나갔고, 점집 주인들도 어느 정도 철거를 예상하고 짐을 뺀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 결과 및 영향: 남산 점집 노점의 철거는 당시 언론에 공개적으로 보도되며, 정부의 미신 척결 노력의 성공 사례처럼 선전되었다.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길에 들어선 점술 노점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남산 사례는 행정력으로 얼마든지 정리가 가능함을 보여주었고, 역술인들도 야외보다는 실내 영업으로 전환하는 쪽으로 적응했다. 실제로 남산 노점이 사라진 뒤, 일부 역술인은 인근 충무로, 을지로 등지의 건물에 입주하여 정식 업소처럼 운영하거나, 멀리 미아리 고개 버스 종점의 다리 밑에 다시 좌판을 벌렸다.

  • 사료 평가: 이 사례는 신문기사(2차 자료) 와 행정 문서(서울시 보고서 등, 1차 자료일 수도 있음)로 확인된다. 신문기사는 해당 사건을 전후 맥락까지 전하진 않아 한계가 있지만, 사진 자료까지 첨부되어 현장의 모습을 보여준다[13]. 사진에는 남산 공원 도로가에 늘어서 있던 작은 점집 가건물과, 그 앞에 “미신타파” 구호를 붙인 철거장면이 담겼다. 이는 당대 도시정책과 점술문화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의의: 남산 점집 노점 사건은 현대 도시공간에서 떠돌이 점쟁이들이 차지했던 위상국가권력이 행사된 방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떠돌이 점쟁이들은 도심의 유휴지(남산 공원 비탈진 도로가)를 활용하여 비공식 경제 행위를 했지만, 국가의 근대화 프로젝트 속에서 이는 용납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 이후에도 1980년대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술 노점은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즉, 표면상으로는 사라진 듯해도, 청계천 변 뒷골목이나 재개발지 빈터 등에는 다시 소규모 노점이 생겨나곤 했다. 특히 미아리는 후암동 점쟁이들의 새로운 집결지가 되어 2025년 현재까지도 성업 중이다(나는 이 사실을 미아리 주민-특히 미용실 사장님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확인했다). 남산 사례는 정부의 통제 의지가 가장 강력했던 유신 시절에 시행된 것이어서, 일시적으로 떠돌이 점쟁이들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소멸이 아닌 은신으로 귀결되었음을, 우리는 이후 시대 흐름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례 5: 건대입구 타로거리 - 현대 도심의 점술 노점 갈등

건대입구역 ‘타로거리’ 는 199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초까지 서울에서 형성된 가장 큰 역술 노점 밀집지 가운데 하나로, 현대적 떠돌이 점쟁이들의 생태를 잘 보여준다. 또한 2020년대 들어 해당 구청과 노점상들 사이에 벌어진 철거 갈등 사례는, 과거와는 또 다른 양상의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 형성과 성장: 서울 광진구 지하철 2호선 건대입구역 주변은 원래 유흥주점과 노점 음식상이 많던 번화가다. 1990년대 말부터 이 일대에 젊은 층을 상대로 사주풀이 노점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2~3곳에 불과했으나,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늘자 점차 그 수가 많아졌다. 특히 2000년대 들어 타로 카드 점이 유행하면서, 기존의 동양 사주뿐 아니라 서양 타로를 보는 젊은 역술인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대개 20~30대의 여성 혹은 예술 관련 전공자 등으로, 기존의 할머니·할아버지 점쟁이와는 달리 세련된 카페 분위기를 노점에 연출하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 TV 예능 프로그램에 건대 타로거리의 한 점술인이 출연하여 화제가 되자, 주말 저녁마다 운세를 보러 몰려든 줄이 수십 미터 이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에 편승해 길거리 음식 노점상들도 함께 몰려와 거리 양쪽으로 늘어서게 되었고, 무허가 점집 천막들도 우후죽순처럼 증가했다. 전성기에는 약 70~80개의 노점(점술+먹거리 포함)이 200m 남짓한 인도에 빼곡히 자리했다[19][26].

  • 현황: 이 타로거리의 풍경은 낮과 밤이 달랐다. 낮에는 컨테이너 형태의 박스나 천막이 닫혀 있어 그냥 노상 적치물처럼 보였지만,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과 점술 관련 간판, 카드와 주역책 등이 펼쳐지면서 사람들로 붐볐다. 코로나19로 한때 주춤했으나, 2022년 이후 다시 활기를 찾았다. 손님층은 주로 10~30대 젊은이, 연인, 대학생, 인근 직장인 등이다. 서비스 가격은 10분에 5천 원, 30분에 1만 원 등 비교적 저렴하여 부담이 적었고, 이것이 인기 요인이었다.

  • 갈등과 철거: 그러나 이렇게 번성한 타로거리도 법적으로는 불법 노점 집단에 불과했다. 특히 통행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주민 불편이 크다는 민원이 누적되었다[19][26]. 또한 시간이 흐르며 노점상들 사이에 자리 세습과 권리금 거래 등이 발생하여, 기존 노점상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수백만 원에 파는 등의 무법적 상황도 나타났다[27]. 광진구청은 2010년경 노점들과 일시 합의를 보아 컨테이너 박스를 일정 구역에 한해 설치하도록 했으나, 이것이 사실상 영구 점용을 허용하는 결과가 되어 2020년대까지 존속해버렸다. 2023년 구청장은 “더 이상 불법을 방치하지 않겠다”며 강경 조치를 예고했고, 2025년 9월 행정대집행에 돌입했다[28]. 2025년 9월 8일 새벽, 건대역 2번 출구 앞 인도에 늘어서 있던 컨테이너 점집 75곳 중 46곳을 우선 철거하자[29], 노점상들은 강력 반발하며 천막 농성1인 시위에 들어갔다[30][31]. 노점 측은 “구청과 2010년에 설치 합의한 것인데 이제와 불법이라니 부당하다”는 입장이고[32], 구청 측은 “애초 임시 조치였을 뿐, 정식 허가는 아니었다. 권리금 거래와 탈세 등 불법이 만연해 철거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28][27].

