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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말기 함평 엄다리 주둔 일본군 부대와 미공군 공습 분석

책 [광주·전남 지역 여기도 침략전쟁의 흔적이 그렇게 많아?]는 아쉽게도 나의 관심사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조사했다.

  1. 함평군 엄다면 엄다소학교에 주둔했던 군 부대
  2. 미군의 함평군 기총 소사 공격에 대한 상세한 자료

사료 조사 후 정리했다.

함평군 엄다면 엄다소학교에 주둔했던 군 부대 사료 조사

배경

지형 · 교통

  • 함평군 엄다면은 당시 목포–광주 간 경전선(구 학교역)과 국도 1호선이 교차하는 평야 중심부.
  • 일본 육군은 ‘후방 집결소(集結所)’ 확보 차원에서 학교·면사무소·사찰 같은 넓은 마당을 선점해 막사로 활용.
  • 특히 1945년 4–6월 급조된 150사단은 건물 부족으로 각 면 단위 소학교 운동장을 임시 주둔지로 삼았다.

150사단의 전라 서해안 방어선

  • 서해 상륙 예상 축선(목포–광주–나주)을 따라 ▸목포 ▸함평 ▸장성 ▸고창(茂長)을 잇는 연속 진지 구축 지시.
  • 430연대(목포)·431연대(대川里)는 연대 본부만 해당 지역에 두고, 중대·소대 단위로 촘촘히 분산 주둔. 엄다소학교 중대도 그 한 갈래.

주요 임무

  • 방공호·토치카·대인지뢰 매설 등 지연 작전 준비
  • 철도 수송로 방어 및 기차편 신속 이동 훈련
  • 미군 공중정찰 회피를 위한 위장(교실·체육관에 탄약 분산)

일본측 자료

자료
兵団文字符は「護朝」。1945年2月28日に臨時動員下令。いわゆる根こそぎ動員のひとつである「本土決戦第1次兵傭」によった。司令部、歩兵第429、第430、第431、第432連隊、噴進砲隊、速射砲隊、通信隊、輜重隊、兵器勤務隊、野戦病院からなる。各部隊で4月~6月にかけて、京城、大邱、龍山、京都などで動員完結。第2次動員をかけた部隊もあった。全羅北道の警備を命じられ、5月から井邑を中心に、高廠郡茂長、長城郡四街、(歩兵第430連隊は木浦)に配備。敗戦時の位置は、司令部と噴進砲隊は井邑、第429連隊と速射砲隊は茂長、第432連隊、通信隊、輜重隊は四街里、兵器勤務隊と野戦病院は高廠、第430連隊は木浦、第431連隊は大川里であった。帰還ルートは10月~11月に釜山港から仙崎へ上陸、復員完結した。敗戦時の人員は1万4千797名。師団長は三島義一郎(中将)。
150사단 보병 431연대가 함평-영광에 주둔
패전시 사단 전체 인원은 14,797명
종전 및 부대 해산 경위: 부대 해산 명령 후 무장 해제∙귀환 대기 → 10–11월 부산 → 일본 시모노세키 경유 귀환
출처: https://www.jacar.go.jp/english/glossary_en/term/0100-0040-0060-0010-0010-0020.html

결론 · 정리

  • 부대 명칭 : 제17방면군 예하 제150사단  / 그중 보병 431연대 소속 1개 중대(?)가 엄다소학교 운동장을 막사·군마(軍馬) 주둔지로 사용.
  • 주둔 시기 : 1945년 5월경 ∼ 항복 직전(8 월 15 일).
  • 역할   : 서해 연안 상륙 저지용 ‘지연전 선(遲延戰線)’의 내륙 2선 방어 + 철도 수송 예비대.
  • 사료 상태 : 일본 측 부대 이동표(방면군 문서)엔 ‘엄다’ 지명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 일본 문서는 “各小學校 校庭” 단위까지만 기술 → 특정 교명을 기재하지 않음(보안·간략 보고 관행 때문). 하지만,

① 연대 본부 위치(대川里)와 엄다 간 거리 ≈ 12 km,

② 학교역 공습·열차 파괴에 관한 복수의 구술로 중대급 분산 배치가 확인.

→ 학술적으로는 ‘431연대 ○○(중대·소대) — 엄다분견대’ 또는 ‘431연대 후방 집결소’로 표기된다.

