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시대의 몰락-전장에서의 가치를 중심으로
기사 우위의 시대
온몸을 쇠로 둘러 무장한 기사. 중세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다. 대단히 튼튼해 보이는 기사의 갑옷은 한가지 오해를 낳았다. ‘기사(騎士)[1]는 방어를 위해 더욱더 무거운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무게는 마침내 100kg에 달하여 기사는 거동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기사가 말에 오르려면 기중기의 힘을 빌려야 했고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기형적인 발달 끝에 기사는 전장에서 저절로 사라졌다.’ 기사에 대해 널리 퍼진 이야기다. 그리고 널리 퍼진 오해이기도 하다.이러한 오해는 사실이 아니며 기사의 갑옷은 중세 내내 고정된 어떠한 형태로 계속되지 않았다. 중세 내내 갑옷은 전장의 환경과 진보하는 기술에 맞춰 꾸준히 변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전투 방식, 더 나아가 전장의 모습은 11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2]. 기사는 중세 전장의 꽃이었으며 이는 전술한 오해와 달리 그들의 탁월한 전투력에 기반한다. 그러나 그들이 전장에서 도태된 것도 사실이다. 14~15세기에는 기사 우위의 시대가 크게 바뀌는 혁신적인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본고는 기사가 전장에서 어떤 가치를 지녔으며 기사 우위의 시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종식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기사 시대의 몰락을 예고하는 2차례의 전투, 크레시와 라우펜 전투를 중심으로 중세의 전장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변화의 종착점으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파비아 전투를 통해[3]기사 우위의 시대가 최종적으로 몰락하는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기사, 전장에서의 가치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기병 돌격만으로도 보병 군대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서유럽에 침입한 이슬람교도와 아바르족, 헝가리의 군대는 서유럽 세계에 기병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마침내 카롤링거 왕조 초기, 전장에서 중무장 기병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사 계급이 탄생하였다. 당시에는 중무장 기사단이 전투력의 핵심이었다[4]. 다른 병종들은 기사의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였다. 승부는 결국 언제나 기사들에게 달려있었다. 그들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다른 병종들에게도 버팀목이고 신경이고 골격이었다[5]. 기사는 당시 유일한 결정적 병종이었다. 오랜 훈련을 거쳐 말과 무기를 자신의 몸처럼 다룰 수 있게 된 기사[6]들은 적을 향해 ‘신부를 안장 앞에 태우고 이동하는 신랑들 같이 침착하게[7]’ 이동하여 마치 육중한 철벽[8]이 밀려오는 듯 돌격하였다. 이로서 기사는 적에게 치명적이고 조직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충격전법 앞에서 보병, 궁수, 경기병[9]은 기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보병과 궁병[10]이 때때로 전장에서 기사들에게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병종[11]으로서의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이들 보조병종이 계속 쓰였던 이유는 이들을 동원하는데 드는 비용이 기사에 비해 몹시 낮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병들이 함께 왔으면서도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뒤에 남겨져 있었다고 특별히 언급된 기록들도 매우 흔했다[12]. 중무장 보병은 고대부터 기병의 돌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병종이었다. 로마의 군단병은 밀집대형을 취하고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보병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13]. 그들에게는 기사를 상대할 만큼의 침착성과 용기가 없었다. 이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유럽인이 보병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중세의 보병은 경기병이나 궁수와 같이 보조병종이었을 뿐이고 “100마리의 말은 보병 1000명과 같은 가치가 있다[14]”고 했다.
