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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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입니다. 지금부터 김동춘 선생의 ‘전쟁과 역사’, 이 중 ‘학살’ 부분의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귀기울여 경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전쟁. 이 나라의 근현대사에서 극히 중요한 사건인만큼 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3년간 계속된 전쟁입니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전쟁은 단 3년의 시간 뿐이 아니었습니다. 자료를 보시겠습니다.

 

1945년 12월 7일, “태릉에 쳐들어가서 1300명을 학살한 다음, 죽창으로 가슴을 박아 일일이 사망을 확인한 다음 건물에 쓸어넣고 소각하였다.” – 김두한의 증언

 

이 외에도 제주4.3사건,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전쟁은 광복의 해인 1945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6월 25일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신화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국가대 국가의 통제된 전쟁이 아닌, 개인대 개인의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전쟁이었기에 더욱 끔찍했습니다. 무려 백만에서 수 십 만명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됩니다. 민간인 학살은 한국전쟁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민간인 학살은 잘 알려져있지 않을 뿐더러 연구조차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비극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시대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이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1946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과정은 국가의 형성기, 즉 ‘무력기구의 중앙집중과 국가독점화’ 과정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여 이 시기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이자 내전기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좌익과 우익, 지주와 소작농, 친일과 반일 세력이 증오를 매개로 얽히고 섥혀 격렬히 항쟁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정부는 학살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장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전면전 발발 이후의 학살은 이러한 과거의 연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이었던 만큼 학살의 유형도 다양했습니다.

 

학살의 첫번째 유형은 ‘작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지역에서의 ‘반란군’진압 작전, 국군의 공비토벌작전 은 그 자체로 전쟁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으로 규정하고 초토화 작전을 펼쳤습니다. 100여 곳의 마을이 모두 불탔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3만 명의 주민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여순사건에서도 ‘진압군’은 전체 시민을 ‘진압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반란군이라 의심되는 자들은 바로 사살당했고, 모진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면 일본도로 목을 쳤습니다.

빨치산이 활동하는 지리산 주변과 태백산맥 산간 지역에서는 적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토벌대는 적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살해한 민간인도 모두 적군 시체로 보고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러한 작전 수행으로서의 학살은 6.25 발발 이후 전면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선이 남북으로 크게 이동하며 고립된 잔류 인민군이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자, 기습의 공포에 시달린 미군과 국군은 적이 활동하는 지역의 민간인까지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지리산의 공비소탕작전에서는 “태워 없애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애는” 삼진 작전이 벌어졌는데, 2월 8일 하루 동안에만 529명의 주민이 군인에게 학살당했고, 이 중에는 열 살 미만 어린이 1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작전은 ‘적에게 협조하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라’는 연대 작전명령에 기초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학살의 두번째 유형은 처형으로서의 학살입니다. 전쟁 발발의 계엄령 상황에서 군은 즉결 재판권을 행사했습니다. 이에 따라 ‘적’에게 협조하리라 추측되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처형되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20만 이상의 사람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인민군 역시 38선 이남을 점령하며 인민재판 형식의 재판과 학살을 광범위하게 진행했고, 후퇴하면서 많은 우익 인사들을 학살했습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서 남북한 모두 군의 명령에 기초해 ‘잠재적 적’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이뤄졌던 것입니다.

 

학살의 셋째 유형은 보복으로서의 학살입니다. 전선이 수없이 이동하면서 ‘국가’가 바뀌는 과정 중 공적으로, 사적으로 광범위한 보복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보복으로서의 학살은 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한국전쟁 시 발생한 학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인민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한 1950년 9월까지는 그동안 탄압받았던 좌익 인사들과 국민보도연맹 피해자 가족들이 우익측 세력을 학살했습니다. 인민군이 패퇴해 북으로 밀려가자 이번에는 좌익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미국과 남한정부는 사적 보복행위를 묵인하고 방조했습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군인들은 동료의 죽음을 민간인 학살로 보복했고, 민간인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서로를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학살은 이념보다는 순수한 증오로 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이 벌어진 이유는 어디에 있는걸까요? 그리고 왜 하필이면 이러한 양상으로 벌어진 걸까요?

 

학살의 발생 배경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이 시기가 국가 건설의 시기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3.1운동 시기만해도 한국인은 주로 평화적인 수단만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물러가며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그간 쌓여온 온갖 불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광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과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혁명을 요구했고, 기득권층은 극도의 공포에 빠졌습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선동 전략은 증오의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결국은 공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이 좌익과 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친일세력을 기용하자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우익이 좌익을 학살했고, 이는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 아래 정당화되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반공만능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이 극히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반공의 대의 아래 이승만의 극우단체 회원들은 테러와 학살을 일삼았습니다. 희생양으로 삼을 빨갱이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제주 4.3사건과 대구10.1 사건의 과잉진압을 명령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일반 민중은 감히 이승만 정권에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를 무기삼아 휘둘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 일본 제국의 경찰과 군인을 다시 기용한다는 미군정의 방침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과거 친일 행적에 콤플렉스를 가졌던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이승만에게 협력하며 앞장서 학살을 일삼았습니다. 일본군 특유의 인명경시 풍조를 이어받은 신생 한국군은 민간인을 “보이는 대로, 아무나, 아무 데서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을 실컷 구타하고 기분을 풀었”습니다. 경찰 역시 일제의 헌병경찰제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잔혹하게 민간인들을 대했습니다. 위기에 몰린 친일세력이 일제에서 배운 대로 학살에 앞장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전쟁 시기의 대량학살은 바로 일제 식민지 지배의 직접적 유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드디어 ‘공산주의는 반역’이라는 담론이 등장했습니다. 빨갱이는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는 반역자며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북한의 김일성 측에서도 성립했습니다. 여기에 반역자는 3대를 몰살한다는 봉건제적 잔재에 따라 연좌제가 성립되었습니다. 마침내 학살은 개인과 개인을 넘어서 가족과 씨족의 단위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제는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해지고 그저 짐승과 짐승의 학살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사실상 ‘반공주의자’와 ‘빨갱이 인종’사이의 전쟁으로 해석되고 정당화되었습니다. 학살 당시 어린아이와 부녀자까지 마구 살해된 것은 이러한 논리와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은 ‘전투’로서의 전쟁 뒤에 가려져 있으나 민중들에게는 전투보다 더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국가 건설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전쟁 시의 학살은 국가 탄생의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시대를 바라보건대, 국가 건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국가는 과연 이러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건설되어야만 했을까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며 본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 수업의 발표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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