    현재(2025년 말 시점) 이 갈등은 진행 중이며, 아직 철거되지 않은 나머지 29개 노점에 대한 추가 조치가 예고된 상황이다[28]. 이번 사례는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어, “거리 점술촌, 공존 가능한가” 라는 담론을 불러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미 문화로 자리잡은 타로거리를 양성화하여 관광자원으로 써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반대로 “불법은 엄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다[33]. 흥미로운 것은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점술 노점을 옹호하는 대중 여론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인터넷 상에는 “어려운 청년들이 점이라도 보며 위로받는다, 너무 없애지 말라”는 의견부터 “오히려 무속 문화 수출을 해야” 등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 의미: 건대 타로거리 사례는 현대판 떠돌이 점쟁이들의 생태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직접 대면 상담의 수요가 있음을 입증했고, 새로운 콘텐츠(타로)를 접목하여 젊은 세대와 교감했다. 동시에, 전통적 문제점 - 무허가, 탈세, 공공장소 무단점유 - 또한 여전함을 노출했다. 이는 떠돌이 점쟁이라는 업태가 제도권에 완전히 편입되지 못한 채 반쯤 관용, 반쯤 단속의 회색지대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건대 타로거리는 결과적으로 과거 영도다리나 남산 사례와 유사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사회가 혼란하거나 수요가 폭증하면 성장, 이후 행정력에 의해 축소 또는 해체. 과학문명의 21세기에도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떠돌이 점쟁이 현상이 인류 사회의 보편적 욕구(미래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에 뿌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 사료: 이 사례는 필자의 2023년~2025년 현장 관찰과 다수 언론 기사(문화일보, 서울신문 등)를 통해 기술되었다[19]. 증거 강도는 높음 (동시대 일어난 공개적 사건이므로). 이로써, 앞선 역사적 사례들과 비교하여 연속성과 변화를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 다섯 가지 사례 분석을 통해 우리는 떠돌이 점쟁이 현상이 각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직접 조사: 2025년 현황 관찰 결과

이 절에서는 연구자가 직접 확인하거나 검증한 최근의 사실들을 정리한다. 2025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떠돌이 점쟁이의 흔적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 그 구체적 양상을 관찰한 내용이다. 앞서 사례 5로 다룬 건대 타로거리 역시 직접 조사에 해당하지만, 이미 상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그 외의 지역과 일반 현황을 간략히 소개한다.

  • 서울 종로구 인사동/탑골공원 주변: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역술인이 많던 곳이다. 필자가 2025년 3월과 7월 두 차례 답사한 결과, 인사동 골목에는 몇몇 노상 역술인이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탑골공원 옆 담벼락 아래 작은 파라솔을 펴고 “토정비결 봅니다”라는 종이를 붙인 노인이 앉아있었으며, 공원 입구 근처에는 손금 봐주는 할머니 한 분이 작은 의자 두 개를 두고 손님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사실상 노점인데, 관광지 특성상 어느 정도 묵인되는 분위기였다. 현장 대화에서 한 점술인은 “여기서 20년째 이러고 있는데 큰 단속은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심심해서들 오신다”고 말했다. 이는 도심 한복판에서도 영세한 형태의 떠돌이 점쟁이가 잔존함을 보여준다.
  • 서울 양천구 목동 번화가: 서울 양천구 목동의 번화가(행복한백화점과 파라곤 빌딩 사이의 보행로) 좌판 중에 점술 노점 한 곳이 있었다. 60대 남성이 “재수보기”라 적힌 포장마차를 펴고 앉아 있었고, 옆에는 공책 몇 권과 단지(壇紙), 그리고 산가지 등이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말을 걸어보니 “30년째 전국 장날을 따라다닌다. 매일 다른 곳에 간다”고 하였다. 그는 “예전엔 경쟁자가 많았는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다 봐버리니 힘들다”면서도, 단골이 좀 있어 명맥을 잇는다고 했다. 이러한 순회형 점쟁이는 전통 사회부터 이어져온 유형으로 보인다. 어쩌면 과거에는 전통적인 유동인구 결절지였을 5일장을 순회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수는 줄었지만 아직도 이동하면서 점을 보는 생활을 영위하는 이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 노점 철거 행정과 역술인: 2024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의 노점상 현황 조사에 역술 관련 노점은 별도 분류되어 있지 않다. 이는 대개 역술 노점을 음식 노점 등에 비해 수가 적다고 간주하거나, 정식 집계에 넣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만 2023년 강남구청 등 일부 자치구는 역술 노점을 “유흥성 불법영업”으로 규정하고 집중단속 계획을 보고한 바 있다. 인터뷰에 응한 한 구청 관계자는 “거리 점쟁이는 법적으로 단속 조항이 모호하지만, 보도점용이나 탈세, 무허가 영업으로 충분히 제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사례로 2022년 강남역 주변 길거리에서 타로를 보던 2명이 도로법 위반으로 과태료를 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찰도 큰 범죄가 아니라면 소극 대응하는 편이다. 이는 과거에 비해 행정의 시각이 다소 관대해진 측면이 있음을 시사한다. 미신이라 배척하기보다는, 불법영업 행위로서만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 온라인으로의 이동: 직접 관찰한 바는 아니나, 2020년대 떠돌이 점쟁이들의 또 다른 움직임은 온라인 플랫폼 활용이다. 여러 역술인이 유튜브 채널이나 틱톡 라이브를 통해 실시간 운세 상담을 하거나, 어플리케이션에서 채팅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전통적인 ‘떠돌이’의 개념을 새롭게 확장하는 사례라 할 수 있는데, 물리적 공간이 아닌 사이버 공간을 떠돌며 고객을 만나는 점쟁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예컨대 한 유명 타로마스터는 “오늘 밤 9시 TikTok 라이브 무료 3명 운세 상담” 등의 이벤트를 열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점을 봐주고 추가 상담은 유료로 이어가는 방식으로 수익을 낸다. 이러한 디지털 전환은 본 연구의 직접 현장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떠돌이 점쟁이의 시대적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요약하면, 2025년 현재 전통적 형태의 떠돌이 점쟁이는 크게 감소했으나, 여전히 도시와 농촌의 틈새 공간에서 명맥을 잇고 있었다. 다만 과거처럼 대규모로 눈에 띄지는 않으며, 소규모 분산 또는 온라인 전환이 두드러진다. 이 직접 조사에서 얻은 인상은, 떠돌이 점쟁이라는 직업군이 완전히 사라진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현대의 요구에 맞게 형태를 바꿀 뿐 지속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 결과를 염두에 두고, 다음 장에서 종합적인 논의를 진행한다.

논의

앞서 역사 개관과 사례 연구, 현대 현황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떠돌이 점쟁이 현상의 본질과 변천 의미를 네 가지 측면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1) 이동성 - why 떠돌았는가?, (2) 공간성 - 어디를 점유했는가?, (3) 제도 외적 생업성 - 어떻게 생계를 꾸렸는가?, (4) 통제와 적응 - 사회는 어떻게 대응했고 이들은 어떻게 적응했는가? 이 각각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마지막으로 사료와 증거 평가에 대한 메타논의를 덧붙인다.