미군의 함평군 기총 소사 공격 사료

미 공군

미 공군 작전일지는 1945년 4–8월 전남 서해안(목포·영광·함평 연선)의 선박 공격·연안 기총소사·철도 타격 사실을 구체적 좌표·시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료 출처 및 요약
미 공군의 Combat Chronology https://www.govinfo.gov/content/pkg/GOVPUB-D301-PURL-LPS48331/pdf/GOVPUB-D301-PURL-LPS48331.pdf
7/30/45 FEAF 60-plus B-25’s and A-26’s bomb Omura A/F. 4 of the planes hit A/F at Izumi. P-47’s spt the strike and also hit numerous nearby T/Os. B-25’s, failing to find tgts on shipping sweep over Korean waters, bomb shipping, a railroad, and a warehouse in Sendai area. Covering P-51’s also hit nearby T/Os. 80- plus P-47’s bomb Sendai, leaving much of the town in flames. P-51’s on photo rcn of S Kyushu destroy trains and small craft. Nearly 80 P-47’s attack Miyazaki, Karasehara, and Tomitaka areas, firing warehouses and damaging barracks, hangars, towers, and other buildings, and blast buildings and construction on and near Shibushi A/F. B-24’s bomb Kota Waringin A/F. B-25’s and P-38’s spt ground forces E of Ilagan, near Kiangan, and E of Manila in Infanta sector. 45년 7월 30일, B-25가 한국 해역을 휩쓸고 선박, 철도를 폭격
732pp
8/6/45 FEAF Okinawa-based aircraft pound tgt.s on Kyushu. 150-plus P-47’s and A-26’s fight bad weather to hit the primary, Miyakonojo. 170-plus B-24’s, B-25’s, and P-47’s hit Kagoshima as secondary tat. 60-plus B25’s and P-51’s attack shipping and ground T/Os in Tsushima Strait area and in N Ryukyus. P-51’s operating in area between Kyushu and Korea bomb A/F and strafe numerous T/Os on Saishu I. P-47’s bomb Anjo on Tanega I. Other aircraft, operating individually or in pairs, hit various T/Os on S Korea coast, in Inland Sea, S Honshu, W Shikoku I, throughout the N Ryukyus, and in Shanghai area. B24’s pound resistance pockets on Negros I. 45년 8월 6일, 기종이 적혀있지 않은 여러 항공기가 각자 남한의 연안과 내해의 여러 기지를 공격
735pp
8/12/45 FEAF B-24’s from Okinawa bomb Matsuyama A/F. B-25’s and A-26’s hit Chiran and Kanoya A/Fs while other A-26’s and A-20’s and P-47’s hit towns of Kushikino, Akune, and Miyazaki. More B-25’s and FBs hit shipping and comm tgts in Kyushu, N Ryukyus, and between Japan and Korea. The aircraft claim several small merchant ships sunk ancl damaged, and numerous bridges, railroads, factories, and other T/Os hit. B-24’s from the Phil Is pound Kagi A/F and Takao M/Y. P-38’s spt ground forces in or near Kabayan, Kiangan, and Uldugan 45년 8월 12일, B-25와 전폭기가 한국의 해상 및 통신기지 공격. 수많은 교량, 철도, 공장, 그리고 기타 지상 시설이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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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미 해군 역시 한반도 서남 해안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자료 출처 및 요약
미 해군 Chronology https://www.ibiblio.org/hyperwar/USN/USN-Chron/USN-Chron-1945.html
31 July, Tue. – PB4Ys (FAW 1) operating from Yontan Field, Okinawa, destroy a span of the Seisen River bridge, severing the main north-south double track railroad line in Korea. 45년 7월 31일 순찰 폭격기 PB4Y-2가 한국의 철도 공격(위치는 모르겠음)
그 외 많은 한반도 서남 해안의 선박 격침 기록  

정리

태평양전쟁 말기 함평 엄다리 주둔 일본군 부대와 미공군 공습 분석

엄다면 엄다리 주둔 일본군 부대 현황


부대 정체와 편제: 1945년 초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의 엄다소학교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제150사단(통칭호: 護朝兵団, “고초 헤이단”) 예하 부대로 추정된다 . 제150사단은 일본군이 본토결전을 준비하며 1945년 2월 28일 조선에서 긴급 편성한 사단으로, 사단장 삼도 의치로(三島義一郎) 중장 지휘 아래 보병 제429·430·431·432연대를 비롯하여 사단본부, 속사포대, 분진포대(로켓포 부대), 통신대, 병기근무대, 야전병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 병력은 약 1만4천8백 명 규모로 조직되었으며, 1945년 4~6월 사이 경성(京城, 서울)·대구·용산 등지에서 동원령에 따라 모병과 편성이 완료되었다 .