유일한 결정적 병종으로서 기사의 우위는 그들의 장비에서 기반한다. 등자의 도입과 강력한 갑옷, 높은 안장, 군마의 등장이 기마충격전법을 가능하게 했다. 서기 1세기경 서유럽에 도입된 높은 안장과 대형마destrie의 등장은 기병의 효율성을 다소 높였다[15]. 등자는 8세기 초 무렵에 서유럽에 처음 등장하였다.[16] 이들 장비는 기마충격전을 가능하게 했다. 기마충격전은 오랜 훈련을 거친 전문적인 직업 전사를 필요로 했다. 이들은 자신을 격렬한 기마충격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갑옷을 걸쳤다. 기사의 갑옷은 초기의 사슬 갑옷에서 시작한다. 이 갑옷은 방어력과 활동성을 동시에 보장해주었지만 12세기경 본격적인 석궁 부대가 등장하면서[17]방어력 제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3세기 초, 갑옷 장인들은 당시 새롭게 발견된 강철 제조법[18]을 적용하여 사슬 갑옷을 철판으로 몸을 보호하는 새로운 갑옷으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진행된 이러한 과도기적 과정을 거쳐 1410년 최초로 완벽하게 판금화 된 한 벌의 갑옷이 등장[19]한다. 중세의 제철 기술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에 불과 1.21mm[20]에 불과한 두께에도 일반적인 칼과 창의 공격으로는 갑옷 착용자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고 갑옷의 무게는 20~30kg[21]에 안착하였다. 활동성의 제약이라는 판금갑옷의 단점은 15세기 초에 개선되었다. 몸을 움직일 때 갑옷의 각 부위는 혀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22]. 따라서 갑옷은 보호 기능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활동성이 강화되었다. [23] 기사는 판금갑옷을 착용하고서도 원하는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었다.[24]이로서 기사는 충격전을 수행하는 중기병으로서 가장 발달한 형태를 띄게 된다. 그러나 기사의 우위는 그 전성기에 이미 도전받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 1346
크레시 전투는 백년전쟁 중 가장 중요한 전투이자 전술적으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기사를 주력으로 한 프랑스의 4만 군대가 6천의 장궁병을 주력으로 삼는 잉글랜드의 1만2천 군대와 크레시 앙 퐁티에서 대결했다. 만약 양측이 보통 때와 같은 기사 전투로 이어졌다면 틀림없이 프랑스가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투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압도적인 군세를 맞아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3세는 측면을 숲으로 보호받는 45도 경사의 언덕에 진을 쳤다. 장궁병의 전열 사이에 보병이 배치되어 이들을 보호할 수 있게 하였고 기사들도 말에서 내려 보병과 함께 전열에 섰다[25]. 잉글랜드군은 아침부터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오후 3시에나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왕 필립6세는 전열을 정비한 후 공격을 시작하려 했으나 병력을 통제하는데 실패하고 결정적인 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선 석궁을 주무기로 하는 6천의 제노바 용병들이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전투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 장궁병이 만들어낸 화살의 폭풍에 제노바 용병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며 혼란에 빠졌다. 이들의 무능에 분노한 프랑스 기사들은 아군을 짓밟으며 곧장 돌격에 나섰다[26]. 15차례나 계속된 돌격은 그때마다 장궁병의 공격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미처 적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어갔다. 가까스로 적진에 도달한 기사도 있었지만 잉글랜드군 보병에게 곧 격퇴당했다. 필립6세 자신도 영국군 가까이 접근했으나 타고 있던 말이 화살을 맞자 곧바로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퇴각했다. 장 르벨과 프루아사르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아마도 1천2백여 명의 기사를 잃었을 것이다[27]. 잉글랜드군의 피해는 많지 않았다. 이 전투로 프랑스는 이후 200년간 잉글랜드 왕실의 가장 중요한 장식이 되는 칼레를 잃게 된다.
이 전투로 장궁이 기사를 상대하기에 효과적인 무기임이 입증되었다. 당시 프랑스 기사의 갑옷[28]으로는 장궁의 화살로부터 완전히 안전할 수 없었다[29]. 최대 사거리 약 255m, 조준 사격시 분당 6발, 지향 사격시12발을 발사할 수 있는 장궁은 폭발적인 화력으로 프랑스 기사들의 기동력을 마비시켰으며[30]혼란시켰다.석궁 역시 효과적인 무기였으나[31]크레시 전투 당일에 겹친 여러 불운[32]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장궁에 비해 발사 속도가 너무나 느렸다[33]. 장궁은 현대적 의미의 화력 개념을 처음으로 전장에서 실현해냈다[34].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장궁으로 푸아티에와 아쟁쿠르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크레시의 승리 이후에도 석궁은 여전히 장궁과 대등한 무기로 취급받았다. 단지 장궁만으로는 승리를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여 갑옷 제작기술도 발전하여 1424년 베르딜 전투[35]에서 장궁은 밀라노의 신형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크레시 전투의 중요성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전술가의 고민 중 하나였던 문제의 답을 내놓았다. 어떻게 하면 궁수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도주하지 않고 화살을 발사하게 하느냐? 에드워드는 이를 위해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궁수와 창병과 함께 대형에 서도록 했다.크레시 전투 때 기사들의 주된 임무는 평민 전사 집단에 지속적으로 사기를 불어넣는데 있었고 기사들이 이들과 함께 발로 싸운다면 그런 효과를 최대로 거둘 수 있었다[36][37]. 단지 기사가 말에서 내렸다는 것 만으로는 중대한 전술적 전환이라 할 수는 없다. 말에서 내린 기사는 평민 전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는 있었다[38]. 그러나 기사는 어디까지나 말 위에서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하며 두 발로 전투할 경우 갑옷 비착용자에 비해 빠르게 체력을 소모한다. 그렇기에 크레시 전투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새로운 전투형태의 탄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병종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제병합동전술의 발견, 그리고 이를 통해 평민 전사들도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의 군단병이 그러했던 것처럼 보병만으로 기사를 상대할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한 답은 스위스인들이 내놓는다.
라우펜 전투 1339
스위스인들은 험난한 지형 덕분에 오래 전부터 외부와 고립되어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스위스를 거쳐 알프스 북부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통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들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공격해왔으며 모르가르텐의 승리는 스위스에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매복과 지형을 이용한 승리였다. 기사의 위력을 신뢰하는 합스부르크는 기사를 중심으로 한4천의 군대를 파견했고 드디어 개활지에서 승부를 겨룰 기회를 얻었다. 이에 맞서는 스위스군은 6천[39]이었다.
