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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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6년생이다. 따라서 스티브 잡스는 나보다 한 세대 이른 사람이다. 또한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따라서 잡스가 이뤄낸 문화적 현상을 미국인들만큼이나 가까이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드디어 스티브 잡스 전기를 다 읽었으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나의 그에 관한 기억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내가 잡스의 이름을 들은 첫번째 기억은 어느 잡지에서였다. 아마도 게임 잡지에서였으리라. 나는 출판업에 종사하시는 이모부의 덕으로 96년도부터 게임 잡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게임 잡지에는 온갖 내용이 가득했다. 게임 소프트웨어 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와 네트워크, 심지어 관련 산업의 동향마저 전달했다. 특히 업계 소식은 아직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 이었던 시점이라 잡지 외에서는 구하기 힘든 정보인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서 보았던 스티브 잡스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시기상으로 유추하건대 토이스토리의 성공 때문이었을듯 하다. 애플에서 쫒겨난 잡스가 현란한 3D 그래픽으로 제작된 영화로 재기에 성공했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 때만 해도 나는 애플이든 잡스든 별 관심이 없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영화관은 근처도 못 가보았던 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애플은 버튼이 하나 뿐인 괴이한 마우스를 지닌 컬트 집단 정도로 생각했다.

잡스에 대한 두번째 기억은 첫번째 아이맥이었다. 나는 99년도에 게임잡지에서 아이맥의 광고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Think different라는 그 유명한 카피와 함께, 놀랍도록 아름다운 컴퓨터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iMac

아마도 이 사진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인터넷 보급의 초창기로서, 여전히 컴퓨터는 사각형의 철제 케이스에 담겨있던 고리타분한 시절이었다. 이미 내게는 IBM호환 PC가 있었고 사용하는데 부족함은 전혀 없었지만, 아이맥은 그저 디자인만으로도 ‘갖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충격을 받았던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중학생이었던 내 친구들 중 컴퓨터에 관심이 있던 무리는 모두 아이맥을 이야기하며, 저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다 쓸 수 있는지 논의하기도 했다. 물론 모두에게 아이맥은 그림의 떡이었다. 한편 당시 내 나이 또래에게 업계의 소식을 전파하던 한 게임잡지에서는 이런 기사를 내기도 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대략 이러한 내용이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스티브 잡스는 업계에서 가장 자살 소식이 들려올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남자였다. 애플에서 쫓겨났고, 넥스트는 망했으며, 업계는 IBM과 Microsoft, 컴팩, 델 등에게 장악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애플에 복귀했고, 아이맥은 성공했다.’

ADSL망이 전국에 깔리던 2000년, 나와 친구들은 소리바다를 통해 mp3 파일로 음악을 불법 다운로드하는데 열광하고 있었다. 큰 돈을 들여 mp3 플레이어를 장만하는 친구들도 몇 등장했다. mp3로 음악을 (불법) 다운로드 받으면 테이프나 CD로 된 음반을 사는 것보다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당시 mp3 플레이어의 저장 용량은 하찮은 수준이었다. 64mb 용량 정도면 제법 준수한 저장용량이었는데, 당시 소리바다에서 일반적으로 떠돌던 mp3 파일 기준으로 15곡 이상을 넣을 수 있었다. 나는 2001년 말에야 mp3 플레이어를 장만할 수 있었는데, 20만원 아래의 가격에 128mb의 저장용량이었다. 당시에는 아이팟은 이미 나와있었지만, 너무 비쌌기에 내게는 애당초 고려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아이리버가 삼각기둥 디자인으로 mp3 플레이어 업계를 휩쓸었기에, 아이팟에 대한 반향은 미미했다.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덕분에 나는 애플을 잊고 살 수 있었다.

이제 세월을 크게 건너뛴다. 2009년에 나는 대학생이자 막 군대를 전역한 복학생이었다. 당시 수강한 강의였던 ‘경영정보시스템’에서, 교수님은 근 10년간 스티브 잡스의 제품 발표 영상을 보고 요약하라는 과제를 내셨다. 이 시점에는 이미 유튜브에서 모든 영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군대에서 막 복귀한 시절이었기에 더없이 성실한 학생이었던 나는 열심히 과제를 수행했다. 그리고 나는 앱등이가 되었다 .

마침 2009년 하반기는 드디어 국내에 첫번째 아이폰이 출시된 해였다. 당시 아이폰은 정전식 터치 방식이라 한국의 특성에 적합하지 않다느니, 국산품 애용이라느니, 역시 옴니아가 최고라느니, 스마트폰은 아직 시기상조라느니, 많은 말들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줄을 지어 아이폰을 샀다. KT영업직원들은 내가 살던 기숙사 앞에 가판대를 세워놓고 아이폰 가입을 받았다. 그조차도 줄이 서 있었다. 나 역시 아이폰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폰은 비쌌고, 내게는 당시 사용 중이었던 피쳐폰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알 것이다. 시대는 스마트폰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지만, 당시에는 사용하고 있는 폰의 종류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던 시대였다. 설사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두고 싸웠다. 싸움은 크게 아이폰 사용자와 안드로이드 사용자 간에 벌어졌다. 아이폰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게 이러했다. 아이폰의 생태계는 폐쇄적이라 곧 망하기로 예정되어 있으며, 근본적으로 기술 수준이 그 비싼 가격에 비해 허접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잡스와 아이폰의 업적을 하찮으며 혁신으로 볼 수 없다고 치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2010년에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잡스를 비웃었다. 아이폰 4대를 스카치 테이프로 연결한 합성 사진이 인터넷에 나돌았다. 물론 이제와서 생각하면 다 어리석은 소리였다. 잡스와 애플을 찬양하든 매도하든, 이 모든 싸움은 이 시대가 애플이 주도하는 시대라는 반증이었다.

내가 스마트폰을 구입했던 건 2011년 여름이 되어서였다. 이 무렵의 휴대폰 시장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묘했는데, 한 통신사를 2년 사용하기로 계약하면 최신형 휴대폰을 공짜로 주었다. 나는 마침 통신사 2년 약정이 만료되어 새 폰을 찾았다. 뭘 사야할지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삼성 갤럭시S2가 공짜였다. 아이폰은 제 값을 다 내고 사야했다. 나는 카카오톡만 되는 폰이라면 아무래도 좋았고, 갤럭시S2는 내 기준에는 차고 넘치는 기계였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몇 일 사용해보니, 이는 진정한 혁신임을 깨달았다. 나의 생활양식은 덕분에 크게 바뀌었다. 그 해 10월에 잡스가 죽었다.

다시 2년이 흘렀다. 통신사 2년 약정이 끝나 폰을 바꿔야 했을 때, 나는 아이폰5를 택했다. 한 세대가 지난 폰이라 공짜로 풀렸던 것이다. 나의 첫번째 애플 기기였다. 아이폰을 잡은 첫 날, 익숙치 못한 조작 방법 때문에 툴툴거렸다. 이를 본 내 친구 하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세 번 안드로이드를 부정하리라.’ 과연 그렇게 되었다. 익숙치 않은 조작법이란게 실은 최선의 조작법이었다. 나는 그 길로 앱등이가 되어 애플 기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 맥북을 사용하며, 심지어 iOS 앱을 만들어 밥벌이까지 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장사꾼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202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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