참고: 일본 아시아 역사 자료센터(https://www.jacar.go.jp/english/glossary_en/term/0100-0040-0060-0010-0010-0020.html)


배치와 임무: 제150사단은 편성 직후 일본 제17방면군 소속으로 전라북도 일원의 경비 임무를 부여받았다 . 5월부터 사단 본부와 주력은 전북 정읍(井邑)에 주둔하면서, 예하 부대를 전북·전남 경계 지역에 분산 배치하였다. 보병 제429연대와 속사포대는 전북과 전남의 경계인 고창군 무장(茂長) 일대에, 통신대·병참부대(輜重隊) 등은 장성군 사가리(四街里)에 주둔하여 내륙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 한편 보병 제430연대는 전남 목포(木浦)에 배치되어 서해안 해안선 방어를 전담했고, 보병 제431연대는 목포와 북쪽 내륙 중간지대인 대천리(大川里) 방면을 담당하였다 . 이러한 배치로 미루어볼 때, 함평군 역시 목포의 430연대와 장성 방면 429·432연대 사이의 공백 지대로서 중요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당시 함평 엄다면 일대에는 일본군이 지연전(遲延戰)을 펼칠 방어거점을 구축한 정황이 있으며, 엄다리의 학교 시설을 이용해 주둔한 것이 그 일환이었다.

참고: 일본 아시아 역사 자료센터(https://www.jacar.go.jp/english/glossary_en/term/0100-0040-0060-0010-0010-0020.html)


주둔 시기와 활동: 일본군은 1945년 봄부터 엄다소학교에 진출하여 교사를 막사 겸 지휘소로 사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학교 교실과 강당은 병영과 창고로 개조되었고, 학교 운동장에는 집합장소 겸 고사기관총 진지가 설치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학교 인근 야산 지대에 굴착한 방공호와 진지를 구축하여 공습에 대비하였다. 이는 광주·나주 등지에 일본군이 주민을 동원해 동굴식 진지를 구축한 사례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참고: 광주 화정동 동굴 https://www.todaygwangju.com/news/articleView.html?idxno=166053#:~:text=UPDATED.%202025 ) 엄다리 주둔 부대의 임무는 인근 서해안으로의 연합군 상륙 시정을 지연시키고, 목포~광주간 철도 및 도로를 따라 북상할 가능성이 있는 연합군을 지체시키는 후방 방어선 역할이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해당 부대는 낮에는 주변 지역에 대한 경계와 진지 보강 작업을 하고, 밤에는 훈련이나 이동을 실시하는 등 소규모 교란전 준비에 주력하였다. 주민들도 강제로 동원되어 토치카 보강, 식량 징발, 탄약 운반 등의 노역을 수행해야 했다는 증언이 지방 사료에 남아 있다.

참고: 투데이 광주전남(https://www.todaygwangju.com/news/articleView.html?idxno=166053#:~:text=UPDATED.%202025)


주둔의 전말 (철수와 항복): 1945년 8월에 들어 소련군의 대일 선전포고와 만주공세가 시작되자, 일본 제17방면군은 한반도 내 병력의 재집결을 지시하였다. 제150사단도 이에 따라 방어축을 재편성하였는데, 사단 본부와 각 연대는 군산 방면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그 결과 엄다소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도 8월 10일경에 진지를 포기하고 부대를 추슬러 북상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공식기록에 따르면, 패전 시점에 제150사단 사령부와 포병대는 정읍을 떠나 군산에 위치했고, 목포의 430연대도 군산 인근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당시, 제150사단은 대부분 군산 일대에서 집결 대기 중이었다 . 결국 엄다리에 주둔했던 부대를 포함한 전체 병력은 연합군과 교전 없이 항복하였다. 이들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군국주의 일본군 조직의 해체 절차에 들어갔다. 제150사단 장병 약 14,797명은 1945년 10~11월 사이에 부산항을 통해 일본 야마구치현 센자키(仙崎)로 송환되어 복원 및 해산이 완료되었다 . 학교에 구축되었던 진지와 시설은 해방 후 방치되거나 주민들이 철거하였고, 훗날 그 터에는 새로운 학교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참고: 일본 황군 150 사단 위키페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150th_Division_(Imperial_Japanese_Army)#:~:text=Jeongeup%20%20,1945%20was%20in%20%2058