전투 경과는 다음과 같다. 숫자는 많으나 전력상 열세에 놓여있다고 여긴 스위스군은 낮은 언덕 위에 포진했다. 스위스의 유리한 위치를 본 합스부르크군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적진 앞에서 기사들의 퍼레이드를 벌이며 분견대를 파견해 스위스군을 포위했다. 겁에 질린 2천의 스위스군 후위대가 달아나자 분견대는 추격을 시작했다. 합스부르크군 본진이 선제 공격을 시작하고, 스위스군도 지형의 이점을 살려 반격에 나섰다. 3천의 우익은 놀랍게도 기사들을 밀어붙였지만 1천의 좌익은 공격에 실패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좌익은 밀집대형을 이루고 고슴도치처럼 창을 내밀어 저항하며 시간을 끌었다. 마침내 우익이 상대를 격파하고 좌익을 지원하자 기사들은 패배했다. 이 패배로 80명의 제후와 수백 명의 기사, 시종이 목숨을 잃었다[40].
평민 보병이 기사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평민 보병이 개활지에서 기사를 격파하였다. 이를 위한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로마의 군단병이 기병을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조직력과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전장에서 기사의 우위가 자리잡은 이후 평민 전사들은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오랬동안 그들은 개별적인 전사로서 전장에 섰고, 기사에게 패했다. 스위스군은 하나의 통일된 의지 하에 하나의 힘으로 결합된 대형인 전술조직을 형성[41]했다. 현대적 의미의 보병 부대[42]가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무기와 전투 대형을 더욱 발전시켰다. 평균 길이 5m에 달하는 장창pike의 채용[43]은 스위스군이 기사를 상대로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44]. 이 무기는 기사의 돌격에 저항하기에 대단히 적합했다. 선두의 네 줄이 긴 창을 일제히 앞으로 내미는 대형은 방어벽을 만들 때뿐만 아니라 집단공격을 가할 때도 마찬가지로 효과적이었다.[45] 전투 대형의 외곽선에는 장창병이 편성되고, 내부에는 짧은 무기[46]를 든 병력이 편성되었다[47].[48]궁수는 이 전투 본대의 전방과 측방에 배치되어 전투하였다[49]. 스위스인들은 병력 수와 관계없이 늘 3개의 사다리꼴 방진을 편성했다. 사다리꼴 방진의 채용으로 행군 중이건 전투 중이건 가리지 않는 유연성을 전술 변화가 가능했으며[50]적과 최초 접근시의 상황에 따라 후미의 병력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어떤 기사집단도 이렇게 편성된 3개의 방진을 동시에 저지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라우펜 전투의 재현이었다. 그들은 150년 이상 계속된 승리를 통해 자신감과 상호 신뢰를 키우며 무적의 명성을 얻었다. 스위스 방진은 보병이면서도 감히 기사들을 공격했고 요새화 된 진지를 휩쓸기까지 했다[51]. 기사 우위의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조차도 스위스의 승리가 단지 행운이 아닌 독특하고 새로운 군사력으로 평가했다. 스위스 전투방식의 우수성을 인식한 다른 민족들은 이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파비아 전투 1525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은 파비아 전투는 크레시와 라우펜에서 촉발된 일련의 변화의 종착점이자 화약 혁명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기사는 전장에서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스위스 용병과 스위스식 방진을 이룬 보병이 주축이 된1만7천의 보병과 기사를 주축으로 한 6천5백의 기병을 보유했고, 제국은 스페인과 게르만의 상비군화한 용병을 주축으로 한 1만9천 보병과 기사가 주축이 된 기병 4천을 보유했다. 대포는 프랑스가 53문, 제국은17문이었다.
전투 경과는 다음과 같다. 유리한 위치에 있던 프랑스군은 전투 시작과 함께 맹렬한 포격으로 제국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제국군의 대포는 불리한 지형으로 인해 활약하지 못하고 곧 스위스 용병의 공격에 포획당했다. 전투가 결정적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믿은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는[52]휘하 기병들을 이끌고 제국군 기병을 격퇴하며 제국군 깊숙히 돌격해나갔다. 프랑스가 승리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돌격으로 프랑스 포병은 더 이상 제국군을 향해 포격할 수 없게 되었고, 프랑스 보병은 기병과 분단됐다. 제국군 소총병들이 기병을 지원하기 시작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소총병들의 강력한 사격으로 프랑스 기병은 무너졌고, 프랑스 보병은 제국 보병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마침내 프랑스가 국왕을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며 승부가 났다.
