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권력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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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마을에는 높고 긴 돌계단이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계단 양측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쌓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기묘한 경이감을 자아낸다. 힘겹게 계단을 올라서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바로 일제 시대 때 만들어진 경성 야스쿠니 신사의 계단이다. 한 때 거대한 토오리가 태평양 전쟁 전몰자들의 영령을 맞이하기 위해 서 있었을 터이나,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남은 자취는 오로지 장대한 돌계단 뿐이다. 심지어 그 계단마저도 반으로 쪼개져 엘레베이터가 설치되었다. 과거의 흔적은 철저하게 파괴 당하고 있다.

파괴는 건물처럼 유형의 무언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동네 미용실을 드나들며 토박이라 자칭하는 분들을 여럿 인터뷰 했다. 그리고 과거에 일제 신사가 있었다는 걸 아는 인터뷰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계단 윗 참에 옛 경성호국신사 자리라는 안내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묘한 오기가 생겨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조사해보았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현재 눕카페와 이마트가 위치한 건물 터가 옛 신사의 본당 자리라는 점, 80년대까지만 해도 신사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는 점 정도가 고작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사진마저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전쟁기 미군 항공 정찰 사진 1장, 본당 앞 참배 사진 1장이 고작이다. 참배 사진은 정말로 야스쿠니 신사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거대했을 본당과 부속 건물들이 어떻게 해체되어 사라졌는지에 대한 기억마저 전해지지 않는다. 야스쿠니 신사는 기억과 전승이라는 무형의 자산마저 파괴당했다.

흔히들 일본 제국과 조선총독부라 하면 막강한 압제자를 떠올린다. 유사 이래 한반도에 출현한 가장 강대한 권력이다. 그러나 폭압의 정점이었던 태평양 전쟁기에서조차 조선인은 일본인에 대한 경멸과 면종복배로 일관했다. 조센징은 패야 말을 듣는다고 했던가? 그 결과는 광복 이후의 철저한 파괴와 망각이었다. 총독부의 36년에 걸친 동화 정책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피지배자의 국가 이념에 대한 진정성 있는 협조가 없다면 일견 강대해보이는 권력이란 그저 허장성세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가 남긴 역사의 교훈이다.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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