決死 - 해이수의 단편 『絶頂』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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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死  - 해이수의 단편 『絶頂』을 읽다

나는 오랫동안 소위 동양의 고전이라는 것들을 탐독했다. 하지만 孟子라든지 荀子라든지 하는 책들이 주장하는 가치들은 현대인의 사고방식, 이른바 합리와 이성이라는 가치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은 왕이 다스리는 세상, 불평등에 기반한 세상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런 책들에 빠지게 된 시점부터 줄곧 사상적 방황아로 전락해야 했다. 결코 합리적일 수 없는 가치, 현세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德에 매료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얼마 전 왕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왕, 천도의 구현자로서 오래 전 이 땅을 지배했던 그에게 바쳐야 할 것은 자명하며, 천명이 그에게 있는 한 충성의 대상은 둘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세상, 이를테면 서기2000년이 될 때 까지도 성리학 국가 朝鮮이 살아남아 있는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개인이 겪을법한 내적 혼란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한 이야기였다. 분명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내가 상정한 주인공의 선택은 주어진 운명에 대한 투쟁이었고, 끝내 비극으로밖에 마무리 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FERE LIBENTER HOMINES ID QUOD VOLUNT CREDUNT’[1]라 했다. 내가 해이수의 단편소설 『絶頂』을 읽은 건 이러한 배경 하에서였다. 그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끝내 실패하여 단두대 앞에 선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과 함께 묶인 왕의 모습을 보며 실패를 통감한다. 사형당하기 직전, 왕은 적왕을 상대로 마지막 부탁을 한다. 잘려진 자신의 목을 들고 부하들 앞을 걸어갈 테니, 지나쳐간 부하의 생명은 살려달라는 것. 놀랍게도 왕은 자신의 약속을 이뤄내어 부하들을 구한다.

얼핏 보기에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생명이라는 한계가 허락하는 데 까지만 나아갈 수 있다.죽음은 극복할 수도, 투쟁할 수도 없는 절대적 종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 결코 꿈꿀 수 없는 것을 시도하여 성공했기 때문이며,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 바로 투쟁과 왕이다.

『絶頂』에서 왕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 최대의 투쟁은 바로 자기와의 대결’ 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투쟁의 열매보다 그 과정에 더 많은 양분이 있으며’, ‘패배를 예감하면서 시작하는 투쟁도 있다’ 고. [2] 그들이 반란을 시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이 새로이 만들고자 한 세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패배할 운명과 나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투쟁하리란 사실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은 원장의 배신, 즉 투쟁의 가장 무서운 적인 고독의 엄습 혹은 이미 정해진 운명에 잠시 좌절한 듯 보인다. 하지만 왕은 끝내 죽음, 모두가 생각하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3]라던 자기 자신마저 초월함으로써,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이들에게 행한 약속을 지켜낸다. 이로서 왕은 인간이 최후에 도달할 마지막 장벽을 넘어선다. 그의 의지는 왕의 자손들에게 이어짐으로써 시대와 세대마저 초월한다.[4] 그의 승리는 아찔하며, 통쾌하다.

그러나 왕이 행한 초월은 단지 그에게서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왕이란 결코 지배자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왕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직접 닿아 존재하는 분신과 같다. 司馬遼太郞가 말했듯, 충성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 운명의 符를 지닌다. 반쪽은 자신의 가슴 속에, 다른 반쪽은 왕에게.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설사 모든 일이 어그러져 가슴 속의 부와 함께 자신의 육체도 사라져 버린다고 할지라도 말이다.[5] 하물며 성공이야 달리 말할 필요나 있으랴. 그렇기에 왕의 잘린 목은 마침내 눈을 감을 수 있었다.[6]

돌이켜보면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줄곧 주목해 왔던 가치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고죽의 번뇌와 도전, 그리고 위대한 실패에서 금시조를 보았고, 뼈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겠다고 외치던 맥베스에게서 운명의 질곡을 향한 투쟁과 번뇌에 울었으며, 劉邦의 大風歌에서 신분, 즉 타고난 운명을 극복한 자의 흥얼거림에 웃었다. 운명, 번뇌, 그리고 투쟁. 카이사르의 저 유명한 말처럼 나는 문학에서 내가 보고 싶던 것을 보았다. 여태껏 문학 속에서 교과서적인 정답만을 추구해왔던 나로서는 극적인 변화라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허나 자칫하면 작가와의 대화를 도외시하고 자기 자신의 굴레에 얽매일지도 모를 이러한 방법을 두고 올바른 ‘읽기’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의문이다.


 

[1]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만을 본다. (GAIUS JULIUS CAESAR. 『COMMENTARI DE BELLO GALLICO』, 3.18.)

[2]해이수 외 9인, 현대문학, 2008, 「絶頂」, 『peak - 피크』, pp113.

[3]전게서, pp108.

[4]해이수 외 지음, 황소북스, 2010, 「black coffee day」,『수업』, pp224~231에서 저자의 에세이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저자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주제에 강한 애착을 지닌 듯 보인다.

[5]司馬遼太郞저, 양억관 옮김, 도서출판 달궁, 2002,『항우와 유방』권3, pp277.

[6] 윤후명 외 지음, 해럴드 경제 편집국 엮음, HERALD MEDIA, 2010, 「희미한 초상」,『나는 가짜다』, p27~31에서 저자는 정신의 창, 영혼의 렌즈로서 눈빛에 깊이 천착하는 버릇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만큼 왕의 잘린 목이 보인 눈빛의 변화는 간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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