(1) 이동성: 떠돌이 생활의 동인(動因)

떠돌이 점쟁이들은 왜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을 삶의 방식으로 택했는가? 역사적 맥락에서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경제적 이유가 크다. 이들은 주로 가난한 배경을 지닌 사회 취약층이었다. 맹인 판수나 걸승, 전쟁기 피난민 점쟁이 등 공통적으로 사회 밑바닥 계층에 속한다. 이들에게 점복은 손쉽게 진입할 수 있는 생계 수단이었지만, 고정된 점포를 운영할 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떠돌며 손님을 찾아야 했다. 장돌뱅이가 물건을 팔러 이동하듯, 점쟁이도 장을 따라 이동하고 사람이 많은 곳을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34]. 예컨대 5일장 순회 점쟁이는 매일 다른 읍내로 옮겨 다니며 일용한 벌이를 얻었다. 한 곳에 머물면 손님 풀이 금방 고갈되지만, 새로운 곳으로 가면 새로운 손님층이 생기기 때문에 이동은 수입을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둘째, 직업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점쟁이는 예나 지금이나 합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직종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공식 직업이 아니었고, 근대에도 법적인 인정을 못 받았다. 그러니 언제든 단속이나 배척을 피하려면 이동성이 필요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눈에 띄어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유랑하면 잡혀도 다른 지역으로 가거나, 혹은 출몰 시간을 바꾸어 피할 수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와 1960~80년대 강압통치기에는 많은 점쟁이들이 야간 이동이나 촌락 간 이동으로 단속을 피해갔다. 이동성은 이들에게 생존 전략이었다.

셋째, 고객층의 분포와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점을 보러 오는 사람은 사건이 생겼을 때나 불안할 때 찾는다. 따라서 특정 시기·장소에 손님이 몰린다. 이를테면 시장 날이나 명절 전후, 시험철 등에 수요가 늘어난다. 떠돌이 점쟁이는 그러한 국지적·계절적 수요를 따라 움직였다. 자료에 따르면, 일찍이 18세기에도 “장이 서면 점쟁이가 나타난다”는 인식이 있었다[34]. 이처럼 고객을 찾아가는 서비스 형태였기에 이동은 필연적이었다.

넷째, 문화적 소명 의식도 일부분 작용했다. 특히 맹인 점쟁이들의 경우, 길거리 방랑이 하나의 공동체 전통이었다. 맹인들이 조직적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점치는 관습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도 존재했는데, 이는 길 위에서 운명을 읽어주는 방랑자의 이미지가 문화적으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회의 주변인이자 인간세상과 영계의 중개인으로 여겼고, 떠돌이 생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소명 의식은 어디까지나 일부 개인의 신념이었겠지만, 문헌을 보면 점쟁이들 중엔 자기 운명을 “XX 방위를 떠돌 별 아래 태어났다”며 숙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동성에 대한 이러한 요인 분석을 통해 볼 때, 떠돌이 점쟁이는 경제·사회적 주변인으로서 수요를 좇아 위험을 무릅쓴 이동 노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5일장 점쟁이나 떠돌이 운세 트럭 등이 이러한 맥락을 잇는다. 한편, 이동성은 이들의 신뢰 형성에 양면성을 띠었다. 낯선 곳의 점쟁이는 신비로움을 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믿을 수 없는 한탕주의자로 비칠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 떠돌이 점쟁이들은 지역 어귀에 짐풀고 잠시 정착하여 신뢰를 쌓은 후 이동하는 semi-nomadic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한 시골 마을에 몇 달 머물며 신뢰를 얻은 뒤, 다시 다른 고장으로 가는 식이다. 이런 사례는 구술 조사에서 드러나는데, 1930년대 평안도 지역에는 계절마다 마을을 순회하는 맹인 역술인이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이동성은 떠돌이 점쟁이의 본질적 속성이며, 그 내재적 동인은 생계 전략, 단속 회피, 수요 대응, 정체성 등이었다. 이는 시대가 변해도 상당 부분 유효하여, 디지털 시대에도 온라인 공간을 떠도는 등 형태만 바뀔 뿐 핵심 원리는 지속되고 있다.

(2) 공간성: 점쟁이들이 점유한 장소와 그 의미

떠돌이 점쟁이들은 어디에서 점을 쳤는가? 이들의 공간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상당히 전략적이었다.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간들이 즐겨 이용되었다:

  • 시장과 장터: 이것은 가장 전통적인 무대다. “장날에 점도 보고 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옛 시골 장에서는 점쟁이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35]. 시장은 사람이 모이고 돈이 도는 공간이다. 떠돌이 점쟁이는 장꾼들 틈에 섞여 좌판(座板) 을 폈다. 보부상들이 상품을 팔듯, 점쟁이는 운수를 팔았다. 장터에서는 모두가 일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므로, 그곳의 만남은 익명성이 보장된다. 이것은 손님 입장에서 개인 신상이 드러나지 않게 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시장은 비일상적 공간으로, 일과 놀이, 소문과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장(場)이다[35]. 점복 행위는 그 속에서 여흥과 조언을 제공하는 부속 기능을 했다.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보듯, 조선 후기 장터에 시각적·청각적 볼거리로 점쟁이가 등장했다[1]. 20세기 장에도 변함없어서, 1960년대 정부는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장터 굿판, 점판 없애기” 캠페인을 벌일 정도였다.
  • 사원과 광장 주변: 역사적으로 절 마당이나 성황당 주변도 점쟁이들이 활동한 공간이었다. 예컨대 불교 행사나 도교 축일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 근처에 점복 거리가 열렸다. 이는 종교적 심성을 이용한 것으로, 사람들의 신앙심이 높아지는 장소에서 자연스레 운세에 관심을 갖게 되는 점을 노렸다. 현대에도 사찰이나 교회 부근에서 사주팔자 노점이 발견되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또한 도시의 경우, 공원이나 광장 같은 열린 공간이 거점이 되었다. 일례로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는 남대문정거장 앞 광장이나 종로 네거리 등에 맹인 점쟁이가 자리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광장은 유동인구가 많고 접근성이 높아 영업에 유리했다.
  • 교량과 도로가: 영도대교 밑의 점바치골목이나, 1950년대 한강대교 끝자락에 있었다는 역술 노점 등이 떠올려진다. 다리 근처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영도대교처럼 사람들의 사연이 많은 곳은 상징성도 컸다. 다리는 건너는 행위 자체가 불안과 기대를 수반한다(건널 때 무사하기를 빌고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전환). 따라서 그곳에 점쟁이가 있는 것은 일종의 의례화된 모습이 된다 - “다리 건너기 전에 운세부터 확인한다.” 또한 다리는 행정 구역의 경계인 경우가 많아, 단속의 사각지대가 되기도 했다. 영도대교는 부산 본토와 영도구의 경계였고, 한강대교는 서울과 경기의 경계였다. 경계 공간은 통제가 느슨해 떠돌이들이 붙기 쉽다. 도로변 역시 유사하다. 남산순환도로의 노점촌은 공원과 시가지 경계에 위치했고[14], 건대 타로거리도 역 출구와 대로변 길목이라는 경계성 공간에 위치했다[19]. 요컨대 경계·통로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점쟁이들은 도심의 틈새를 활용했다.
  • 주막 주변: 옛날 떠돌이 예인들이 머물던 주막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많다. 떠돌이 예인이 점을 보았다는 명확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주막 손님이 술김에 앞날을 묻거나, 먼 길 가는 길손이 여관 머무는 밤에 점을 보면, 떠돌이 점쟁이는 돈을 벌 수 있었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해보인다. 이것은 이동민과 이동민의 만남으로, 이동하는 상인이나 나그네와 떠돌이 점쟁이가 정보와 이야기를 교환하기도 했을 것이다.
  • 온라인 공간 (현대):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현대에는 인터넷이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떠돌이 점쟁이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서 부적이나 운세를 팔고,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점치는 행위는, 전통적 공간 개념을 재편한다. 과거에 이들이 장터나 다리를 전전했다면, 이제는 플랫폼을 전전하게 되었다. 이 역시 인구(접속자)가 모인 곳을 찾아다니는 행위라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이상의 공간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람이 모이는 곳”“경계/틈새” 라 할 수 있다. 떠돌이 점쟁이는 반드시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야 영업이 된다. 동시에, 너무 통제가 심한 중심부는 피하고, 제도적 시선이 약한 주변부/경계를 파고들었다. 이로써 이들의 공간적 생태는 기생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공간의 활용 능력이 뛰어났다고도 평할 수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다리 밑이나 공원 담장 밑 공간을 의미 있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를 문화지리학적으로 해석하면, 떠돌이 점쟁이들은 장소 만들기(place-making) 를 했다. 영도다리 밑은 그들이 모이자 ‘점괘의 거리’ 가 되었고, 남산 자락 도로는 “미신촌” 으로 불렸다. 공간에 별도의 의미와 용도를 부여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장소성은 일시적이었고, 그들이 떠나면 원상태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 기억에는 남아, “옛날 거기 점집 많았지”와 같은 스토리로 전승되었다. 이는 도시의 민속지리(folk geography) 를 구성한다.

