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겪은 한국전쟁 이야기(위기편)
전쟁이 터지고 마을 사람들이 징병으로 끌려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전선은 크게 밀려 전라도가 함락되었다. 1번 국도가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으니 만큼 세상은 즉각적으로 변했다. 인민군이 왔고, 완장을 찬 사람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둥글게 불러모았다. 그들은 이제 다 같이 잘 살아보자며 외쳤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는 죽었고,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몇 주가 지나니 세상이 또 바뀌었다. 완장찼던 사람들과 인민군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밤이었다. 할아버지는 옆 마을에 잠시 다녀오시던 길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달랐다. 할아버지는 청년이셨고, 아직 밤에는 달빛과 별빛 뿐이었다. 계절은 여름이었다. 들리는 소리는 풀벌레와 개구리 울음소리 뿐이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멈춰. 움직이면 쏜다.
그 자리서 얼어붙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20년을 다녀온 길인데도 처음 본 것만 같은 어둠 뿐이었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시키는대로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턱 밑으로 뭔가 다가오는게 느껴지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있었다.
총검이었다.
어디가?
총검의 주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잘못 말했다가는, 혹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가는 살아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뭐라 답해야한단 말인가? 인민군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국방군이 돌아온건가? 아무튼 희미한 달빛 아래 보이는 건 총검 뿐이었다. 총검?
인민 집회 가는 길입니다.
달빛에 비친 총검은 삼각형의 쇠꼬챙이 모양이었다. 칼날이 달려있는 국방군의 총검이 아닌, 인민군의 총검이었다. 잠시 후, 턱 끝의 총검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 봐.
어둠 속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날이 밝은 다음 날, 인민군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서 그들을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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