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 침략론
조선과 에도 막부의 외교는 쓰시마 번과 동래부 산하 왜관을 통해 이뤄졌다. 1800년대 중반이 되자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도래했고, 조선은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외면했으나, 일본에서는 열강의 압박에 더이상 그럴 수 없었다. 한편으로 일본은 스스로 군사대국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조선의 나약함과 군사력을 멸시해왔으니, 흑선 도래 후 국내의 혼란을 외부와의 전쟁으로 극복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국내 정치를 전쟁으로 덮으려는 일본의 경향은 이미 이때 시작되었다. 에도 막부가 멸망하자 기존의 외교 담당자들은 곤란해졌다. 특히 쓰시마 번은 대조선 무역에 번의 사활이 걸려 있었기에 스스로의 전문성과 특별한 지위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와 조선의 외교를 동래부 왜관과 쓰시마 번이 담당하는 관례에는 의전상의 문제가 있었다. 쓰시마 번주는 지방 영주에 불과했고, 그 상대역인 왜관 훈도는 중앙 관리조차 아니었다. 의전 문제는 20년 동안 이어졌고, 그동안 쓰시마 번 대신 일본 외무성이 조선 외교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조선은 과거에 했던 그대로 왜관을 통한 외교를 원했다. 한편 일본과 조선의 무역은 물론이고 표류자 송환 등 일상적인 외교 행정은 크게 변함없이 이어졌다. 오히려 조선이 일본에 무기 수출을 요청하는 등 더욱 강화된 면도 있었다. 1876년에 이르자 메이지 정부는 정한론 문제로 서남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렀고, 양국 정부는 모두 전쟁을 피하기를 원했다. 오랜 지지부진함이 무색하게도 강화도 조약은 짧은 논의만으로 합의에 이르렀다. 조약의 내용은 양국의 대등한 외교 관계 수립이었고, 양국 모두 만족했다.
흔히 조선의 개항와 한일합방에 이르는 역사적 흐름은 일본의 일방적인 조선 침탈로 이해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초중고 역사 교육 과정에서 그렇게 배웠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일본의 사악함을 세뇌하는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조선 나름의 정세 판단와 그에 따라 일관된 외교를 했고, 강화도 조약은 그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조약 당시 예조참판은 “비바람이 지나간 난초밭에 꽃향기만 가득한 것과 같습니다”라 평가한다. 후대의 역사를 아는 현대인은 그윽하기만 한 문향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지만, 조선의 주체성을 간과하는 과거의 학설은 오히려 조선을 욕보이는 짓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국내 정치의 혼란을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에 주목할 만 하다.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은 백년 만에 패망했다. 외교를 국내 정치의 돌파구로 삼는 전략은 실패했다. 현대에 와서는 중국이 이 전략을 채용 중이다. 중국이 일본의 과거를 답습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현명철. (2019). 《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 침략론》. 동북아역사재단.
202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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