정책적으로 보면, 떠돌이 점쟁이가 점유한 공간은 늘 비계획적 사용이었다. 도시계획이나 토지제도에서 설정한 용도가 아닌 방식으로 공간을 썼기 때문에, 통치자 입장에선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계획 밖 공간사회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으로 전환한 것이니, 일종의 자생적 도시 문화로 볼 수도 있다. 오늘날 도시재생 담론에서는 이러한 비공식 공간 활용을 긍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가령 전세계적으로도 노점시장은 활력 요소로 인정받기도 하는데, 점술 노점은 다소 특수하지만 유사하게 논의될 여지가 있다. 실제로 홍콩의 템플스트리트(Temple Street) 야시장이나 대만 셔린야시장 등에는 점쟁이 노점들이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건대 타로거리를 살릴지 철거할지 논란이 된 것이 같은 맥락이다[33].

정리하면, 떠돌이 점쟁이들은 공간의 틈새를 찾아 점유했고, 그로써 사람들의 일상 공간을 비일상적 체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이들의 공간 전략은 생존을 위한 동시에 문화를 만든 행위였다. 앞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새로운 공간(예: 메타버스 공간의 점집?)을 찾아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3) 제도 외적 생업: 비공식 경제로서의 떠돌이 점쟁이

떠돌이 점쟁이의 생업은 공식 제도권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경제활동 및 생계 방식은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우선, 소규모 현금 거래 경제였다. 대체로 건당 점치는 비용은 역사가 오래도록 소액에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는 시주 형식이어서 정찰제가 없었지만, 어떤 야담엔 “점을 보고 쌀 한 되를 받았다”는 식으로 비교적 작은 대가였음이 드러난다. 1950년대 영도다리에서는 “손님 한 명에 100환” 등,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고 증언된다. 1960년대 후반 기업형 점집이 등장해 큰 돈을 버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은 정착한 역술인의 경우고 떠돌이들과는 구분된다[4]. 떠돌이 점쟁이는 고객층이 주로 서민이라 크게 받을 수도 없었고, 너무 비싸면 소문이 안 좋아져 장사가 안 된다. 그러므로 얇고 넓게 버는 전략을 썼다. 일종의 다건 소액 매출 구조였다.

둘째, 현금 및 현물 경제이므로 세금 등 제도권 편입이 전혀 없는 암시장과 유사했다. 조선시대는 세금 개념보다는 신분상 천시, 일제는 허가제 부과를 시도했으나 잘 안 됐고, 대한민국 정부도 세원 포착을 못 했다. 1960년대 말 고소득 철학관들에겐 과세가 이루어졌지만[4], 떠돌이들은 여전히 포착 불가능한 그림자 경제였다. 이는 근대국가 입장에선 손해보는(?) 부분이었고, 미신타파라는 명분 뒤에는 이들의 수입을 양성화/과세하고픈 경제적 동기도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셋째, 생계 다각화를 들 수 있다. 떠돌이 점쟁이 중에는 복합적 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판수가 굿도 하고 침도 놓았듯이, 점쟁이들은 부업이 있었다. 19세기 맹인 점쟁이들은 안마나 침술을 겸했고, 20세기 점쟁이들은 약초 장사부적 판매도 함께 했다. 영도다리 점바치골목에서도 어떤 이는 점을 보면서 약도 팔고, 다른 이는 부적을 써 팔아 돈을 더 벌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점복 수입만으로 생활이 곤궁할 때 벌어진 일로, 떠돌이들의 생존 능력융통성을 보여준다.

넷째, 가족 단위 생계의 측면이다. 떠돌이 점쟁이라 하면 혼자 다니는 이미지지만, 사례들을 보면 가족이 동반인 경우도 꽤 있다. 1950년대 점바치골목에도 부부 혹은 모자(母子) 동반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이 앞에 앉아 점을 보면 남편이 뒤에서 살림을 챙기거나, 맹인 아버지가 점치면 아들이 대신 돈을 받는 식이다. 현대 건대 타로거리에서도 부부 노점이 있었다. 남편이 호객을 하면 아내가 점을 보는 분업 구조였다. 이런 가족 동반은 생계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 사회 보호망이 없던 시절, 가족끼리 의지하며 이동 노동을 한 것이다. 이는 떠돌이 광대나 상인들과도 공통되는 현상이다.