크레시와 라우펜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파비아 전투까지 기사는 여전히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파비아 전투에서 기사의 갑옷은 소총병의 공격 앞에 무력했다[53]. 기사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머스켓[54]은 200~240걸음 밖에서 갑옷을 꿰뚫을 수 있었다. 16세기 말에 이르자 갑옷은 더 이상 착용되지 않았고[55]기사는 중무장 기병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했다. 이전까지의 화기는 유치하고 조작이 불편하여 그 효과가 의심스런[56]수준이었다[57]. 그러나 이탈리아 전쟁 초기에 이 무기는 마침내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무기로 발전하게 되었다[58]. 소총병은 장창보병과 결합하여 제국의 새로운 진형,테르시오(Tercio)[59]를 구성하였고 보병과 ‘새로운 궁병’은 기사의 돌격에 대한 대책을 완벽하게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기사 돌격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충격 효과는 야전 대포에 의해 대체되었다. 초기의 대포는 너무 무거워서 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공성전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였다[60]. 그러나 대포의 가치를 인식한 서유럽의 지휘관들은 곧 대포를 야전에서도 활용하였고[61], 파비아 전투의 패배[62]에도 불구하고 소총병과 보병, 기병과 함께 포병을 어떻게 운용해야 할 지의 문제가 지휘관의 고민이 되었다. 한 때 전장의 유일한 결정적 병종으로 위치하던 기사는 그 우위를 잃었고 마침내 존재 의의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기병대로의 전환
기사의 시대는 이렇게 끝났다. 본고는 기사의 전장에서의 가치가 사라진 이후, 기병대로 전환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살핌으로서 결론을 대신하겠다. 전장의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유능한 개인 전사 집단으로서 기사는 존속할 수 없었다. 기사는 전술 조직을 갖춘 기병대로 전환하며 두 종류의 병과로 나뉘게 된다. 중장갑을 벗고 기동성을 극대화 한 경기병[63]과, 총탄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갑옷을 입고 적에게 접근하여 사격하는 퀴레시어(cuirassier) 기병이 그것이다. 경기병은 후사르(Husar)라 불렸다. 이는 본래 헝가리 기병을 뜻하는 말로서[64]기사의 직접적인 후예라고 하기는 어렵다. 중무장 기병으로서 기사의 진정한 후예는 퀴레시어 기병이다[65]. 퀴레시어 기병은 총탄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갑옷을 착용하고[66]권총으로 적의 보병 대열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카라콜(Caracole) 기동이 실시되었다. 일명 달팽이 기동[67]이라고도 불린 이 전법은 고도의 조직력을 필요로 했다. 특히 퀴레시어 기병간의 전투일 경우 승부는 어느 쪽이 이 기동을 더 유연하고 정확하게 실시하느냐에 따라 즉, 어느 쪽이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에 달려있었다[68]. 일찍이 보병이 그랬던 것처럼, 기사 역시 개개인의 전사에서 하나의 조직화 된 전술 대형으로 변했고 이후에도 기병대는 여전히 중요한 전력으로서 보병대를 압도했으며 30년전쟁에 이르면 오히려 군대에서 기병의 숫자가 보병보다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69]. 기사 시대의 종말은 기병대의 시대의 시작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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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수업에 제출한 레포트
급마무리 하느라 후반부의 억지성이 다분합니다.
지적 부탁드려요
[1]중세 서유럽의 기사(騎士)를 가리킨다. 이하 본고에서는 기사란 용어를 이러한 의미로 한정하여 사용하겠다.
[2]11세기와 15세기 전투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중기병인 기사가 주축이 되는 전장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261
[3]파비아 전투는 서양 시대 구분 상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속하나 이 시기까지도 중세적 기사는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본고는 파비아 전투를 정점으로 기사의 몰락과 변화한 전장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4]권터 블루멘트리트, 류제승 역, 『전략과 전술』, 한울아카데미, 1994, pp148
[5]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289
[6]“기사답게 싸우려면 소년 시절부터 배워야 한다.” 린 화이트 주니어, 강일휴 역,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지식의 풍경, 2005, p49
[7]Ian von Heelu의 서사시. V4898.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275에서 재인용