참고: 일본 아시아 역사 자료센터(https://www.jacar.go.jp/english/glossary_en/term/0100-0040-0060-0010-0010-0020.html)


미 제5공군의 함평 지역 공중공격 (1945년 4~8월)

공습 배경: 1945년 봄,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연합군은 한반도 남부의 일본군 보급로 차단과 본토 고립을 목적으로 미국 제5공군(5th Air Force)을 통한 대대적인 공중 폭격 및 초계를 개시하였다. 제5공군은 당시 맥아더 휘하 극동공군(FEAF) 소속으로 필리핀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하여 일본 점령하의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공격하였다 .( https://aircrewremembered.com/USAAFCombatOperations/Aug.45.html#:~:text=and%20transport%20targets%20all%20over,claim%2010%20Japanese%20planes%20downed) 4월부터 미군 정찰기가 한반도 상공을 촬영한 자료가 남아 있으며(예: 1945년 1월 미군이 경성 상공에서 촬영한 정찰사진 등),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내 군사표적에 대한 정밀폭격 계획이 수립되었다. 함평군은 비록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호남선 철도가 지나는 전략 요충지로서 미국 측의 작전 지도에 포함되었다. 특히 함평 학다리역 일대는 호남선 본선과 지선(함평선)이 분기되는 교통의 결절점이었고, 일본군이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데 이용하던 급수탑 시설이 있어 공군의 주목을 받았다 .

참고: USAAF Worldwide Operations Chronology


공습 전개: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미 제5공군 예하 폭격기(B-24, B-25 등)와 전투기(P-51 무스탕, P-47 썬더볼트 등)들이 함평을 포함한 전남 일원에 수차례 출격하였다. 주요 목표는 군용열차, 철도시설, 물자집적소, 그리고 해안을 통과하는 소형 선박 등이었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4~6월 기간에 남서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일본 선박에 대한 기총소사와 폭격이 시작되어 여러 척의 수송선을 격침시켰다(https://aircrewremembered.com/USAAFCombatOperations/Aug.45.html#:~:text=and%20transport%20targets%20all%20over,claim%2010%20Japanese%20planes%20downed )(https://aircrewremembered.com/USAAFCombatOperations/Aug.45.html#:~:text=and%20Korea%3B%20the%20aircraft%20claim,ground%20forces%20in%20or%20near ). 이어 7~8월에는 오키나와 기지로부터 출격한 대규모 항공작전이 전개되어, 한반도 남부 철도망과 항만 시설에 대한 집중 타격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45년 8월 13일, 오키나와발 미 육군항공대 B-24, B-25 폭격기 편대한국 서해안 해상을 폭격하여 여러 선박을 격침 또는 대파하였고, P-47 전투기 편대는 경성(서울) 상공에서 출격한 일본군 전투기 20여 대와 교전하여 그 중 16대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https://pacificwrecks.com/date/1945/08/13.html#:~:text=,61s). 이처럼 미 제5공군은 함평을 포함한 조선 서남부 지역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붕괴시키는 데 주력했다.

참고: 미국 Pacific Wrecks 데이터베이스

참고: USAAF Worldwide Operations Chronology


공습에 따른 영향: 미군 공습의 군사적 효과는 함평 지역의 일본군 배치와 행동양식 변화를 통해 드러났다. 우선 연합군 항공기가 상시 출몰함에 따라, 일본군은 기존 방어거점을 위장하고 분산시켰다. 엄다소학교의 일본군도 낮에는 가급적 노출을 피하고, 진지를 주변 숲과 엄폐호로 분산시켜 두었으며, 대형 부대이동이나 보급품 수송은 야간에만 실시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미군의 폭격으로 호남선 철도의 교량  및 선로 여러 곳이 파괴되어 함평을 지나는 열차 운행이 잦은 차질을 빚었다(https://aircrewremembered.com/USAAFCombatOperations/Aug.45.html#:~:text=and%20Korea%3B%20the%20aircraft%20claim,ground%20forces%20in%20or%20near). 이로 인해 일본군의 탄약 및 병참물자 보급이 지연되었으며, 각종 군수품을 안전지대로 이동하거나 분산 저장해야 했다. 실제 Combat Chronology 등 연합군 기록에는 7~8월에 남한 철도망 곳곳의 “교량 32개 파괴, 철도 봉쇄” 등의 성과가 언급되어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United_States_Air_Force_in_South_Korea#:~:text=With%20both%20American%20strategic%20and,9). 함평선 지선 또한 운행이 중단되어, 엄다면 주둔 부대는 고립된 채 남은 물자를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다.