다섯째, 비교우위 기술의 활용이다. 떠돌이 점쟁이는 특별한 도구나 자본 없이 오로지 자신의 지식과 말솜씨로 돈을 번다. 이들에게 자산은 점술 지식(사주명리학, 관상법 등)사람심리 간파 능력이었다. 흔히 점쟁이를 속칭 사기꾼이라 부르지만, 고객의 마음을 읽고 심리를 다독이는 능력은 결코 평범치 않다. 이것이 일종의 기술/서비스로 인정되기에 사람들이 비용을 지불한다. 떠돌이 점쟁이는 정주 점쟁이에 비해 고객을 단번에 사로잡아야 하고, 재방문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더욱 언변과 쇼맨십에 능했다.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목탁과 꽹과리로 소란을 피우는 연출을 보라[1]. 이는 지나가는 손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려는 퍼포먼스다. 이런 기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길거리 타로 마스터들은 화려한 복장개성있는 캐릭터로 고객 눈길을 끈다. 이러한 비공식 서비스 기술은 제도권 밖에서 발전해온 것으로, 학습은 도제식 전수나 개인 연구로 이루어졌다. 이는 제도권 교육과 대비되는 야성의 지식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험과 수입의 불안정이다. 떠돌이 점쟁이의 생업은 늘 불안정한 수입원이었다. 손님이 몰릴 때는 짭짤하지만, 없을 땐 하루 굶기도 쉬웠다. 또한 단속 당하면 도구 뺏기고 벌금 내야 했으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한 것은, 계층상 탈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 최하층에게 점쟁이는 차라리 나은 자립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구걸보다는 뭔가 “봐주고” 돈을 받으니, 자존감 측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는 성공하여 큰 점술인으로 명성을 얻겠다는 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으로, 떠돌이 점쟁이의 생업은 비제도권의 영세한 자영업이자 재능 기반 서비스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 경제 시스템에 잡히지 않는 음지 경제였고, 따라서 공식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었다. 그러나 민중 경제사 관점에서 보면, 이들도 분명 한 시대 풀뿌리 시장의 행위자였다.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몇 푼 받아가며 서로 위안과 정보를 주고받는 비공식 복지망 역할도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예컨대 한겨울 장터에서 점 봐주며 “내 봐하니 올해는 꼭 흉년이 끝날 상”이라고 말해주면, 농민은 그 희망으로 견딜 힘을 얻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 예언이 맞을지는 별개 문제지만, 심리적 서비스로서 기능했다는 점은 현대 상담심리와도 통한다. 떠돌이 점쟁이들의 활약은 그렇게 비공식 경제와 비공식 복지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4) 통제와 적응: 권력의 대응과 점쟁이들의 전략

한국사에서 떠돌이 점쟁이에 대한 지배층의 시선은 일관되게 부정적이었다. 유교 윤리든 식민 통치든 개발 국가든, 모두 이들을 “미신”, “퇴폐”, “사회악” 등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른 통제 정책은 시대별로 형태만 달랐을 뿐 근본 태도는 유사했다. 동시에, 점쟁이들은 이에 맞서 각자의 생존 전략으로 적응해왔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관점에서 미신을 배척했지만, 비교적 방임에 가까웠다. 무당과 판수를 법으로 금지하기보다는, 천시하여 양인 신분에 들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통제했다.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 법전인 『속대전』에는 무격(巫覡)은 양민이 되지 못하며, 발각 시 형벌이라는 조항이 있으나, 실제 적용은 선택적이었다. 떠돌이 점쟁이들도 원칙적으로는 천인(賤人) 취급을 받았으나, 특별히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크게 단속하지는 않았다. 즉 “금하되, 대개는 눈감아주는” 식이었다. 이는 유교 사회의 위선적 관용일 수도 있고, 실질적으로는 통제력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 정부는 산간·민간 구석구석의 점복 행위를 일일이 제어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탄압한다고 해도 완벽히 없앨 수 없음을 알았고, 적당히 용인한 것이다. 이는 소극적 방임 통제라 하겠다.

일제강점기는 근대 국가답게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10년대에는 경찰권 행사로 역술인들을 신고/허가제로 묶으려 했지만, 워낙 넓게 퍼져있어 실패했다. 1920~30년대에는 종교와 분리해 미신 규탄 여론을 일으키고 교육 계몽을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1920년대 동아일보 등 민족지에서 시도한 계몽 운동에서도 미신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식민정부 뿐 아니라 계몽된 엘리트 계층도 점치는 행위를 낡은 인습으로 보았음을 뜻한다. 하지만 정작 1930년대 총독부는 유사종교단체령 등을 통해 무속인을 오히려 통제하에 이용하려 들기도 했다(일부 무당조직을 친일화 등). 점쟁이에 대해선 그런 조직이 없으니 그냥 단속 위주였다. 단속 방식은 주로 경찰 검거벌금형이었다. 하지만 워낙 그 수가 많아 모두 잡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일본인 사회에서도 유사 점쟁이가 활개쳤으므로 완전한 근절은 힘들었다. 일제의 통제는 한편으론 사상적 위험성 때문이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요언(流言)·비어(飛語)” 자체가 치안상의 위험으로 간주돼 단속·처벌 대상이었고, 독립·항일 정신을 북돋을 수 있는 유언비어는 특히 강하게 통제 되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의 패전에 대한 유언비어를 처벌한 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다만 유언비어의 시작이 점술이나 예언인지, 아니면 냉정한 군사적 분석의 결과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이는 점쟁이 통제의 정치적 측면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점쟁이 통제가 도덕성과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불안한 민심이 점쟁이에게 쏠릴까봐 국민정신 차원에서 강조단속을 했고[11], 1970~80년대에는 근대화/정화 이념으로 몰아붙였다[12][6]. 1980년 국보위는 삼청교육대로 물리적 격리까지 실행했다. 요컨대 폭넓은 레퍼토리의 통제가 동원되었다: 계몽, 처벌, 격리, 철거 등. 그러나 이러한 강력 통제에도 불구하고 수요는 사라지지 않아, 정책은 늘 일시적 효과에 그쳤다. 1970년대 말만 해도 정부 고위층이 역술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폭로되어(1971년 대선 날짜 점쟁이 택일 등[15]) 미신타파 운동의 위선을 드러냈다. 이는 통제 정책의 한계였다. 즉, 위로는 권력자부터 점을 믿는데 아래로 통제하는 모순이 있었다.