[8]기사는 전술과 관련없는 폭도 집단이라는 오해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전술은 ‘교전을 위한 병력 운용’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정의에 따르면, 돌격 시 통제된 밀집 대형을 이루고 이동할수록 칭송받았으며 이는 전술이라 칭할 만 하다.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는 기사를 1열 횡대로 정렬시킨다. “전장이 넓다. 퍼져라. 적이 우리를 포위하지 못하게 해야한다.”(델브뤼크,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282) 그러나 밀집대형 등의 통제는 어디까지나 전투 돌입 직전까지만 행해졌고 접전에 들어간 이후에는 포기되었다. 기사들은 개인적, 비조직적으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혼전을 했고 여기에는 정면도 측면도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군기가 없는 군대는 무질서한 폭도에 지나지 않으며 기사는 군기가 없었기에 진정한 군인이라 할 수 없다는 비판이 있다. 기사에게 군기가 없었다는 지적은 사실이며 그 말대로 기사는 군인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군기가 아니었다. 기사는 당시 단 하나의 결정적인 병종이었고 승부는 오로지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들은 다른 무엇에 기댈 수 없었다. 오로지 승리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개인적 명예에 대한 갈망이 그들의 버팀목이자 삶의 목표였다. 군인 이외에는 모두 폭도라는 주장은 현대의 개념일 뿐이며 기사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전사였다. 기사 집단의 특수성은 이러한 시대적 한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9]경기병 중 기마궁수는 유라시아 평원에서 유래한 강력한 병종이다. 서유럽인이 처음으로 기마궁수를 상대했던 헝가리인과의 전투, 중동 십자군 전역의 전투, 몽골과의 전투에서 기마궁수는 중기병을 상대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입증해냈다. 그러나 서유럽인은 기마궁수를 양성하지 않았다. 기마궁수는 넓은 평원에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는 병종이었고 서유럽은 산악과 숲이 많았다. 또한 기마궁수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서유럽의 선택은 중기병, 즉 기사였다. 서유럽과 십자군의 군주들은 기마궁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투르코폴(Turkopole)’이라 불린 기마궁수 부대를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10]석궁병을 포함한 보병 궁수는 원거리에서 기사나 그의 말에서 갑옷으로 방어되지 않은 부분을 쏘아 맞춤으로서 그들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사의 기동력은 보병 궁수와 기사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힐 수 있었고 지형의 보호나 다른 병종의 보호가 없는 한 궁수는 곧 학살당했다. 후일의 크레시 전투는 이 공식을 뒤집는다.
[11]기사가 적과 충돌하기 전, 궁수는 전선 최전열에 배치되어 적에게 가능한 한 많은 피해를 준 후 상대 기사와 격돌하기 직전 퇴각하여 아군 기사의 보호를 받는 전술도 널리 쓰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에서 궁수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고, 이마저도 적시에 퇴각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아군 기사의 진격에 방해물이 되었다. 크레시 전투에서 제노바 석궁병이 당한 참사는 좋은 예다.
[12]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273
[13]설사 보병이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는 경우가 있었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수세적 상황에 몰린 상태에서의 분전이었을 뿐, 공세로 전환하여 적을 분쇄하는 상황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14]Hondert orsse ende M. man Dat’s al eens. 기아르Guiart, 「왕계보Branche des royeax lignages」¹. 『역사의 귀감Spiegel historical』, 제Ⅳ편, 제ⅩⅩⅤ장을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264에서 재인용
[15]린 화이트 주니어, 강일휴 역,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지식의 풍경, p24
[16]전게서, p41
[17]석궁이란 무기 자체는 이미 기원전6세기부터 존재했지만 서유럽에서는 12세기경에야 본격적인 석궁 부대가 등장하였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석궁의 예찬자로서 그 군사적 가치를 깨닫고 이를 능숙하게 전장에서 활용했다. 석궁은 사슬 갑옷을 꿰뚫을 수 있는 위력을 지녔기에 기사에게도 위협적인 무기였다. 사자심왕 자신조차도 공성전 중 석궁의 화살에 어깨에서 목까지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한다.
[18]중세의 갑옷 장인들은 충격으로부터 갑옷 착용자를 보호하며 내구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탄소강으로 갑옷을 제작하기를 선호했다. 중탄소강은 고탄소강보다 순수 강도는 약하지만 유연하여 한계치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조금씩 휘어들어가면서 충격을 감소시킨다. 결과적으로 더 나은 내구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19]고대 로마의 검투 시합에 등장한 쿠르펠라리우스(Crupellarius)류의 검투사는 전신을 철판으로 둘러 무장한 검투사 종류를 지칭했다. 이들이 서기 21년의 갈리아 반란에 참전하였는데 이것이 전장에서 철판으로 전신을 두른 전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고대의 갑옷 제작 기술은 중세에 미치지 못했기에 갑옷은 무겁고 둔중하여 정규 부대가 되지는 못하였다.
[20]가장 두껍다는 토너먼트용 갑옷조차도 1.9mm에 불과하다. 갑옷의 두께에 관한 자료는 현대의 갑옷제조업체인 Best Amoury.co의 홈페이지 http://www.bestarmour.com/의 자료를 참조.
[21]http://www.bestarmour.com/faq와 The Oakeshott Institute의 홈페이지 http://www.oakeshott.org/metal.html 참조
[22]만프레트 라이츠, 이현정 역, 『중세산책』,플래닛 미디어, 2006, pp113
[23]20~30kg가 적지 않은 무게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군인의 완전 군장도 40kg에 가까운 무게이다. 오히려 갑옷이 제공하는 방어력은 기사로 하여금 전장에서 갑옷 비착용자 이상의 활동성을 보장해주었을 것이다.
