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읽고 - 이윤생 강씨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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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의 인천에 이윤생이라는 양반이 살았다. 그 당시 나라는 이미 외국과 한 차례 전쟁을 치뤘고,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윤생은 활 쏘고 말 달리기를 잘하여 무반 벼슬을 받았다. 이윤생이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했는지, 그리고 그가 받은 관직인 중앙군 장교를 정말로 역임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다급한 시대였고, 전쟁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이윤생은 인천 바닷가의 자택에 있었다. 이윤생은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의병들과 함께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 낙섬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인천과 강화도를 잇는 두 개의 주요 뱃길이 있었는데, 이윤생이 주둔한 곳은 그 중 남쪽 뱃길이었다. 하지만 외적은 북쪽 뱃길을 통해 강화도를 공격했다.

다들 강화도는 천험의 요새라 믿었다. 강화도는 유사 이래 난공불락이었으니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었다. 왕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강화도로 도망가려 했다. 다만 왕이 도망가는 속도보다 외적의 속도가 아득히 빨랐을 뿐이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왕은 산성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설사 성의 모두가 굶어 죽는다고 해도 국가는 강화도에서 보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화도는 순식간에 함락됐다. 강화도의 지휘관은 술 먹고 놀다가 기습을 당했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항복한 강화도는 약탈당했다. 대량 학살이 있었다. 한편 이윤생과 의병들은 여전히 남쪽 뱃길의 작은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3일 후, 외적이 이윤생과 의병들을 공격했다. 이틀에 걸친 전투 끝에 의병들의 화살이 바닥났다. 전투는 곧 학살로 변했다. 이윤생도 전사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윤생의 전사 소식을 들은 이윤생의 부인 강씨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전투가 있던 섬은 이윤생의 집에서 불과 1km 떨어진 곳이었으니, 어쩌면 강씨는 전투와 패전과 학살의 광경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윤생 부부의 죽음이 있고서 5일 후, 왕이 외적에게 항복했다. 왕은 강화도 함락의 소식을 듣고 항전 의지를 잃었다. 이윤생과 의병들의 죽음은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나라에서는 부인 강씨에게 열녀 칭호를 주었다. 하지만 이윤생은 어떠한 공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윤생을 포상했다가는 전쟁 중 죽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포상해야 하니, 그럴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름 없는 의병이야 말할 것도 없다. 궁색한 명분이었다. 그로부터 이백 년이 지난 후, 국가 멸망의 위기감이 다시금 찾아왔다. 그제서야 나라에서는 이윤생 부부의 공을 인정하고, 그들 부부의 행적이 적힌 작은 안내판(정려)를 세웠다. 그로부터 오십 년 후, 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이제 다시 100년이 지난 2020년에 나는 그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그들이 살던 마을은 지금의 인하대학교 근처다. 산업화 시대 이래의 거듭된 간척으로 인해 마을에서 바다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씨 부부의 정려각은 마을 깊숙한 곳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이윤생과 의병들이 싸웠던 섬 낙도는 아예 육지가 되었다. 역시 거듭된 간척 사업 때문이다. 낙도에는 아파트가 솟았고,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거대한 트럭들이 시끄럽게 달린다. 강씨 부인이 몸을 던졌다는 바다가 어디인지는 완전히 잊혀졌지만, 아마도 역시 간척 되어 육지가 되었으리라.

사백년의 시간이 흘러 사람은 가고, 나라는 사라졌으며, 땅과 바다가 뒤바뀌었다. 이제 옛 이야기는 더듬어서라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선이 오직 기억 뿐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전하게 될까, 그리고 무엇을 전해야 할까.

‘정진오, 『인천』, 도서출판가지, 2020’을 읽고 씀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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