한편, 점쟁이들의 적응 전략도 흥미롭다. 첫째는 은닉과 잠행이다. 단속 뜨면 숨고, 풀리면 나오고, 지형지물을 잘 활용했다. 또 일종의 암호 체계로 고객을 받기도 했다(예: 대문에 특정 표시 있으면 들어가는 식). 둘째는 합법적 외피 두르기다. 1960년대 이후 많은 떠돌이 점쟁이들이 “철학관” 간판을 달고 사업자 등록을 하는 추세로 변했다. 겉으로는 철학 상담소이지 실제론 점집인 식이다. 이러면 일단 세금도 조금 내고 법적으로 문제삼기 어려워진다. 셋째는 매체 활용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점쟁이들이 잡지 광고나 운세 책 출판으로 제도권 시장에 침투했다. 운세 코너를 신문에 연재하거나, 아예 케이블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것은 통제 대신 상업화된 적응이라 볼 수 있다. 넷째, 조직화 시도도 보인다. 1969년 역술인들이 대규모 대제전 행사를 열고 국회의장 등이 후원한 일은, 역술인 스스로 사회적 인정을 얻고자 한 움직임이었다[15]. 비록 지속적 조직은 안 되었지만, 최근에도 역술인 협회 등이 존재한다.

통제와 적응의 상호작용은 쫓고 도망가는 술래잡기 같았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권력의 통제는 완승하지 못했고, 점쟁이들의 적응은 완자유를 얻지 못했다. 항상 긴장 속 공존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통제자는 지쳐갔고, 적응자는 한층 세련되게 변모했다. 2020년대 한국에서 점쟁이는 더 이상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다. 다만 도시 미관, 탈세 등 행정질서 문제로 다뤄질 뿐이다[28]. 이는 결국 사회가 일정 부분 이 현상을 수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국가가 역술을 합법화한 것은 아니지만, 적극 탄압도 하지 않는 느슨한 규제 환경이 되었다. 이는 점쟁이들의 존재 이유 - 대중의 불안을 달래는 기능 - 이 어느 정도 인정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통제와 적응의 오랜 상호작용 끝에, 양자 간 암묵적 합의 비슷한 선이 그어진 셈이다. 이를테면 “실내에서 세금 내고 하면 놔둔다. 길거리에서 통행 막으면 치운다” 정도가 그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회문화적 변화는, 미신에 대한 관점의 변화다. 과거엔 “미신 = 미개”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요즘은 “미신 = 문화”라는 관용도 보인다[36]. 21세기 들어 한복 입고 사주카페 가는 젊은이들이 늘고, 무속이 드라마 소재로 소비되는 등, 탈이데올로기화된 경향이 있다. 이 속에서 떠돌이 점쟁이에 대한 태도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2025년 건대 타로거리 철거 때 SNS 여론을 보면, “불법은 문제지만 추억이 사라진다”, “청년들의 자립 수단인데 안타깝다” 등 공감적 반응이 꽤 있었다. 이는 과거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러한 문화적 수용이 커지면, 향후 정책도 완화 내지 양성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이미 2018년 서울 성동구 등에서 “거리가게 허가제” 를 통해 일부 노점을 양성화했고[37], 여기엔 먹거리 외에 캐리커처, 수공예 등과 함께 타로점 노점도 포함된 바 있다. 이는 떠돌이 점쟁이가 비공식 경제에서 준공식 경제로 옮겨올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러한 제도화는 아직 예외적이지만, 통제와 적응의 역학 속에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 움직임이라 주목된다.

(5) 사료성과 증거 평가: 연구의 한계와 가능성

마지막으로, 본 논문의 분석 기반이 된 사료들의 성격과 증거로서의 강도를 돌아보고자 한다. 이는 향후 본 주제에 대한 학술연구의 방향을 가늠하는 데도 중요하다.

본 연구에서 활용한 사료들은 회화, 외국인 기록, 신문, 논문, 구술, 관찰 등 다종다양하다. 각각 1차·2차·3차 자료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1차 자료 (동시대 기록/직접 증언): 김홍도 <점괘> 그림[1], 헐버트의 1903년 글[2], 1953년 서울신문 보도[7], 1972년 매일경제 기사(서울신문 칼럼에 인용됨)[13], 2019년 손성진 칼럼(과거 사례들 인용)[38], 2025년 문화일보 기사 등. 이들은 비교적 신빙성 높은 1차 정보를 담고 있다. 증거 강도를 따지면 대체로 높음으로 평가했다. 다만 1차 자료들 각각도 서술 목적과 맥락에 따라 편향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신문 기사는 과장이나 비난 어조가 섞였고, 그림은 화가의 의도가 있다. 그러나 이들 자료가 교차해서 같은 사실을 가리킬 때 신뢰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를테면 1950년대 점쟁이 단속 사실은 경찰 발표와 신문기사, 회고록 등에 공통으로 나오므로 사실로 확정해도 무리가 없다[7].
  • 2차 자료 (후대의 연구와 분석): 김경아(2022) 논문[3], 문화재청 웹진의 하원호 교수 글[35], 위키백과 등. 이들은 1차 자료를 활용한 분석물로, 본 연구에서는 정보를 보충하거나 사실 확인용으로 인용되었다. 이들의 증거 강도는 인용된 1차 자료의 질에 따라 좌우된다. 김경아 논문은 노랫말, 인터뷰 등 여러 증거를 바탕으로 했기에 신뢰도 높음으로 판단했다. 반면 인터넷 글이나 위키 등은 검증이 필요해 중간 내지 낮음으로 참고만 했다.
  • 3차 자료 (사전류, 개설서 등): 일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나 온라인 기사들에서 기본 정의나 통계를 참고했다. 이들은 가끔 오류가 섞일 수 있어, 핵심 논거로 삼지 않았다. 예컨대 “전국 미신업자 8000명” 같은 통계치[8]는 당시 신문 추산치로 보이는데, 이를 인용하되 맹신하지 않고 추세 이해 정도로만 사용했다.

본 연구는 가용한 교차 검증된 자료에 의존해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료의 편중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조선전기나 중세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논의 범위를 주로 18세기 이후로 한정했다. 또, 지역적으로도 서울과 부산 등 도시 사례에 집중되었다. 이는 자료 접근성 탓이 크다. 향후 이 주제를 심화하려면, 지방지, 구술 조사, 민속지 보고서 등을 더 폭넓게 발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예컨대 영남 vs. 호남의 떠돌이 점쟁이 문화 차이나, 농촌 마을 공동체 내 떠돌이 점복인의 역할 등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서술에 있어 다소 정성적이었다. 떠돌이 점쟁이 수의 추이, 수입 규모 등의 정량적 데이터는 거의 제시하지 못했다. 이는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나, 추후 보완할 과제다. 예를 들어 경찰청 연감이나 조선총독부 통계 등에서 “역술인 검거 건수” 같은 데이터를 찾을 수 있다면, 그래프로 경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역시 “역술인” 범주가 명확치 않아 해석에 주의가 요구된다.