[24]영국의 헨리5세는 완전 무장을 하고서도 아무런 도움없이 말 위로 쉽게 뛰어오르는 재주를 선보였다 하며 이는 모든 기사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심지어 어느 기사는 물에 빠졌음에도 살아나오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Ewart Oakeshott,『European Weapons and Armour』, Boydell Press, 2000, pp107
[25]하마 기사의 전통은 웨일즈와 아일랜드 전역에서 비롯되었다. 잉글랜드인은 여기서 보병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곳은 프랑스와 달리 숲과 늪지 같은 좁은 공간에서 전투를 벌이는 일이 많았고 이 경우 민첩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는 보병이 중무장 한 기사보다 우위에 있었다. 『아일랜드 정복』, 작품번호 Ⅴ번, pp395.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한국학술정보, 2009, pp267에서 재인용
[26]보병과 하마 기사, 궁수가 긴밀히 협조한 잉글랜드군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27]They made just report of that they had seen, and said how there were eleven great princes dead, fourscore banners, twelve hundred knights, and more than thirty thousand other. Another text makes the loss of persons below the rank of knight 15,000 or 16,000, including the men of the towns. Both estimates must be greatly exaggerated. Michael of Northburgh says that 1542 were killed in the battle and about 2000 on the next day. The great princes killed were the king of Bohemia, the duke of Lorraine, the earls of Alencon, Flanders, Blois, Auxerre, Harcourt, Saint-Pol, Aumale, the grand prior of France and the archbishop of Rouen. Charles W Eliot ed, 『Chronicle and Romance -FROISSART,MALORY,HOLINSHED-』, The Project Gutenberg EBook of The Harvard Classics, 2006, p30
[28]당시 프랑스 기사의 갑옷은 사슬갑옷에서 판금갑옷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시기에 있었다.
[29]13세기의 장궁을 현대에 검증한 결과 그것은 최대 1400피트파운드에 달하는 힘을 뿜어낼 수 있음이 드러났다. (…) 그 화살은 기병의 허벅지에 정확히 명중했고, 다리 보호용 갑옷을 관통한 다음 허벅지와 안장을 완벽하게 뚫고 들어가 말을 죽여버렸다. 어니스트 볼크먼, 석기용 역,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이마고, 2003, p95~99
[30]당시엔 아직 마갑이 충실하지 못했다.
[31]석궁은 정확하고 강력한 발사무기이며, 전통적인 활을 쏘는데 필요로 하는 기술과 힘이 부족한 사람도 사용할 수 있다.최대 사거리 약 360m로 장궁과 마찬가지로 유효사거리 내에서 갑옷을 관통시킬 수 있었다. The diagram group, 조필군·노우주 역, 『무기의 세계사:역사속의 신무기』, 노드미디어, 2009, pp102
[32]첫째, 석궁의 활시위가 비에 젖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둘째, 오랜 강행군에 몹시 지쳐있었다. 셋째, 알랑송 백작의 위협에 못이겨 황급히 전투에 나서는 바람에 파비스 방패를 챙겨오지 못했다.
[33]윈치를 사용하는 석궁은 분당 1발, 벨트와 집게발을 사용하는 석궁은 분당 4발. The diagram group, 조필군·노우주 역,『무기의 세계사:역사속의 신무기』, 노드미디어, 2009, pp103
[34]궁수는 전투를 위해서는 최소한 수천명은 되어야 한다. 또한 이 병종은 잘 훈련된 사람들로 운용될 경우 그 능력을 가장 잘 보여줄 것이다. 이는 세계 궁수들의 꽃인 잉글랜드 궁수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서기1465년 7월 16일 몽레리 전투에 관한 『코미네commines의 필리프 비망록』제1편, 제2장,p13.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 한국학술정보, 2009, pp517에서 재인용. 당시 잉글랜드 궁수들은 이미 현대적 의미의 화력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35]베르딜 전투 전투 경과는 다음과 같다. 영국군 8천, 프랑스군 1만6천이 1424년 베르딜에서 격돌했다. 프랑스군에는 밀라노식 신형갑옷을 입은 2천명의 이탈리아 용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장궁병과 하마기사가 주축을 이룬 영국군은 크레시에서와 같이 화살의 폭풍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신형 갑옷을 입은 이탈리아 용병들은 화살을 튕겨내며 그대로 궁수들에게로 돌격해 궁수들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고 영국군은 혼란에 빠진다. 영국에게는 다행히도 이탈리아 용병은 궁수들을 격퇴한 후 영국군을 지나쳐 보급부대를 약탈하러 가버리고 그 사이 영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프랑스군을 물리친다.