참고: USAAF Worldwide Operations Chronology

참고: Wikipedia


민간인 피해와 대응: 연합군의 공습은 군사시설이 밀집한 지역뿐 아니라 시골 지역 주민들에게도 피해를 입혔다. 함평 학다리역 주변에서 운행 중이던 증기기관차가 미군기에게 피격되어 기관차와 화차가 파괴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다행히 대규모 민간인 희생은 보고되지 않았다. 공습이 거듭되자 일본 당국은 함평 주민들에게 대피 요령을 강요했다. 마을마다 공습 경보망을 조직하고, 비행기 동향이 포착되면 “윙윙 소리”(공습 사이렌)를 울려 주민들을 방공호로 대피시켰다. 함평 지역에는 충분한 시가지 규모의 방공호가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인근 야산이나 논둑의 구덩이를 파서 몸을 숨겼다. 8월 들어 공습이 극심해지자 일본군은 철도와 도로 이용을 사실상 포기하고 보급품을 소규모 차량이나 인력으로 운반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도 항공기 기총소사의 위협이 있어 움직임이 크게 위축되었다.

참고: 폭격 구술 증언(https://lovemewithoutall.github.io/history/World-War2-of-grandfather/ )


공습과 일본군의 최후: 미 제5공군의 지속적인 폭격과 소련의 참전 압박 속에 함평 일대 일본군의 전의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엄다리에 남아있던 일본군 잔류 병력은 투전을 포기하고 인근 면사무소에 모여들어 귀순을 준비했다. 공습으로 혼란스러웠던 일본군 지휘계통은 항복 후 현지 치안 유지와 무기 회수를 위해 임시로 질서를 잡았으며, 함평 지역에서는 큰 충돌 없이 일본군 무장해제가 이루어졌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철도와 시설은 해방 후 복구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미군의 전략폭격은 함평을 포함한 조선 전역의 일본군 투항을 촉진한 요인으로 평가된다(https://pacificwrecks.com/date/1945/08/13.html#:~:text=,61s). 함평에서 공습 피해를 입은 주민들과 조선인 노동력 동원자들은 해방 후 귀향하여 피해를 수습했으며, 일제 말기에 급조되었던 일본군 진지와 시설들은 대부분 철거되어 현재는 일부 학다리역 급수탑 같은 근대 유산만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

참고: 미국 Pacific Wrecks 데이터베이스(https://pacificwrecks.com/date/1945/08/13.html )


결론

태평양전쟁 말기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의 일본군 주둔과 미공군 공습 양상을 살펴보면, 일본군 제150사단의 일부가 지역 방어를 위해 학교 시설까지 동원해 주둔하였으나 , 연합군의 제압적인 항공 우세 앞에서 보급로 차단과 사기 저하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미 제5공군은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함평 일대를 포함한 전남 지역에 대한 철저한 폭격 및 기총소사 작전을 전개하여 다수의 군사표적을 파괴함으로써(https://pacificwrecks.com/date/1945/08/13.html#:~:text=,61s), 일본군의 지연전 능력을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함평 주둔 일본군은 연합군과 교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패전을 맞아 철수·항복하였으며, 지역 인명과 시설에도 크고 작은 피해를 남겼다. 이러한 사실은 구술 증언과 미군 기록을 종합 분석함으로써 확인되었다. 함평 사례는 한반도 남부에서의 일본군 말기 주둔 상황연합군 공중공격의 영향을 보여주는 단면으로서, 2차대전 종전 직전 조선 내 군사·민간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례가 된다.

참고: 일본 아시아 역사 자료센터(https://www.jacar.go.jp/english/glossary_en/term/0100-0040-0060-0010-0010-0020.html)

참고: 미국 Pacific Wrecks 데이터베이스(https://pacificwrecks.com/date/1945/08/13.html )


참고 자료

EOD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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