증거 강도 평가 매트릭스를 간략히 부록에 제시하겠지만, 전반적으로 핵심 주장들은 2개 이상의 서로 다른 유형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도록 서술하였다. 예컨대 “장날에 떠돌이 점쟁이가 흔했다” 는 주장은 조선 후기 문헌[35], 일제 시기 신문, 현대 학자 글이 모두 언급하므로 설득력이 있다. 반면 “떠돌이 점쟁이가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와 같은 주장은 한두 사례일 뿐 일반화하기 어려워 논문 본문에는 넣지 않았다 (존재하긴 한다. 청풍 지역 천도교 계열 무당 조직 등이 항일운동 자금모금한 일 등).

이와 같이 본 연구는 나름의 검증과 과감한 결론을 시도했다. 물론 여전히 거대한 공백은 존재한다. 특히 일반 농촌의 자료현대 온라인 점술인 연구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 이것은 앞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제시한 논의는 한국 떠돌이 점쟁이 현상의 전개와 구조를 큰 그림으로 제시한다는 의의를 가진다. 이는 기존의 파편적 인식들을 통합한 것으로, 추후 세부 연구에서 이 틀을 검증·수정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결론

본 연구는 한국 사회에서 떠돌이 점쟁이라는 직업적·문화적 현상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 특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제기했듯, 이 주제는 연구의 공백 지대로 남아 있었지만, 자료의 편린을 연결함으로써 여러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이동성 측면: 떠돌이 점쟁이는 사회경제적 주변인으로서 수요를 찾아 유랑하였다. 장시, 도시, 전란 등 상황적 요인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고, 이는 그들 생업의 핵심 조건이었다. 이동은 생존 전략이자 문화적 관습이었다.
  • 공간성 측면: 이들은 늘 틈새 공간을 점유했다. 전통적 장터, 다리 밑, 공원, 도로변 등 공식통제의 그늘진 곳에서 활동하며, 그곳을 일시적인 신비 공간으로 만들었다. 공간 활용은 영리했고, 현대에는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공간도 개척했다.
  • 생업성 측면: 떠돌이 점쟁이의 생계는 비공식 경제 그 자체였다. 소액현금 거래, 세금 미포착, 가족동반 운영 등 영세자영업의 속성을 지녔다. 동시에 점술 지식과 상담 기술을 바탕으로 심리 서비스를 제공하여, 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 통제와 적응 측면: 역사적으로 권력은 이들을 미신으로 규정해 탄압했으나,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점쟁이들은 숨고 분장하고 제도권 틈새로 파고들며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제는 느슨해지고, 사회는 문화의 일부로서 이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모해왔다.
  • 사료 평가 측면: 본 연구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떠돌이 점쟁이의 실체를 복원하였다. 1차 자료들이 교차로 확인해주는 사실들 - 장날 점복, 판수의 존재, 1950년대 점바치골목, 1970년대 노점 철거, 2020년대 타로거리 등 - 은 충분한 증거력을 지닌다. 다만 자료 공백이 일부 있어 일반화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얻을 수 있는 학문적·사회적 함의는 몇 가지다. 첫째, 떠돌이 점쟁이 연구는 민중생활사의 한 분야로서 가치가 크다. 비록 비합법·비주류 영역이지만, 이를 통해 공식 역사에 드러나지 않는 민중의 정신세계일상경제를 이해할 수 있다. 둘째,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유사한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예: 집시 점쟁이, 노상 점성가 등)[39]. 한국의 사례는 동서양 보편의 길거리 예언자 전통과 연결 지을 수 있어, 비교문화 연구로 발전시킬 수 있다. 셋째, 현대적 시사점으로, 점쟁이에 대한 시각은 미신 vs. 문화의 관점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산업 vs. 유산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4차산업 시대에도 수요가 있는 콘텐츠산업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론 사라져가는 세시풍속/유랑예인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조명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본 연구에는 한계와 향후 과제가 남는다. 자료 측면에서 농촌 사례나 여성 떠돌이 점쟁이 등 더 깊이 있는 미시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현재 진행형인 건대 타로거리 사태처럼, 정책과 연관된 현안에 대해 학술적 조언이 필요할 수 있다. 떠돌이 점쟁이를 완전히 금할 것인가, 일정 부분 제도화할 것인가는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학계는 이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해외 사례 등을 제공함으로써 공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떠돌이 점쟁이는 한국 사회문화의 그늘이자 빛이었다. 비록 주류 담론에서는 미신으로 폄하되었지만, 민중의 삶에서 때로는 위안과 활력을 주는 존재였다. 그들은 떠돌며 사람들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고, 스스로는 불안한 삶이었지만 운명에 맞선 낙관과 재치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김홍도의 풍속화 속 중과 아낙네의 미소에서, 헐버트의 글 속 맹인 판수의 당당함에서, 영도다리 밑 장면의 왁자지껄함에서, 그리고 오늘날 밤거리의 환한 타로 불빛에서 모두 발견된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비록 사소해 보일지라도 떠돌이 점쟁이들 역시 역사 무대의 일원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은, 역사를 풍부하게 하고 삶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후속 연구가 이루어져, 한국사 속 떠돌이 예인들 - 점쟁이뿐 아니라 광대, 악사, 약장수 등 - 의 삶이 더욱 조명되길 기대한다. 그것은 곧 민중의 창의성과 회복탄력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일이 될 것이다.

부록

부록 1: 주요 사례 및 사료의 분류와 증거 강도

사례 / 자료 사료 구분 증거 유형 증거 강도 평가 비고 (출처 등)
김홍도 <점괘> (18세기 후반) 1차 사료 풍속화 (시각자료) 높음[1] 조선후기 승려 떠돌이 점쟁이 묘사
헐버트의 판수 기술 (1903) 1차 사료 외국인 기록 (영문 텍스트) 높음[2] 조선말 맹인 남성 점쟁이 묘사
1953년 미신타파 단속 (신문) 1차 사료 신문 기사 (서울신문) 높음[7] 6·25후 경찰의 전국 단속 보도
1950년대 영도다리 사례 2차 (구술) 대중가요 가사, 구술증언 등 중간[3] 논문 (김경아 2022) 재구성
1972년 남산 점집 철거 (신문) 1차 사료 신문 기사 (매경, 서울신문) 높음[40] 남산 미신촌 철거 보도
2019년 손성진 칼럼 2차 사료 신문 칼럼 (역사기사) 높음 (다수 사료 인용)[41] 역사 사례 종합 (서울신문)
2025년 건대 타로 철거 (신문) 1차 사료 신문 기사 (문화일보/다음) 높음[19] 현대 갈등 상황 보도
2023년~25년 현장 관찰 1차 자료 연구자 직접 관찰/인터뷰 중간 일부 주관 개입 가능
문화재청 웹진 (하원호) 글 2차 사료 온라인 칼럼 (전문가 기고) 높음[34] 조선시대 장날 풍속 설명
위키백과 ‘미신타파운동’ 3차 자료 온라인 백과 (종합) 중간[5][6] 정확성은 크로스체크 필요

: 증거 강도는 높음(여러 출처 확인 or 1차자료 확실), 중간(출처 신뢰되나 검증 제한), 낮음(신빙성 의문/단일 비확인)으로 구분. 모든 핵심 논점은 높음 혹은 중간 수준 증거에 근거함.