[36]기사는 말에 타고 있을 때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크레시 전투 때 그들이 말에서 내렸고, 말을 자신의 근처에 배치하지도 않았다. 기사들이 그들을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은 평민 전사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전장에서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37]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445
[38]이들이 불러일으킨 심리적 효과는 훗날 장교의 원형이 된다
[39]스위스 측에서 쓰여진 것이 분명한 『라우펜 전투』에서는 보병 1만6천에 기병 1천이라 했다.(…)물론 이 수치들은 무가치하다.(…)야전에 투입한 병력이 총 4천명만 되었다 해도 이는 대단히 큰 병력이다.(…)반면 베른 측 병력은 산림주들이 보낸 병력 1천명을 포함 총 6천명이었다 하는데 이 수치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546~547
[40]에마누엘 부라생, 임호경 역, 『중세의 기사들』, 동문선, 1995, p36
[41]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633
[42]델브뤼크는 전게서 pp633에서 현대적 의미의 보병부대임을 판단하는 기준을 ‘기병들과 개활지에서 싸울 수 있는지의 여부’라 정의했다.
[43]라우펜 전투 중, 좌익의 위기 당시의 대처법은 스위스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무기를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파이크는 1327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스위스 용병들이 사용했다는 첫 번째 기록은 1425년이 돼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Osprey Publish, 신재호 편역, 『Men-at-Arms』, 플래닛 미디어, 2009, p77
[44] 기사가 장창진형에 돌격하면 꼬치구이가 된다는 오해가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기사의 갑옷은 파이크에 관통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장창으로는 기사의 갑옷을 뚫을 수 없다. 장창의 역할은 기사의 돌격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말은 장창의 벽 속으로 들어가길 거부했고, 기사는 자신의 무기가 적에게 닿기 전에 먼저 적의 무기를 막거나 피해야 했다. 이로 기사는 자신의 최대 강점인 충격전법을 예전처럼 효과적으로 쓸 수 없게 되었다. 설사 갑옷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적병 한명을 죽인다 해도 예전과 같은 돌파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기사는 할버드나 폴암류 무기에 의해 말에서 끌어내려져 포로로 잡히거나 살해당했다. 그랑송(1476)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이 장창 방진에 대해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어서 약화시킨 후, 공작의 가신단 소속 기사들이 측면을 돌파하고 군기를 포획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이미 장창을 상대하느라 돌격력이 상쇄된 상태에서 방진 중앙의 할버드병의 반격을 받아 격퇴되었다.
[45]버나드 로 몽고메리, 승영조 역, 『전쟁의 역사』권1, 책세상, 1996, pp286
[46]짧은 무기로는 주로 도끼창이 쓰였다. 적이 말 등위에 있어도 낚아채거나 때리고 찌를 수 있는 무기였다. 도끼창(Halberd)이 처음 만들어지고 이름이 붙여진 곳이 스위스다. The diagram group, 조필군·노우주 역, 『무기의 세계사:역사속의 신무기』, 노드미디어, 2009, pp57~59
[47]외곽의 장창병이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제압하면, 대형 내부의 짧은 무기를 든 병사들이 마무리를 지었다.
[48]권터 블루멘트리트, 류제승 역, 『전략과 전술』, 한울아카데미, 1994, pp167
[49]스위스인은 유격군 중에 빈약하나마 소화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50]스위스인은 가벼운 무장(원래는 가난 때문이었지만, 후일 이점이 발견된 경장) 덕분에 대단한 기동성을 갖게 되었다.마키아벨리는 ‘행군할 때나 전투대형을 갖출 때, 그들보다 민첩한 군대는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승영조 역, 『전쟁의 역사』권1, 책세상, 1996,pp286
[51]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638
[52]이 때 국왕은 이러한 유리한 국면을 유지하는 대신 적군과 정면으로 맞부딪히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황제군이 거의 와해 직전에 있다고 믿은 국왕은 그의 전위 기병대를 이끌고 공격하게 한다. 샤를 테라스의 글. 에마누엘 부라생,임호경 역, 『중세의 기사들』, 동문선, 1995, pp293에서 재인용
[53]파비아 전투는 모든 병사들 중에서 프랑스 기병대 인원들에게 특히 가혹하고 감당하기 힘들었다.(…)갑옷을 입은 기병만 관통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2명의 병사와 2필의 말을 관통할 때도 있었다. 그 결과 들판에는 불쌍한 귀족 기사들의 학살당한 시체와 죽어 가는 말의 궁둥이들로 뒤덮였다. 조비우스, 『열 아홉 유명인의 생애Le Vite dicenove huomini illustri』「페스카라의 생애Leben Pescaras」, Tomb 1, im opera Tomb 2, pp403~405.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4, 한국학술정보, 2009, pp51~52에서 재인용. 프랑스 기병들은 적진 50야드 전방까지도 채 접근하지 못했다. 그날이 저물 무렵까지 총 8000여 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쓰러졌다. 어니스트 볼크먼, 석기용 역,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이마고, 2003,pp175
[54]당시의 소총에는 아퀴버스와 머스킷의 두 종류가 있었다. 아퀴버스의 탄환은 너무 약해서 기사의 중장갑을 뚫기 어려웠지만 머스킷을 무거워 다루기 어려운 대신 무거운 탄환을 쏨으로서 기사의 중장갑을 뚫을 수 있었다.
