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의 위아론은 자본주의 맹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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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롤스의 정의론을 읽고 있다. 롤스는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판단 기준으로 정의를 내세우는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하여 고전적 공리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양주의 위아론은 공리주의와 비슷한 주장이지 않았을까?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리주의와 비슷한 비난을 받는다. 양주에 대한 비판과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통하는 면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는 것, 양주는 이렇게 말했다. ‘남을 위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해도 천하는 절로 다스려진다.’ 여기서 ‘천하는 절로 다스려진다’는 주장에 주목해보자. 개인의 사익 추구는 결국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된다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논리와 비슷해보인다. 공리주의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상이라고 볼 때, 위아론을 공리주의로 환원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뿐만 아니다. 공리주의는 흔히 사안의 경중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비판받는다. 이는 양주와 그의 학파 또한 마찬가지다. 맹자는 양주를 가리켜 온 세상의 이익보다 자기 자신의 털 한 올이 더 중요한 놈이라 욕한다. 하지만 열자 양주편에 나왔듯이, 이러한 비난은 양주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양주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욕망을 따르면 세상에도 이익이 될거라 주장했을 뿐이다.

둘째, 흔히 묵적과 대칭된다. 맹자는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천하에 가득찼다고 비분강개하여 소리친다. 이 시대의 다른 저작에서도 양주와 묵적은 늘 쌍을 이루며 일컬어진다. 물론 두 학파가 번성하여 그랬기도 했겠으나, 양주와 묵적의 주장이 정면으로 배치되었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 실제로 열자 양주편은 묵자와 양주 학파의 논쟁이다.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쌍으로 묶어 칭함으로써 대구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묵적이 공산주의의 맹아처럼 다뤄지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부모 형제도 없는 빨갱이’와 ‘저 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자’라 서로 비판하는 모습에서 20세기 냉전기에 대한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게 사실이라면 무서운 일이다.

위 두 가지 근거를 통하여 나는 감히 춘추전국시대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해본다.

물론 양주의 주장이 후세에 전하지 않기에 이상은 모두 뇌내망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느 중국 농부가 밭 갈다가 죽간이라도 발굴해낼지… 그 때를 기약해본다.

201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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