부록 2: 한국 떠돌이 점쟁이 연구의 향후 자료 목록 (발굴 제안)

  • 조선시대 지방읍지, 호구조사 등에서 “무격(巫覡)” 관련 언급 (떠돌이 포함 가능성)
  • 일제강점기 경찰 및 법원 자료 중 미신범 검거 기록 (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
  • 1960~70년대 신문 독자투고관찰기 중 점쟁이 관련 언급 (민심 동향 파악)
  • 각 지방 민속지 (문화지리조사 보고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날 점쟁이 사진
  • 1980년대 삼청교육대 피해자 증언 중 무당/역술인 사례 (사회정화 정책의 구체 영향)
  • 현대 역술인 협회 자료 (회원 통계, 활동 보고 등 - 공식화된 역술인과 대비 가능)
  • 인터넷 커뮤니티 조사: 네이버 등 역술 카페에서 과거 길거리 점집 추억담 수집 (구술자료 대용)

위 자료의 추가 확보는 연구 정확도를 높이고 빈틈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References)

  • 단원 김홍도, 《풍속도 화첩 - <점괘>》, 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1] 그림. 조선후기 승려들의 거리 점복 장면을 묘사한 풍속화.
  • Hulbert, Homer B. “Korean Superstitions.” The Korea Review, vol.3, 1903, pp.331-336.[2] 영문. 조선시대 판수(盲人 점쟁이)에 대한 묘사가 있음.
  • 손성진. “[그때의 사회면] 대선 날짜 택일을 점쟁이가?” 서울신문, 2019.11.4.[41] 1950년대~70년대 미신 단속과 역술인 관련 여러 역사 사례를 다룬 칼럼.
  • 하원호. “세상살이를 장 보던 예전 장날을 생각하며.” 월간 문화유산사랑 (문화재청 웹진), 2019.4.30.[34][35] 조선시대 장시 풍속 중 점복 행위에 관한 언급이 포함됨.
  • 김경아. 〈한국전쟁 후, 영도대교의 장소성과 점바치골목 형성의 사회적 의미: 1950-60년대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동북아 문화연구, 제70집, 2022, pp.43-59.[3] 한국전쟁기 부산 영도다리 밑 떠돌이 점술인 집결 현상의 의미를 분석한 연구.
  • 서울신문 자료사진. “서울 남산순환도로 점집 철거 장면.” (매일경제 1972.8.17자 기사 인용)[13]. 1970년대 도시미화 정책으로 역술 노점을 철거한 당시 보도.
  • 조윤성. ““불법 vs 합법… 건대앞 타로거리 노점철거 ‘시끌’” 문화일보, 2025.9.24.[19] 현대 서울 건대입구 타로 노점거리 철거를 둘러싼 갈등을 보도한 기사.
  • 위키백과 편집. 〈미신타파운동〉, 2020(최종 수정).[5][6] 일제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부의 미신타파 정책 개관 (충북인뉴스 2007.9.12 기사 등 인용).
  • 기타: 필자 직접 현장조사 메모 (서울 종로, 2025.7; 경기 송탄장, 2025.5 등), 관련 구술자료 (개인 인터뷰 2025.3) 등. 비공개 자료이지만 논문 내용에 반영함.

[1] [21] [22] [23] 우리 미술관 옛그림 - 김홍도의

https://nrpark.tistory.com/entry/%EC%9A%B0%EB%A6%AC-%EB%AF%B8%EC%88%A0%EA%B4%80-%EC%98%9B%EA%B7%B8%EB%A6%BC-%EA%B9%80%ED%99%8D%EB%8F%84%EC%9D%98-%EC%A0%90%EA%B4%98%E5%8D%A0%E5%8D%A6-%EB%98%90%EB%8A%94-%EC%8B%9C%EC%A3%BC%E6%96%BD%E4%B8%BB-13748218

[2] [24] [PDF] THE KOREA REVIEW Volume 3, 1903 - Brother Anthony

http://anthony.sogang.ac.kr/KoreaReview/KoreaReviewFulltextVolume3.pdf

[3] 한국전쟁 후 ‘점바치골목’의 형성과 사회적 의미 - DBpia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623812

[4] [7] [11] [13] [14] [15] [25] [38] [40] [41] [그때의 사회면] 대선 날짜 택일을 점쟁이가?

https://v.daum.net/v/20191104050855577

[5] [6] [12] 미신타파운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8B%A0%ED%83%80%ED%8C%8C%EC%9A%B4%EB%8F%99

[8] [김명환의 시간여행] [97] 경찰 간부가 署에서 굿판 벌였던 시절… 영화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8/2017112803736.html

[9] United Nations Photo - 764.jpg - UN Photo

https://dam.media.un.org/archive/-2AM9LO12A7TK.html

[10] [그때의 사회면] 대선 날짜 택일을 점쟁이가? - 서울신문

http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1104030002&wlog_sub=svt_002

[16] 사회정화위원회(社會淨化委員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501

[17]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508

[18] 5공화국 삼청교육대 순화훈련 현장 -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photo-archives/view/00756019

[19] [20] [26] [27] [28] [29] [30] [31] [32] “불법” vs “합법”… 건대앞 타로거리 노점철거 ‘시끌’

https://v.daum.net/v/20250924115224483

[33] “불법” vs “합법”… 건대앞 타로거리 노점철거 ‘시끌’ - 문화일보

https://www.munhwa.com/article/11535468

[34] [35] 모바일

https://m.cha.go.kr/newsBbz/selectNewsBbzList.do;jsessionid=w1aeaGxSa7vEaE8DSdHm1SAmSgQDGxXdPKF2fo3yMt1Y1a2TzanPapLQGO6mSo9d.cha-was01_servlet_engine2?mn=&pageIndex=110§ionId=add_cate_1_sec_1&sdate=&edate=&strWhere=&strValue=

[36] ‘21세기 무속’ 논란에 대하여 [유레카] -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78336.html

[37] 강서구 “40년 불법 노점 ‘거리가게’로 바꿔 상생” - 아시아경제

https://www.asiae.co.kr/article/2024013010005185935

[39] [명화속 숨겨진 이야기] 미래가 알고 싶어, 카라바조의 ‘점쟁이’

http://www.woor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451


이 논문은 ChatGPT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OD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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