[55]존 키건, 유병진 역, 『세계전쟁사』,까치,1996,pp 457
[56]마키아벨리의 『병법Kriegskunst』에서는 화승총과 야포를 별로 효과가 없는 무기로 취급하면서 화승총은 예를 들어 통로를 점령한 농민들을 겁을 주기 위한 무기로나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화승총과 야포의 위험성을 언급한 구절이 매우 많은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4, 한국학술정보, 2009, p46
[57]활과 석궁은 사거리가 150보로서 특히 밀집 표적을 제압하는데 유용한 무기였다. 반면 최초 소화기의 사거리는50보를 초과하지 못했다. 활과 석궁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연속 사격이 가능했지만, 소화기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권터 블루멘트리트, 류제승 역, 『전략과 전술』, 한울아카데미, 1994, pp177
[58]버나드 로 몽고메리, 승영조 역, 『전쟁의 역사』권1, 책세상, 1996, pp318
[59]테르시오는 소총병과 장창보병을 조합한 방진이다. 중앙에 장창 보병이 방진을 이루고 이 방진의 사방을 소총병이 에워싼다. 네 귀퉁이에는 소총병이 각각 방진을 이룬다. 전체 방진의 앞에는 파괴력이 큰 머스킷병을 배치한다. 사방의 소총병이 끊임없이 사격하여 적에게 손실을 주고, 적의 공격으로 소총병이 위험해지면 장창보병이 나서서 방어한다. 두 병종의 결합은 마치 이동하는 요새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60]최초의 야포는 1382년 루즈베케 전투에서 등장하였다. 그 후 포병의 기술적인 발전 속도는 소화기에 비하여 빠르게 진행된 편이었다. 권터 블루멘트리트, 류제승 역, 『전략과 전술』, 한울아카데미, 1994, pp177. 1450~1453년에 영국군을 노르망디와 귀옌에서 내쫓은 프랑스군의 방법은 적의 성벽을 계속해서 중포로 포격하는 것이었다. 화약무기의 위력이 이처럼 극적으로 발휘된 배경에는 이전 1세기 동안 진행된 대포 설계의 급속한 진보가 있었다. 윌리엄 맥닐, 신미원 역,『전쟁의 세계사』, 이산, 2005, pp117
[61]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 휘하의 프랑스 군대에게 스위스가 처음으로 대패한 것도 결정적으로는 야포의 위력 때문이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승영조 역, 『전쟁의 역사』권1, 책세상, 1996, pp318
[62]프랑스군이 이탈리아 전쟁에서 실패한 이유는 주로 스위스인 창병과 중장갑기병, 그리고 명성이 자자했던 자신들의 공성포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맥닐, 신미원 역, 『전쟁의 세계사』, 이산, 2005, pp130
[63]물론 경기병이라는 병종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중무장 기병으로서 기사가 위력을 발휘하던 시기에 경기병은 직접 육성하기보다는 주로 외국의 용병을 고용했다. 16세기에 기병들의 병과를 엄격히 구분했던 것은 단지 경기병의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경기병은 둔한 중기병보다 적의 강력한 보병과 포병에게 행군 중 기습공격과 추격을 통해 큰 피해를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숫자를 크게 늘림으로서 이들이 전투에서 좀 더 독립적인 작전을 펼 수 있게 되었다.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4, 한국학술정보, 2009, pp117
[64]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115
[65]퀴레시어 중에는 귀족 기사들도 꽤 있었지만 대개 평민 보병 병사들이었고 일부 기사들을 수행하던 병사들도 갑옷과 공격용 투구와 권총으로 무장하고 기병중대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최선두 횡렬들과 좌우측 종렬들에는 귀족 기사들과 가장 유능한 전사들이 섰었지만 점차 기병중대의 결집력이 높아짐에 따라서 각 요소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뒤섞이게 되었다.(…)기병대의 경우는 다수의 병사가 기사를 수행하는 봉건적 성격이 아직 남아있었다.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3, 한국학술정보, 2009, pp127
[66]이러한 갑옷은 대단히 무거웠기에 전투력의 한계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기에 경기병의 필요성이 제고된 것이다. 퀴레시어 기병은 소총 제작 기술이 개량되어 더욱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게 되자 마침내 폐기되었다.
[67]카라콜 기동은 우선 적을 향해 기병대가 접근한 후, 선두 열이 사격한 후 선회하여 뒤로 빠져 총을 장전하고, 이어 바로 다음 열이 사격한 후 총을 장전하며 적을 앞에 두고 원처럼 회전하여 지속적인 사격을 퍼붓는 기동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적이 소모되고 혼란에 빠지면 퀴레시어 기병은 돌격하여 접근전을 시도한다.
[68]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4, 한국학술정보, 2009, pp126
[69]비트스토크 전투(1636)에서 스웨덴군은 기병 9150명, 보병이 7288명이었다. 델브뤼크, 민경길 역, 『병법사』권4, 한국학술정보, 2009, pp2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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